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_
1500년 동안 끊이지 않은 교황과 황제의 권력 다툼
처음에 하드리아노 4세는 자신을 마중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1세가 보낸 남작들 일행의 호위를 받으며 근엄한 자태로 말을 타고 황제의 진영으로 갔다. 그러나 곧 문제가 발생하였다. 전통적으로는 왕이 앞서서 교황이 탄 말에 굴레를 씌워 끌고 교황이 말에서 내려설 때는 등자를 잡아주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말에서 내려서는 그 순간 하드리아노 4세는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지만, 이내 혼자서 내리더니 천천히 걸어서 자신을 위해 준비된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제야 프리드리히 1세는 앞으로 걸어 나와 교황의 발에 입을 맞추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교황으로부터 전통적인 평화의 입맞춤을 받기 위하여 일어섰다. 이번에는 교황이 어깃장을 놓았다. 최고의 권위인 교황에게 선대의 왕들이 제공했던 그 의식을 프리드리히 1세가 분명하게 거부했으니 이를 바로 잡기 전까지는 교황이 내리는 평화의 입맞춤도 있을 리 만무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마치 신부의 들러리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자신이 지켜야 할 의무의 일부는 아니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노 4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표면에 드러난 소소한 외교 의례에는 현실에서 보다 중요한 뭔가가 감추어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황제와 교황 사이의 관계에 근본적 타격을 주는 도전적인 태도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프리드리히 1세는 항복했다. 그는 자신의 막사를 좀 더 남쪽으로 이동시키라고 명했고, 6월 11일 아침 그곳에서 이틀 전 제대로 거행하지 못했던 의전례를 다시 치렀다. 프리드리히 1세는 말을 타고 오는 교황을 맞이하여 그의 말에 굴레를 씌워 끌고 교황이 말에서 내릴 때는 등자를 꽉 잡아주었다. 하드리아노 4세가 다시 마련된 교황의 자리에 앉아서 적법한 절차에 따라 평화의 입맞춤을 한 뒤 대화가 시작되었다.
_291~292쪽, 11장 영국 출신 교황
교황 vs 교황, 누가 더 적법한가
서방의 그리스도교는 이제 역사상 유례 없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대립교황 같은 문제는 이전에도 있었기에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현재는 두 명의 경쟁자가 모두 같은 추기경들에 의해서 선출되었다는 점이다. 우르바노 6세의 선출 과정은 당연히 적법한 절차를 거친 것이었지만—그래서 아무도 그의 폐위 청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반면에 그를 퇴위시킨 방법은 유례 없는 것이었다. 자신을 교황으로 선출해준 사람들에 의해서 폐위를 당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르바노 6세는 정신병적인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유럽 대륙은 양분되어 갔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 그리고 중앙 유럽은 여전히 우르바노 6세에게 충성을 보인 반면, 스코틀랜드, 프랑스, 사보이, 부르고뉴 그리고 나폴리는 클레멘스 7세의 권위를 인정했고, 오랜 망설임 끝에 아라곤과 카스티야도 클레멘스 7세의 손을 들어 주었다.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유배를 갔던 시절도 교회는 어떻게 잘 버텨냈지만, 두 명의 교황이 한 명은 아비뇽에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로마에 있는 그런 경우는 참으로 대처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두 명의 교황의 존재는 두 개의 추기경회와 두 개의 상법부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며, 하나의 관할구나 수도원에 두 명의 책임자가 임명되고 그에 따른 경비도 2배가 지출된다는 뜻이었다. 경비 측면에서 보자면, 아비뇽에 머물고 있던 클레멘스 7세가 유리했는데, 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부서가 완전히 로마로 옮겨가진 않았기 때문이다. 클레멘스 7세는 그 자신과 이름이 같은 사치스러웠던 클레멘스 6세 교황과 경쟁이라도 하듯 교황궁을 호화스럽고 사치스럽게 꾸몄고, 그곳에서 자신의 경쟁자인 우르바노 6세에 맞서 싸움을 계속해나갔다. 그에 반해 우르바노 6세의 주변은 너무도 분주했다. 가까이 있는 그의 적은 대담하게도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는 나폴리의 조반나 여왕이었다. 물론 그녀는 곧 응분의 대가를 치렀다. 우르바노 6세는 1380년 그녀에게 파문을 내리고 그녀의 왕관을 그녀의 사촌인 두라초의 젊은 카를로Charles에게 넘겨주었다. 그다음 해 나폴리로 들어온 카를로는 조반나를 무로의 성에 가두고 곧이어 질식사시켰다.
_439~440쪽, 16장 하늘이시여, 기뻐하소서!
플로렌스를 피로 물든 파치가의 음모
교황은 어디까지 개입했는가?
그들 두 가문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으면서 음모가 꾸며졌고, 1478년 4월 26일 프란체스코 데 파치와 살비아티 대주교의 명을 받고 계략이 실행되었다. 플로렌스 대성당에서 장엄 미사가 집전되는 가운데, 사전에 계획되었던 그 순간—성체를 받들려는 순간—이 오자 프란체스코를 포함한 암살자들이 메디치가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를 습격하여 가슴과 등을 십여 차례—목격자들은 19회라고 말했다—이상 칼로 찔렀다. 다음 순간 암살단은 로렌초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단검을 꺼내들고 맞서다 성가대 쪽으로 뛰어들어 성구보관실로 달아났다. 그는 중상을 입었어도 생명을 잃지는 않았지만, 줄리아노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즉시 플로렌스 전체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음모에 가담했던 자들이 신속히 색출되었고, 그들에게는 그 어떤 자비도 허용되지 않았다. 로렌초는 동쪽 성벽 외부의 처형장을 사용하는 대신 일벌백계로 삼도록 다른 처벌 방법을 택했다. 위대한 인문주의자 포조의 아들 야코포 브라치오리니를 시뇨리아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창에 매달고, 같은 운명을 맞이한 프란체스코 데 파치, 대주교와 그의 동생 야코포 살비아티도 로자 데이 란치[이탈리아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화랑]의 꼭대기 창문에 매달았다. 인문주의자이며 고전 학자로 로렌초 데 메디치의 제자였던 안젤로 폴리치아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짐작건대, 죽어가고 있던 대주교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옆에 매달려 있던 프란체스코를 너무 잔인하게 깨물어버려서, 죽고 나서 한참 후에도 프란체스코의 가슴에는 앙다문 그의 이빨 자국이 남아 있었다.’
식스토 4세는 정말로 파치가의 음모에 개입했던 것일까? 틀림없이 그는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었을 테고, 아마도 적극적으로 독려했을 것이다. 왜냐면 그는 누구보다 메디치 가문이 축출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사람이니 말이다. 전해지는 말로는 그는 유혈사태는 없어야 한다고 했다는데, 처음부터 암살을 모의했던 음모가 어떻게 피를 보지 않기를 바랐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식스토 4세는 늘 위협의 수단으로 써먹던 그 패를 꺼내들어 메디치가에 파문을 명하고 플로렌스 전체에 성무집행금지령을 내려, 이탈리아는 또 다시 전운에 휩싸였다. 파치가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만약 메디치가의 로렌초가 조금만 더 운이 없어서 자신이 동생처럼 파치가의 칼을 맞고 죽는 운명이었다면, 그래서 파치가의 음모가 성공을 거두었다면, 플로렌스 통치체제는 급변했을 것이고 그 누구보다 식스토 4세가 그런 변화를 반겼을 것이다.
_492~494쪽, 17장 르네상스
정부를 끼고 살았던 교황과 그런 교황을 등에 업고 무법자가 된 아들
눈엣가시였던 샤를 8세가 프랑스로 돌아가자 알렉산데르 6세는 가족의 지위 강화라는 자신의 주요 과업을 거리낌 없이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벌써 간디아의 군주 지위를 얻어낸 그의 맏아들 조반니는 나폴리의 왕관을 쓰도록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1497년 6월 조반니가 사라지면서 이 야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조반니는 이틀 후 티베르 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는 목에 깊은 자상을 입었는데 칼에 찔린 자국이 9군데도 넘었다. 그를 살해한 자는 누구였을까? 당시 조반니는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이였으나, 난폭하며 불안정한 성격과 남편이 있는 여자들을 주로 농락하는 나쁜 버릇으로 수많은 적을 만들었다.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바로 그의 동생 체사레였다. 풍문에 의하면, 동생 호프레의 부인 즉 그들에게는 제수씨가 되는 산시아인지 아니면 여동생 루크레치아인지 알 수 없으나, 하여튼 두 사람이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경쟁을 벌였다고 한다. 체사레는 능히 형제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3년 후에는 여동생의 두 번째 남편이자 자신의 매제인 아라곤의 알폰소도 거의 죽일 뻔했으며, 평소에도 맏형인 조반니에 대한 질투심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알렉산데르 6세의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3일간 물도 음식도 입에 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범죄로 인해 공식적인 유죄 판결은커녕 기소를 당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교황이 다행스럽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체사레도 정말 떳떳했다면, 자신의 형을 죽인 자를 색출하기 위해 온 나라를 뒤흔들어 놓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말이다.
_511쪽, 18장 괴수들
로마를 수도원으로 만든 금욕적인 교황
비오 5세Pius Ⅴ(1566~1572)—그가 ‘바오로’라는 교황명을 쓰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는 바오로 4세 교황과 판에 박은 듯이 닮아 있었다. 그는 교황이 되고 나서도 짧은 머리를 고수했으며 교황의 제의 아래에 도미니코회 수사들의 복장을 걸쳤고 참회 행렬 때는 정기적으로 맨발로 걷는 등 상당히 금욕적이었고,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이런 금욕적인 삶을 기대했다. 일련의 모든 칙령들 가운데서도 신성모독을 근절할 방안을 모색하고—신성모독을 저지른 이들 가운데 부자들에게는 무거운 벌금을 매기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태형을 가했다—축일과 공심재를 제대로 준수하도록 했다. 고해성사를 하지 않거나 최근에 성체를 모시지 않은 신자들은 의사의 진찰도 받지 못하게 했다.
성性에 관한 문제는 언제나 골칫거리였다. 매춘 자체를 완전히 폐지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교황은 칙령을 선포하여 모든 미혼의 창녀들은 채찍질을 당할 것이며 남색행위를 했다는 혐의가 드러나면 화형에 처하겠다고 했다. 간통에 대하여 사형죄를 적용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독신 남성이 여성을 하인으로 고용하는 것도 금지됐고, 수녀들은 수캐도 키울 수 없었다. 바티칸의 수집품들 가운데 여성 조각품들은 빗장이 채워졌다. 시스티나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속의 인물들도 순결하게 보이도록 다시 덧칠을 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로마 시민들은 비오 5세가 도시 전체를 거대한 수도원으로 만들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_601~602쪽, 20장 반종교개혁
방종과 폭식으로 죽음에 이른 율리오 3세
늘 그렇듯, 음모와 모함이 오가고 난 후, 결국 프랑스와 이탈리아 측에서는—비록 황제의 반대가 있었지만—상대적으로 별 볼 일 없는 후보에게 동의를 했다. 그의 이름은 조반니 마리아 초키 델 몬테—율리오 3세Julius III(1550~1555) 교황으로 알려짐—로 능력 있는 교회법 변호사였고, 25년 전 로마가 약탈을 당하던 때에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공동 의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보다 그는 이노첸츠라는 이름의 17살짜리 소년에게 미혹되었던 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2년 전 파르마 길거리에서 그 소년을 데려왔다고 하는데 즉위식이 끝나자마자 그 소년을 추기경의 자리에 앉혔다.
율리오 3세는 교황으로서 자신의 소임을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전형적인 르네상스 스타일의 교황을 보게 된 것이다. 수치를 모르는 듯 방종하고 친족등용을 서슴지 않고, 그가 여는 연회—로마에서는 널리 회자되었다—는 주요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뜨면 언제나 진탕 먹고 마시는 동성애 파티로 전락했다. 율리오 3세 교황은 교외의 빌라 줄리아—지금은 교외의 작은 마을이 아니라 국립 에트루리아 박물관이 자리한 도시로 성장했다—의 별장에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였고,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상당히 심취했다.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을 성가대와 자신의 부속 예배당의 악단 지휘자로 고용했다. 다소 놀라운 사실은 교회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어—그는 예수회를 독려하고 트렌트 공의회가 관례대로 진행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메리 1세Mary Ⅰ가 왕위를 계승하여 영국을 다시 가톨릭의 품으로 돌려주었을 때 적잖이 기뻐했다. 그러나 그의 주요 관심사가 쾌락의 추구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러 가지 알려진 안 좋은 것들 중에서도 그의 폭식은 유명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지만, 그의 종말을 가져온 것이 바로 폭식이었다. 그는 소화기관이 갑자기 기능을 멈추면서 1555년 3월 23일 선종했는데, 음식을 못 넘겨 아사한 것이었다.
_595쪽, 20장 반종교개혁
“교황은 로마의 군주지만, 나는 로마의 황제다”
황제 즉위 1년 후, 나폴레옹은 6만 8천 명의 군대로 9만 명의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상대로 모라비아의 아우스터리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805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프레스부르크(현재의 브라티슬라바)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오스트리아는 1797년의 캄포포르미오 조약으로 획득한 베네치아를 프랑스에 반환해야 했고, 이스트리아와 달마티아 해안선을 따라 나폴레옹의 새로운 이태리 왕국이 건설되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이 모든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차지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선전포고도 없이 교황령 항구인 안코나를 합병했고, 이에 교황은 격노하였다. 앙드레 마세나 원수 휘하의 4만 군대는 남부 이탈리아의 교황령으로 진격했다. 조제프 보나파르트도 황제의 개인 대리인 자격으로 함께했다. 교황이 예민하게 항의하자, 나폴레옹은 매섭게 대응했다. ‘교황 성하는 세속 세계의 일에 대해서는 나를 존중해야 합니다. 내가 영적 세계에서 그러하듯 말입니다. 교황 성하는 로마의 군주이지만, 나는 로마의 황제입니다.’
_715쪽, 24장 진보와 반동
존경과 추앙을 받았지만 사랑을 받지 못한 교황, 레오 13세
레오 13세는 전 세계적으로 존경과 추앙을 받았지만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그 어느 세속 군주도 그보다 더 만사에 격식을 차리지는 않았다. 레오 13세는 방문자 모두가 알현하는 내내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수행원들은 그의 곁에 있을 때 의무적으로 계속 서 있어야 했다. 25년 동안 단 한 차례도 마부에게 말 한마디 건넨 일이 없었다고도 한다. 그러니 레오 13세의 선종 후에 추기경들이 변화를 원했을 만도 하다. 그리고 그들은 변화를 얻어냈다. 비오 10세Pius X(1903~1914)라는 교황명을 택한 주세페 사르토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3세기보다 이전의 식스토 5세 이후 최초) 베네토의 마을 우체부와 재봉사의 아들이었다. 본당 신부로 8년을 보낸 그는 이후 만토바의 주교로, 베네치아의 대주교로 지냈지만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본당 신부로 남아서 교황 임기 중에도 매주 일요일 오후에 직접 교리문답서를 가르쳤다. 위엄 있고 엄격하거나 무심하고 냉정한 전임자의 모습을 비오 10세에게서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따뜻하고 가까이 다가가기 쉬운 데다 이론보다도 현실을 특히 중시하는 교황이었다.
_777쪽, 26장 레오 13세와 제1차 세계대전
나치의 만행을 보고도 침묵한 비오 12세
이것이 전부였다. 이번에도 유대인이나 나치는 물론이고 독일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가끔씩이지만’이라는 말을 교묘히 추가하는 바람에 대학살의 바탕에 있는 민족이라는 요소가 흐려졌다. 1942년 크리스마스까지만 해도 수백만 명이었던 희생자는 ‘수십만 명’으로 은근슬쩍 줄어들었다. 이 방송을 들은 무솔리니는 치아노에게 말했다. ‘차라리 프레다피오의 본당 신부가 하는 게 나았을 상투적인 말들뿐이로군.’ 그때까지 다른 중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이탈리아에 있는 유대인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로마에서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한 8천여 명은 줏대 없는 교황에게 너나없이 크게 분노했으나 무솔리니 총통이 권력을 유지하는 동안은 대부분 무사했다. 무솔리니가 반유대주의 법을 여러 개 제정하기는 했지만 효력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1943년 7월이 오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침공했고 로마에 폭탄을 투하했으며 무솔리니는 체포되었다. 거의 2년 후인 1945년 4월 29일 무솔리니와 클라레타 페타치는 즉결 처형되었고 교수형을 당한 그들의 시신은 차고 지붕에 매달린 채 남겨졌다. 9월 11일 로마는 독일의 손에 넘어갔고 알베르토 케셀링 장군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10월 18일 히틀러 친위대는 유대인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_815쪽, 27장 비오 11세와 비오 12세
끊이지 않는 논란 타살인가, 아닌가?
요한 바오로 1세는 살해된 것일까? 그렇게 믿을 이유들은 틀림없이 존재했다. 67살치고 그는 무척 건강했다. 검시나 부검은 없었다. 교황청은 분명히 어쩔 줄 몰라 했고 그가 어떻게 사망했고 시신을 어떻게 발견했는지에 관한 사소한 거짓말을 여러 차례 들켰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믿는 것처럼 만약 그가 바티칸 은행과 바티칸 은행장 폴 마르친쿠스 대주교가 깊이 연루되어 있는 대형 재정 스캔들을 폭로하려는 찰나였다면 그것을 막기 위해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을 국제 범죄자가 적어도 세 명 있었다. 그중 한 명인 암브로시아노 은행의 로베르토 칼비는 이후 런던 블랙프라이어스 다리 아래에서 목이 매달린 채로 발견되었다. 더 나아가 바티칸은 살인이 쉬운 곳이다. 자체 경찰이 없는 독립국이고 이탈리아 경찰은 요청을 받았을 때만 들어갈 수 있는데, 당시 그런 요청은 없었다.
_842, 28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후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도 암살자를 용서한 요한 바오로 2세
1981년 5월 13일 늦은 오후, 교황이 일반 알현 중에 교황 전용차를 타고 성 베드로 광장을 둘러 가고 있을 때 알리 아자라는 터키 암살자가 그의 정면에서 총을 세 발 발사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제멜리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다. 아자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나중에 심문 중인 치안판사에게 자신이 가톨릭교회는 물론 미국과 러시아 제국주의를 모두 혐오하는 ‘국가주의 무신론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자는 1979년 11월에 교황이 터키를 방문하던 시기에 암살을 계획했지만 목표물이 지나치게 철저히 보호받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아자의 자금줄—만약 있다면—로 불가리아 정부가 크게 의심을 받았지만 진짜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건강을 회복한 요한 바오로 2세는 암살 미수자를 용서한다고 발표했다. 1983년에 교황은 감옥에 있는 아자를 방문했고 두 사람 사이에는 무언가 우정 비슷한 감정이 싹텄다. 말년에 교황은 아자의 어머니와 형제의 알현을 받기도 했다.
_845, 28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