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쓸모를 생각한다
부지런한 보수주의자! 경제와 결과에 미친 사람!
보수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만 실패를 감당하지 못할 변화를 거부할 뿐이다. 한국의 보수는 원래 그런 존재였다. 보수는 결코 ‘지키고 유지하는’ 집단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토대를 세운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과 경제활동의 토대를 전 세계로 넓힌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은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급진적인 도전이었다. 박정희의 대기업 육성 정책과 중화학공업 도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미국이 이끄는 자유세계 블록에 속한 국가의 대통령이면서도 한국의 미래를 위해 미국과 기꺼이 갈등하는 위험을 감수했다. 도전은 언제나 한국 보수의 미덕이었다. 또 보수는 언제나 실패에 민감했다. 진보가 대의와 이상을 부르짖을 때, 보수는 결과를 물었다. “대의와 이상은 좋다. 그런데 지금 당장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보수의 출발점이 되는 질문이다. 그런 보수가 지금 존재하는가? 존재한다. 바로 이재명이다!
이재명은 민주당 출신이지만, 오랫동안 보아온 기존의 민주당 정치인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오랜 진보 정치의 도그마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무시한다. 정의와 대의의 이름 아래 벌어지는 이념 투쟁보다 지금 여기의 고통을 줄이는 일에 더 관심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의 박정희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성공을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시스템 설계자였다는 사실이다. 의료보험, 새마을운동, 국토 종합개발계획, 중화학공업 정책—모두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국민에게 시혜를 남발하는 포퓰리즘 대신 구조 자체를 바꾸는 기획이었다. 이재명의 기본소득과 같은 맥락이다. 박정희가 농촌 가난에 구조적으로 접근했다면, 이재명은 도시 빈곤에 구조적으로 접근하고 대한민국이 선진국에서 탈락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한다.
이재명은 길 위에서 자랐다. 상처를 껴안고 공부했고, 분노하되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정치를 시작했다. 그렇기에 정치가 정의를 말할 수는 있어도, 정의로 먹고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안다. 가치가 구조를 이기지 못하고, 구호가 시스템을 대체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가치를 다루되, 시스템으로 구현된 결과로 보여주고자 한다. 이재명은 결과주의자다. 보수진영에게는 민주당 소속이라는 이유로 적이었다. 민주당 내에서는 가치중심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비주류였다. 바로 이것이 이재명의 쓸모를 증명한다.
이재명은 보수다. 아니, 정확히는 오랫동안 한국 정치가 망각해온 보수의 본령을 계승한 인물이다. 지금의 ‘자칭 보수’는 이미 보수가 아니다. 과거 권력의 감성을 흉내 내는 “추억의 정치”, “잔상의 정치”일 뿐이다. 반면 이재명은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구조를 설계하려 한다. 이 땅에 보수는 아직 있다. 보수는 이재명이다.
국가는 국민을 먹여 살려야 한다
누가 박정희의 실용적 국익주의를 계승할까
민족자강론자 박정희는 김구와 안중근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를 중심에 놓았지만, 국민이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이념과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박정희 보수주의의 핵심은 실용적 국익주의였다. 그는 미국이라면 껌벅 죽는 한국의 자칭 보수세력과는 반대로 미국과의 마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반공뿐 아니라 반일 민족주의도 국시로 삼았지만, 산업화의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굴욕적인 한일기본협정을 감내했다. 그는 민족의 생존을 위한 실용주의자였다. 새마을운동, 중화학공업 육성, 국민의료보험, 국토개발계획 등 박정희의 모든 정책은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기 나름의 분명한 대답이었다. 국가는 근본을 지키되 국민을 먹여 살리는 구조여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에게 있어 국가란 ‘생존’과 ‘자립’이었다.
이재명은 민주화만을 인정하고 산업화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는 민주화와 산업화 모두를 인정한다. 그는 ‘산업화 30년’과 ‘민주화 30년’을 모두 인정한 채로 그 토대 위에서 다가올 ‘기본사회 30년’을 말한다. 현재 한국이 간신히 선진국 문턱을 넘은 나라라면 앞으로는 선진국에서 탈락할 수 없는 국가가 되자는 목표다. 이재명은 한국 좌우의 역사를 모두 미래의 토대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민주당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박정희를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그는 박정희의 강력한 추진력과 국가 주도 산업화 전략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반대편이 모욕하는 것처럼 2025년 들어 갑자기 ‘성장’을 말하기 시작한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이재명은 이미 2021년에 20대 대선을 위한 공약에서 박정희를 인정하고 당당히 계승할 역사의 주인공으로 호명한 바 있다. 박정희에게 잘못도 많지만 그의 공로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이재명은 ‘박정희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국가 주도의 과학기술 육성’을 긍정하고 그 역사적 흐름을 계승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그는 4년 후 출간한 저서 《결국 국민이 합니다》에서 또 한 번 강조해 말한다.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미래 앞에는 여도 야도, 진보도 보수도 없다.”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 등 독립/건국운동의 선열들 앞에 숙연히 고개를 숙일 줄 알고, 현행 헌법에 명시된 제헌헌법의 가치와 헌정질서를 지키며, 대한민국의 경제와 안보를 파멸에서 건져낼 이가 있다면 그가 진짜 보수일 것이다. 이 시점 대한민국에서 그러한 기준에 적합한 보수는 바로 이재명이다. 거기에 더해 그는 박정희의 실용주의적 민족자강론을 계승할 유일한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 보수라 생각하는 이들이 국민의힘과 검찰, 보수 언론, 뉴라이트, 극우 유튜버 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이재명’에 휘둘려 잘 모르는 채 반대하는 일은 서글픈 광대극이다. 반대할 거면 사리에 맞게 해야 반대해야 한다. 그게 보수주의자 이재명에게 합당한 응답일 것이다.
실리적이고 건설적인 한미 관계를 위해서도
이재명이 필요하다
2025년 1월, 트럼프가 아니라 바이든 정부의 해리슨이 대통령에 취임했다면 한미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 언론들은 두루뭉술 넘어갔지만 바이든 정부는 비상계엄을 분명하게 비판했다. 당시 국무부 2인자였던 커트 캠벨 부장관은 윤석열 대통령이 “심각한 오판을 했다(badly misjudged)”면서 계엄 행위를 “illegitimate”라고 꼬집었다. ‘위법적이고 정당성이 없다’는 의미다. 국무부 고위 관리가 동맹국 정상에게 이런 표현을 공개적으로 사용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미국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은 윤 대통령을 ‘불량(rouge)’ 대통령’이라 지칭했고, 계엄을 “쿠데타 시도(attempted coup)”라고 규정했다. 미국이 동맹국 정상에게 내린, 사실상의 ‘외교적 탄핵’이었다. 한국의 사법 체계는 그를 파면하는 데 120일이 넘게 걸렸지만, 워싱턴은 불과 며칠 만에 그를 외교적으로 파면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지속되고, 바이든 행정부의 연장선인 해리스 행정부가 출범했다면, 한미관계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계산이 빠르다. 트럼프 진영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 열린 2017년 조기 대선 과정을 지켜본 바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아시아 담당자들은 6월 3일, 자신들의 보스에게 전달할 ‘이재명 프로파일’을 이미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계엄 및 탄핵 정국 동안 소위 ‘태극기 부대’로 일컬어진 이들의 광화문 시위에는 태극기뿐 아니라 성조기도 등장했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윤석열 전 대통령을 ‘구명’해줄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미동맹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친미야말로 보수의 근간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미국은 윤석열을 ‘손절’하고 이재명과 대화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휘날리는 곳에서 이재명을 반미와 좌파의 수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정작 저들이야말로 내란을 일으킨 ‘수괴’면서 말이다. 친미가 보수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이 맞다면, 보수는 이재명을 지지해야 한다.
‘이재명 대 트럼프’라는 대진표의 결과가 어떨지 지금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미국이 버린 윤석열을 배출한 국민의힘 정치인보다는 우리에게 유리할 것이다. 대한민국 외교는 백악관과 미국 행정부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워싱턴 조야의 일정 지분을 갖고 있는 민주당도 중요하다. 미국 민주당은 계엄 내란 사태를 일으킨 윤석열을 일찌감치 외교적으로 탄핵했다. 그렇기에 불법 계엄을 저지한 야당 지도자 이재명은 민주주의의 원조국인 미국의 면전에서 동맹국 지도자로서의 정당성을 내세울 수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적이고 법리적인 절차로 내란 수괴를 권좌에서 끌어내림으로써 미국 앞에서 체면치레에 성공했다. 새로운 정권의 새로운 지도자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외교, 성공하는 외교를 보여줄 다음 순서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