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텍스트 ‘우생학’
지금-여기
우리가 우생학을 다시 살펴야만 하는 이유
프랜시스 골튼의 과학적 유산으로 시작된 우생학은 20세기 내내 인류 사회를 휘감은 가장 위험한 사유 방식이었다. 단비의 신간『우생학: 배제, 차별 그리고 혐오의 역사』는 고대 철학부터 현대 생명 과학까지 이어지는 우생학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며, 이 이념이 어떻게 인종, 성, 장애, 계급, 노동 등 인간 실존의 조건에 폭력적으로 개입해왔는지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역사에 대한 연구와 이해는 ‘지금-여기’ ‘우리 안의 우생학’을 살피는 밑거름이 되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체화되었을 수 있는 우생학의 원리와 구분 짓기에 예민한 감각을 일깨워준다. 김호연 교수는 ‘우월함’과 ‘완전성’에 대한 열망으로 트랜스 휴머니즘, 포스트 휴먼, 생명 자본주의, 그리고 디지털 사회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우생학적 욕망과 구조를 직시하며, 우리 안에 내면화된 ‘정상성’의 기준을 성찰한다. 그는 지금-여기 우리 삶을 관통하고 있는 다양한 논쟁적 사안과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우생학의 그림자를 날카롭게 파헤치며, 진정한 인간 존엄과 연대를 향한 실천을 촉구한다.
• 이 책의 내용
▶선택과 배제의 과학, 우생학
우생학은 “그리스어 εύϒενής(eugene)에서 온 말로 출생이 좋다(good in birth)는 의미이고, 그것은 잘난 태생에 대한 과학을 표방했다.” 19세기 영국의 프랜시스 골튼에 의해 창안된 우생학은 미래 세대 인종의 질을 개선하거나 저해하는 요인을 통제할 ‘사회적 수단’으로써 활용되었다. 우리가 우생학을 인간의 여러 실존적 조건 아래 살펴보는 것은 ‘누가 정상 인간인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갈 국가와 사회의 본질과 그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우리 스스로에게 묻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우생학의 탄생과 전개를 통사적으로 살핌으로써 과학은 중립적이지 않았고, 국가와 이념의 수단이 되었으며 우생학은 생명의 위계화, 인간의 도구화를 정당화하는 강력한 폭력으로 작동했음을 알 수 있다. 우생학적 사고는 과학과 통계의 외피를 입고 ‘사회 진보’라는 이름 아래 강제 불임, 이민 제한, 혼인 금지, 나치의 학살로 이어졌다. 저자는 본서를 통해 ‘과학이라는 지식의 본질적 특징과 과학-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올곧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모두의 국가 아닌, 선택된 국민의 국가
우생학은 특정한 정치 체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표방한 미국과 영국, 복지국가인 북유럽, 전체주의 독일과 일본, 사회주의 러시아와 중국까지 모두 우생학을 채택했다. 국가는 국민을 선별했고, 우수한 신체와 정신을 지닌 자만을 ‘국민’으로 인정했다. 정상과 비정상, 적격과 부적격이라는 이분법은 과학의 언어로 포장되어 사회정책이 되었다. 이 책은 다양한 국가들이 어떻게 우생학을 자신들의 체제와 목적에 맞게 활용했는지 면밀히 추적하며, 우생학이 단지 보수나 극우의 논리가 아니라, ‘국가 효율’이라는 명분 앞에 모든 이념이 쉽게 수용할 수 있었던 유혹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생학을 국가와의 연결고리 속에서 파악하는 것은 국가경쟁력은 물론이고, 산업 그리고 개인의 일상과 미래까지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시사점을 안겨준다.
▶강화 인간과 생명 자본주의, 여전히 작동하는 우생학
오늘날에도 우리는 유전자 조작 아기, 인공 장기, 수명 연장, 인공지능과 결합된 포스트 휴먼에 대한 열망에 둘러싸여 있다. 무엇이 ‘좋은 생명’인가를 기준 짓고, ‘더 나은 인간’을 생산하려는 흐름은 여전히 강하다. 소비자는 유전자를 선택하고, 사회는 정상성과 능력 중심의 기준으로 인간을 평가한다. 저자는 이 모든 과정이 우리를 새로운 우생학적 세상으로 이끌고 있는지 모른다고 경고한다. 이 책은 우리 안에 내면화된 우생학적 사고를 직면하게 만들고, 더 존엄한 사회를 향한 질문을 던진다.
▶ 우생학을 우리 시대의 텍스트로 삼아야 하는 이유
우생학은 이상주의적인 프로젝트였으나, 결국 자격을 갖추지 못한, 즉 부적격한 존재들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폭력적인 도구로 기능했다. 따라서 우리가 우생학-정상-신체를 연결하여 이와 연관한 다양한 주제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국가-사회의 본질과 그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고 누가 과연 정상 신체를 가진 인간인가를 우리 스스로에게 묻는 과정일 것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체화되었을 수 있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구분의 기저에 우생학적 원리와 그에 기초한 사고방식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우생학의 역사를 지금-여기에서 살펴야만 하는 이유이다. 김호연 교수의 간곡한 바람과 당부가 담긴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독자들에게 가 닿기를 소망한다.
“누군가의 비참함이 지속되는 사회라면 희망은 없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의 내면까지 잠식하고 있는 구조화된 폭력의 문화로부터 탈출해야만 한다. 배제와 차별, 그리고 혐오의 역사로 점철된 우생학의 역사에 대한 이해, 다른 삶과 좋은 세상을 지향하는 성찰과 실천의 추동력을 만드는 출발점이 되기를 소망한다.”
• 이 책의 구성
1부 우생학의 탄생과 전개 그리고 변신을 통사적으로 다뤘다. 고대의 우생적 사유에서 출발해 19세기 프랜시스 골튼의 과학적 우생학 개념으로 발전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대량 학살, 그리고 이후 개혁 우생학과 유전학의 등장까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선별하고 배제했던 우생학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오늘날 생명 공학과 트랜스 휴머니즘의 맥락에서 우생학이 어떻게 재등장하고 있는지 성찰해 가며 우생학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을 알려준다.
2부 우생학이 민주주의, 복지주의, 전체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국가 체제 속에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분석한다. 영국과 미국의 정책, 북유럽 복지국가의 불임 정책, 나치 독일과 일본의 강제 생식 통제, 러시아·중국의 계획생육 등, 국가는 ‘국민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명목 아래 우생학적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우생학이 국가경쟁력과 성장을 추구하는 세력이라면 누구에게든지 매력적인 수단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기회가 된다.
3부 인간 실존의 중요한 조건들과 우생학의 상관성을 밝혔다. 정신장애인, 여성, 이민자, 노동자, 인종적 소수자 등은 ‘정상’과 ‘우월’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자격을 박탈당했다. 우생학은 몸, 성, 노동, 생식, 유전자 등 인간 실존의 모든 조건을 위계화하고 통제하며, 과학과 정책을 통해 차별을 제도화했다. 국민의 자격을 판별하는 수단으로 기능한 우생학이 배제와 차별과 혐오의 과학이자 이념으로 활용된 이유와 그 결과를 성찰적으로 살피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