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내 근대건축의 부재’에 관한 오랜 관심은 네덜란드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벤에서 석사 졸업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더욱 구체화되었다. … 리서치 주제를 학교에서 처음 발표하던 날, 1995년 옛 총독부 청사 철거식을 생중계하는 한국의 뉴스 영상을 공개했다. 이를 본 교수님과 학생들은 흥미로워하면서 동시에 의아해했다. 저 정도 규모의 거대한 석조 건축물을 기능상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인위적으로 철거를 했다는 사실, 그것도 과거 식민역사를 청산하려 함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세레모니 형식으로 기획된 그날의 모습은 기존의 오래된 도시 풍경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에 익숙한 보수적인 유럽인의 시각에서는 이상한 일이었다. 아마도 ‘과거 청산’이라는 철거의 명분에 더욱이 공감하기 힘들어했던 것은 그들 스스로가 피지배국이 아닌 지배국의 시선으로 그 상황을 이해하려 했기 때문일 수 있다. – ‘책을 펴내며’ 중에서
총독부 건물 철거 전후로 수년간 치열하게 공론화되었던 찬반논쟁은 일제강점기 건축물에 대한 재인식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식민 유산들을 철거해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닌 부정적인 과거사를 스스로 증언하도록 다른 차원으로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국내 건축가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2001년 문화재보호법 개정을 통해 등록문화재 제도가 생겨나도록 하는 데 기여해, 비로소 19세기 말 이후의 근대문화유산도 보존의 가치가 있다면 지정문화재로서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식민시대 대다수의 건축물들은 제도가 생긴 2000년대 이전에 제대로 기록화되지 못하고 이미 철거가 된 터라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는 여전히 이 건축물들을 부를 때, 적산(敵産: 적국의 재산)이나 일제의 잔재(殘滓: 남은 찌꺼기)라고 부른다. 부르는 이름부터 어느 정도 우리의 부정적 인식을 담고 있고, 지워져야 하는 것들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 ‘조선총독부 청사 연대기’
경성에서는 주요한 신사 건축물들이 남산 위에 세워졌다. 이는 먼저 일본인 거주 지역인 본정(本町, 충무로 일대를 일컬음)과 가깝기 때문이었고, 또한 남산이 경성 시내 어디에서든 올려다 보인다는 상징성 때문이기도 했다. 1890년대까지는 남산에 오르면 조선의 왕궁인 경복궁이 들여다보인다는 이유로 그 어느 건축물도 들어설 수 없었다. 하지만 개항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신사 종교시설들이 차례로 들어섰다. 식민 지배를 받는 35년의 기간 동안 남산에만 5개의 신사가 지어졌는데, 일본의 왕과 신들이 산 정상에서 식민지 경성을 내려다보며 항시 감시하고 지배하고 있음을 의도한 연출일지 모른다. – ‘조선 신궁과 신사들’
그런데 이와 같은 타깃 설정 후, 막상 용산폭격 작전 실행일인 7월 16일이 되었을 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작전 수행을 위해 이륙한 50여 대의 B-29기를 탄 미 공군 조종사들이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 (또는 당시 용산 내 비슷하게 생긴 건물군이 많았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파괴해야 할 네 군데의 타격 장소를 정확하게 분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폭격이 개시된 오후 2시부터 채 한 시간이 되기도 전에 폭탄이 목표지점보다 주변 민간시설에 훨씬 더 많이 떨어졌다는 점에서 이날 용산구 전체가 입은 피해가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해 볼 수 있다. 폭격 범위는 지금의 용산구 이촌동과 후암동뿐 아니라 마포구 도화동과 공덕동까지 산발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이날 파괴된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은 용산역 (1910년대 건축), 마포교도소 (1912년 건축), 벽돌공장 지대 (1920년대 건축), 선린상업고등학교 (1913년 건축), 철도국 (1908년 건축) 등이며, 모두 식민 근대역사와 연관이 깊은 건축물이었다. 더군다나 같은 날 수천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는데 1950년 한국정부가 작성한 ‘전후 3개월 내 서울 거주민의 사상자 통계’를 보면 이러한 공군의 폭격으로 인한 사망자가 1만 7,127명으로 4분의 1을 차지했다. – ‘덤프 머드, 1950년 서울 폭격’
한편 남산 터널이라는 방공호 시설만으로 충분히 안심할 수 없었던 박 대통령은 같은 기간 서울 도심 곳곳에 지하보도를 집중적으로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그 무렵 정부는 전쟁 시 ‘수도 포기’에서 ‘수도 사수’로 전략을 바꾸었다. 서울을 지키려면 전쟁이 나더라도 사람들이 서울에 남아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대규모 대피시설이 필요했다.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시설이 ‘을지로 지하보도’로, 지금도 을지로 입구에서 을지로 6가까지 동서로 연결하는 기다란 쇼핑상가의 형태로 남아 있다. 이 지하보도는 서울시청 아래에서 시작하여 동대문 밖까지 2.7킬로미터 가까이 연결해 사대문 밖으로 대피할 수 있도록 계획된 것으로 비상사태 동안 지하 벙커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최소 두 달 동안 서울시 공무원들이 이 벙커 내에 머물며 시청 업무를 지속할 수 있을 정도의 기반 시설을 갖추었던 것이다. – ‘서울 요새화 계획’
같은 해 9월, 자유센터는 곧바로 착공되었고 12월 완공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계획된 국회의사당 건립이 군사정변 직후 경제적 어려움을 이유로 중단되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계획에서 완공까지 4개월 만에 서둘러 공사가 진행된 자유센터 건립은 그와 대조적이다. 이는 박정희가 자신의 전력과 관련한 의혹을 잠재울 시급한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은 아닐까? – ‘프로파간다를 위한 거대한 무대’
고문으로 악명 높았던 6국 건물은 지난 2017년 철거되었지만, 같은 자리에 새로 조성된 남산 예장공원 안에 ‘기억6’이라는 공간을 일부 남겨 두었다. 지하 공간에 6국의 조사실 하나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는데 옛 중앙정보부의 시설 중 유일하게 기록을 위해 남겨진 장소이기에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미 사라져 버린 대부분의 중앙정보부 관련 건축물들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건물의 용도와 위치를 숨기기 위해 위장된 이름을 사용하여 서울 곳곳에 비밀리에 위치했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지면에 접근 가능한 정보 범주에 있는 건물들의 목록을 정리했다. – ‘중앙정보부의 음지들’
억압과 통치를 위해 지은 건축을 적대감이나 피해의식으로 본다면 당장 철거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저항과 인내의 역사로 접근한다면 교훈과 치유의 공간으로 되살릴 수 있다. 보존할 가치는 번듯하게 잘 지은 상류층의 건물이나 건축 양식을 잘 표현한 건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계층이 먹고 자고 일하고 투쟁하고 죽어 간 공간에도 있다. 보존은 문화의 두께이고, 문화는 다양성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경험과 기억이 축적된 도시에서 좋은 건축가와 건축주가 나오고 시민들의 삶도 풍요로워진다. 거기에 보존의 이유가 있다. 그러니 만일, 그때 그 건축이 사라졌다면 근현대건축의 변곡점을 그렸던 건축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니 이제, 우리는 사라지고 사라질 건축을 어떻게 할 것인가. – ‘만일 그때 그 건축이 사라졌다면’(김소연 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