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죽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죽고 싶다는 사람도, 다가오는 그 시간 앞에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이 떠난 후 남겨질 사람, 자신이 떠나도 소식조차 모를 사람, 내 죽음이 폐를 끼칠 사람, 내 장례를 치러줄 사람, 내 장례식에 올 사람… 인생의 마지막에 떠올리는 건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사람은 말기 암을 선고받고도 다음 날 출근을 하고, 메일을 열어 거래처와 일정 조율을 하고, 장을 보고 밥을 하고, 주말에는 요양원을 찾아간다. 혼자 살아가는 사람은 없으니까. 유언이라는 걸 남기고 마지막 인사를 준비한다. 내가 죽음에 관해 아는 유일한 한 가지는, 혼자 죽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다. _15~16쪽
내가 처음 입관을 지켜본 이는 여든이 훌쩍 넘은 남자 노인이었다. 그때 나는 장례지도사 실습생 신분(염습과 입관 참관이 허락된다)이었다. 안치대에 누운 그를 보며 안타까울 정도로 마른 몸이라 생각했는데, 그 뒤로 보게 되는 노인 대부분이 그랬다. 살아내는 데 연료로 써버린 듯 근육과 살이 말라붙어 있었다. 배가 없어 가슴뼈 아래가 가파르게 기울어진 데다가, 팔이건 무릎이건 한 군데 이상 굽어 있었다. 나는 사람이 시체로 나타났다는 사실보다 늙은 몸으로 등장한 데 더 놀랐다. 나이 듦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벗은 몸. 나는 나이 듦도 모른 채 죽음에 대해 알고자 했던 것이다. 고인의 몸에서 욕창 밴드를 떼어내며 죽는 일보다 늙는 일에 대해 먼저 배웠다. _24쪽
시신은 당연하게도 부패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이럴 때 시신을 물로 씻으려고 하면 피부가 다 쓸려나간다. 탈지면으로 온몸을 감싸고 기다려야 한다. 대규모 작업이라 장례지도사 서너 명이 동원됐다. 문제는 얼굴. 다른 곳은 한지로 감쌀 수라도 있지, 얼굴은 입관 때 가족에게 보여야 했다. 사라진 눈을 만들고, 부서진 코를 세우고, 눈썹마저 한 올 한 올 새로 그렸다. 피부색을 돌리는 일은 시신 메이크업을 담당하고 있는, 그의 아내이자 동료인 고정순이 담당했다. _58쪽
장례업에 젊은 여성들의 유입이 크게 늘었다. 상조회사가 많아지면서 장례업 분위기가 달라진 까닭도 있지만, 장례의 성격이 가문의 의례에서 가족 행사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주요한 이유일 테다. 사람들은 장법을 잘 아는 호상을 필요로 하기보다 가족 행사를 매끄럽게 진행해줄 ‘플래너’를 원했다(실제로 ‘웨딩 플래너’처럼 ‘엔딩 플래너’라는 명칭을 홍보에 사용하는 상조회사도 있다). _70쪽
가까운 이의 임종 직후, 당신은 장례식장이나 상조 서비스를 가입해둔 상조회사의 팀장에게 연락하게 될 것이다. 다들 그러니까. 팀장인 장례지도사는 임종한 장소의 주소를 묻고 운구할 차를 보내겠다고 한 뒤, 당신에게 과제를 내줄 것이다.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으라고.
사망진단서 없이는 장례를 시작할 수 없다. 예전에는 사망의 증거로 코에 솜을 올려 숨이 멈췄음을 확인하고, 고인이 생전 입던 옷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 그의 이름을 세 번 불러도 혼이 돌아오지 않으면 운명했다고 봤지만 지금은 가당치 않다. 생과 사를 결정하는 주도권이 의료진에게 있다. 의사에게서 사망진단을 받아야 한다. 고인이 병원에서 돌아가셨다면 병원 원무과로 가자. 담당의가 발급한 사망진단서를 원무과 직원이 교부해줄 것이다. 경황이 없어도 이것은 기억하자. 여러 장을 발급받아야 한다. 장례식장 빈소를 잡을 때도, 화장할 때도, 심지어 가족과 친척이 회사로부터 장례 휴가를 받으려고 해도 증명 서류가 필요하다. _ 82쪽
코로나19 대유행이 지나고도 이때의 기억은 사람들에게 각인됐다. 작은 빈소, 적은 문상객, 간소한 절차는 더는 불효로 상징되거나 초라하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가능한 것으로 학습됐다. 모두 작은 장례에 익숙해졌다. 장례식장 직원들 사이에선 걱정하는 소리가 나왔다. 발 빠른 장례식장은 가족장에 맞는 작은 빈소를 새로 마련했다. 상조회사 역시 무빈소나 가족장 상품을 만들어 내놓고 있다. 그렇다 해도 빈소가 작다는 건 조문객이 적다는 것이고, 이에 대해 업계 내부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장례식장의 주 수익원이 음식 장사이기 때문이다. _89쪽
고객과 눈을 맞출 때는 활짝 웃어서는 안 된다. 무표정도 안 된다. 여기는 슬픈 곳이니 슬픈 표정은 더욱 안 된다. 장례식장과 서비스직, 그 경계에 표정과 몸짓과 눈빛을 놓아야 한다. 어렵다.
뛰면 안 되지만 느리게 걸어서도 안 된다. 구부정하게 어깨를 말고 있어도 안 되고 어깨를 편다고 뒷짐을 져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어서도 안 된다. “손을 앞으로 모으면 사람이 부를 때 굼떠져. 바로 움직이지 못해.” 그렇다면 손을 어쩌란 말인가. ‘언니들’ 손을 지켜본다. 한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닦고 옮기고 나르고 정리한다. 그러다가 저쪽에서 기웃, 찾는 기색만 보여도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라며 상체를 앞으로 민다. _100쪽
화장장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뒤편에서 도구와 시설을 점검하고 관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같이 울어주고 손을 맞잡아주는 것만큼이나 필요한 일이다. 장례 절차가 삐걱거릴수록 사별자들은 더 많은 눈물을 쏟는다. _155쪽
묘지는 인구가 밀집한 도시와 갈등을 빚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한국에서 죽은 자의 땅 묘지와 산 자의 땅 도시의 긴장 관계는 산 자의 승리로 귀결된다. 강남 개발이 한창이던 1970년 서울시는 서울의 시립묘지를 폐쇄하고, 한강 이남의 8개 공동묘지의 분묘들을 이장하기 시작한다. 묘지가 있던 자리엔 아파트가 들어섰다. 길은 고속도로가 되고, 산은 터널이 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묘가 이장되거나 무연고 묘로 분리되어 사라졌다. 이로 인해 이장이 급증해 풍수지리 전문가들도 성황을 누렸다고 한다. 하지만 영광은 잠시였다. 사람들은 풍수지리적 입지가 아닌 교통과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었다. 묘지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이제 봉안당 명당 자리를 노린다. _175쪽
“솔직히 관이 무겁지도 않아요. 그거 이고 산에 오르는 것도 아니고요.”
매장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관을 드는 거리는 입관실에서 장례식장 앞에 세워진 운구 버스까지이다. 그 짧은 거리마저 남성만이 관에 손을 댄다. 생각해보면, 정수기 물통을 남자가 드는 세상에선 관도 남자가 든다. ‘회사에서 정수기 물통을 갈 때 왜 꼭 남자가 들어야 하느냐’는 ‘역차별’ 논란이 생기는 세상에선 특정 성별이 관을 드는 일에도 불협이 생겨야 한다. _199쪽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본인 무덤 위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화강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무덤은 단단한 벽과 바닥이 되어주었고, 유골함이 자리했던 광중은 아궁이 역할을 했다. 비석이 지천에 널려 있어 자재 걱정이 없었다. 다만 죄책감과 두려움이 따라올 뿐이었다. 비석의 이름을 페인트로 덧칠해 그 흔적을 지워보았지만, 그 이후 수십 년간 아미동에는 기모노를 입은 일본 귀신과 도깨비불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죽은 이의 자리에 산 사람의 자리를 만든, 불편하고도 체념적인 공존이 귀신 이야기가 되어 돌아왔다. 대를 잇는 빈곤이야말로 사건·사고를 불러오기 좋은 조건이었는데도, 어떤 집에 우환이 닥치면 마을 사람들은 그 자리가 어느 무덤 자리였는지를 떠올렸다. 1990년대, 아미동 주민들은 남은 묘석들을 모아 5층 석탑을 세우고 천도재를 지낸다. 이후로 사고가 줄었다고 했다. 실제 줄어든 것은 마을 사람들의 불편한 마음일 거라 짐작해본다. _215쪽
임신부들은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 노인들은 요양 시설 병실에 누워 자신의 것이 아니면서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몸에 절망한다. 장례에는 ‘엔딩 플래너’가 등장하게 되었다. A 패키지, B 패키지, C 패키지를 내밀며 세트 상품을 고르듯 장례를 준비하라고 한다. 소비자가 된 사별자가 그 순간에 해야 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울음과 회한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사별자가 해야 하는 일이 상품 선택과 문상객 맞이뿐이라는 것도 쉽게 수긍되진 않는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생산품(노동)에서만 소외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애에서 소외되고 있다. 나는 내 죽음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았다. _233쪽
하지만 죽음 역시 사회적인 것이라, 애도는 사회의 규율과 질서 안에 존재한다. 누구에게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을 배분할 것인가. 국가적으로는 공적 지원 제도가 작동하는 문제다. 누구를 죽일 것인가도 통치의 기술이고, 누구를 살릴 것인가도 권력이 행하는 일이다. 이 분류는 ‘죽음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말을 뒤집고 죽음의 위계를 만든다. 사회가 애도(의 비용)를 감수하지 않는 죽음이 생겨난다. 가난한 이의 죽음, 시설에서 사는 이의 죽음, 사회가 ‘온전하다’고 보지 않는 몸을 지닌 이들의 죽음, 그리고 연고 없는 자의 죽음. 장례와 애도 절차가 생략되어도 괜찮다고 용인하는 죽음들이다.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없는 사람은 없다.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던 사람”만 있을 뿐이다. _264쪽
세상의 정답은 단순하다. 여자와 남자. 어른과 아이. 부자와 빈자. 인간과 동물. 세상이 반으로 갈려 있다. 남자는 바지를 입고, 여자는 치마를 입는다. 남자는 (제사를) 주관하고 여자는 (조문객을) 돌본다. 시험의 출제 의도는 시험장에 입성하지 못하거나 앞서 탈락한 이들에 의해 포착된다. 세상이 정답이라 인정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에게 닥쳐올 일을 미리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장례는 결혼이나 돌잔치처럼 피할 수 있는 의례도 아니다. 타인의 장례건 나의 장례건, 장례는 분명 인생에 들이닥친다. _291~292쪽
동물 장례가 ‘사람의 일’로 치러지기에 슬픈 걸까. 모르겠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지 못하는 장례란 슬픈 일임이 분명하다. 그가 어떤 동물이었는지, 아니 어떤 삶이었는지 말할 수 없는 일도 분명 슬프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어떤 삶이었는지 말하려면, 그에 앞서 삶을 살아야 한다. 비인간동물이 그들답게 살아갈 수 있을 때, 그들의 장례도 그들답지 않을까. _329쪽
애도(받을 자)의 자격을 묻는 세상에서, 변희수 하사의 죽음을 애도의 위치에 놓은 것은 타인들이 보내는 안부 인사였다고 생각한다. 변희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변희수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 “사회적으로 애도할 죽음인가?”라는 질문에 자격이 아닌 연대와 관계로 답하는 법을 나는 그의 죽음 이후에 배웠다. 그건 어쩌면, 백 년의 시간을 건너온 동지장이 아닐까 한다. _355쪽
《돌봄 선언》의 저자 더 케어 컬렉티브는 “돌봄 문제는 가족이나 친척 같은 아주 가까운 관계의 친밀함에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분야와 전문성, 인종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회 구성원 누구라도 무차별적 돌봄의 몸짓을 실천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나는 그의 ‘난잡한 돌봄’ 개념을 이별 의례에 가져오고 싶다. 누구라도 무차별적 애도의 몸짓을 실천하는 일이 필요하다.
쪽방촌 주민이 이주노동자의 장례를 찾듯, 무연고자의 빈소에서 마을 독서 모임 회원들이 나타나듯, 그 행위가 우리를 우리로 만나게 할 거라 믿는다. 나는 내 죽음마저 선택하고 결정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그건 혼자 알아서, 어느 날 언제 갈지를 정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다. 나의 죽음을 준비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살아갈수록 ‘나’라는 명칭이 1인칭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님을 알게 된다. 나는 나를 만들어온 토대와 관계 속에서 규정되고, 장례는 우리가 생전 만들어온 유대와 관계, 정치와 가치관을 드러내고 재생산하는 장이다. 그러니 나를 나로서 만들어온 것들을 살펴 이별할 준비를 하고 싶다. 그 준비를 완수하고 싶다. _374~375쪽
살아갈수록 ‘나’라는 명칭이 1인칭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님을 알게 된다. 나는 나를 만들어온 토대와 관계 속에서 규정되고, 장례는 우리가 생전 만들어온 유대와 관계, 정치와 가치관을 드러내고 재생산하는 장이다. 그러니 나를 나로서 만들어온 것들을 살펴 이별할 준비를 하고 싶다. 그 준비를 완수하고 싶다. _3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