P. 22~23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이 어둠이 무엇의 어둠인지, 어디서부터 시작된 어둠인지, 그 어둠이 어떤 어둠인지 밝혀내는 일이다. 어둠 속에서 어둠 밝히기. 오늘날 그 어둠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한 지적 작업은 모든 사유에 드리워진 불안과 강박, 의무감 속에서 순환한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인 어둠에 맞서 절대적인 빛을 가져오는 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자. (……) 도덕과 양심, 돌봄과 책임이라는 종교적이고 의고擬古적인 수단만으로 이 어둠을 헤치고 나가는 것도 더는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다른 실천의 체제를 창안해야 한다. 낡은 전통에 함몰되지도 않고, 맹목적 합리성에 투항하지도 않는 새로운 실천의 체제는 필연적으로 전통과 합리성을 통해 셈해지지 않는 다른 언어의 체제를 요구한다. 바로 그 지점이야말로 문학과 철학이 자신의 무기를 벼려야 하는 지점이다.
1장, 「지금, 여기서, 사유를 지켜내는 법」
P. 38~39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자주 마주치게 되는 이른바 ‘팩트’에 대한 숭배는 바로 그러한 무기력한 체념과 착각의 가장 극단적인 결과일 것이다. 그러한 숭배가 적극성을 띨 때, 사태는 폭력적으로 변한다.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 모든 것은 무용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을 넘어, 제거되어야 하는 것으로 낙인찍힌다. 가능한 것만을 따르라는 명령은 모든 것을 폭력적으로 통제하게 된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헐떡이며 살아내고 있는 무자비한 현실이다. (……) 불가능한 것으로 낙인찍힌 새로운 가능성은 반드시 사유의 과정을 통해 하나하나 검토되어야 한다.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이 불가능의 욕망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상태에 대한 의심과 새로운 가능성의 탐색을 끊임없이 이어 나갈 수밖에 없다.
2장, 「사유의 충실성에 대하여」
P. 81
김수영은 그러한 상호적 각성의 힘을 잘 알고 있던 시인이다. 그의 〈현대식 교량〉은 젊음과 늙음의 교차와 그것을 가로지르는 사랑의 힘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죄가 많은 다리”는 그에게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나이 어린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다리를 건널 때, 시인은 “심장을 기계처럼 중지”시키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반항”이 아니라 “저 젊은이들의 나[시인]에 대한 사랑에 있다”. “선생님 이야기는 20년 전 이야기지요”, 청년의 지적에도 시인은 “그들의 나이를 찬찬히/ 소급해가면서 새로운 여유를 느낀다”. 그렇게, “늙음과 젊음의 분간이 서지 않는” 순간,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고, “젊음과 늙음”을 갈라놓는 심연으로서의 “다리”는 그 수많은 죄를 벗어던지고 “사랑을 배운다”. (……) 다름 아닌 그들의 “사랑”이 시인의 조바심을 그들의 나이를 헤아리는 여유로 바꿔놓는다. 이제 젊음과 늙음은 분별할 수 없는 것이 되고, 그렇게 넘어서는 것은 어떤 전환을 가져온다.
5장, 「청년의 ‘타락’에 대하여」
P. 93~95
객관적인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는 정의를 알지 못한다. 정의는 세계를 지배하는 가시성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흔히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시로 알려진 신동엽의 작품은 오늘날 낡디낡은 옛 읊조림으로 치부되기 쉽다. 하지만 가시적인 불의와 비가시적인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시를 세우는 시어詩語들은 다른 새로움을 우리 앞에 드러낸다. 우선 “껍데기”와 “알맹이”가 있다. 드러나는 “껍데기”와 그것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 “알맹이”는 가야 할 것과 남아야 할 것으로 지칭된다. 그리고 껍데기가 반복되는 가운데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이 등장한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울림마저 가물가물한 “아우성”이다.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이라는 구절 역시 비가시적인 것(“알맹이”)의 드러남을 말하고 있다. 이 시는 “향그러운 흙가슴”과 번쩍임으로 눈을 파고드는 “쇠붙이”의 대비로 마무리된다. 가시적인 것을 밀어내는 가운데,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내라는 명령은 이 시를 정체성에 얽매이거나 정체성을 중심으로 분별된 민족이 아닌, 명확한 증거도 없고 분별할 수도 없는 ‘비가시적인 민족(“아사달과 아사녀”, “중립의 초례청”)’의 정의 선언으로 만든다. 이때, 정의는 비가시적인 것의 드러남, 가시성의 법칙에 비추어 ‘잘못 보이는 것’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다.
6장,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정의와 불의의 딜레마」
P. 121~122
민주주의적 자유의 항상적恒常的인 딜레마는 자유 자체를 제한하는 동시에 다른 정치적 이념 역시 제한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 오늘날, 자유는 평등이나 정의를 위해 희생될 수 없는 지고의 이념인 동시에, 모든 정치적 이념을 규제하는 자유민주주의의 한계점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란 그런 식의 자유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 진정한 자유에 대한 사유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역설적으로 시의 영역에서다. 모름지기 시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영혼의 표현일 것이다. 시는 어떠한 한계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다른 어떤 것도 복종시키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시를 창조적인 실천으로 만드는 절대적인 힘이다. 시는 모든 것에 물음을 던지지만, 어느 무엇도 섬기지 않는다. 시는 자신의 언어 자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에 대한 물음을 만들어내고, 모두를 그 물음에 초대한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동시에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시는 그야말로 근원적인 자유에 대한 끈덕진 사유인 것이다.
8장, 「자유에 대하여」
P. 177~178
고대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할 때, 플라톤이 선언하는 기하학적 평등은 가히 혁명적이다. 그는 자연적인 차이(성차)를 우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한편, 실질적인 차이(성향의 차이)에 따라 각자의 자리를 배분하지만, 그와 동시에 통치자들이 가질 수 있는 특권과 지배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공통의 것the common을 사유한다. 기하학적 평등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플라톤이 여성의 문제를 평등을 사유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인류를 가르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인 성차를 평등으로 끌고 가면서, 그는 인류 최초의 페미니스트가 된다(그런 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여성 해방론자들은 플라톤의 후예로 간주될 수 있다). 그 이후, 사랑의 성인인 예수와 과감하고 선량한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그 뒤를 이었지만, 남녀평등은 오랜 세월 동안 거의 사유의 영역에 들지 못했고, 근대에 들어서면서야 부활하기에 이른다. 바야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성차에서 비롯된 불평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 다시 말해 여성 스스로를 해방하고자 하는 투쟁이다. 12장, 「성차와 평등에 대하여」 P. 202 말하자면 용기란 ‘지속의 용기’인 셈이다. 자동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사유를 지속할 때, 우리의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구축된다. 자동성이 지배하는 일상과 거리를 두는 새로운 일상이 나타날 테고, 그 일상 속에서 사유의 실천이 펼쳐질 것이다. 삶을 바꾸는 것은 용기다. 어느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성이 반복적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고, 당시 사회를 보던 나는 이 질문이 내가 여기저기서 사람들에게 이미 여러 차례 받았던 질문임을 밝히며 바디우의 답변을 청했다. 그의 대답은 상당히 정확했다. “당신의 삶에서 한 발만 밖으로 벗어나 보십시오. 그러면 무언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가 말했던 것은 삶에 부과되는 반복적인 자동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상과의 거리두기였다. 일상에 파묻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상과 거리를 두고, 그 바깥을 탐색하는 것이 그의 처방이었던 셈이다.
14장, 「조금은 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