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사람들은 신비로운 성적 매력을 은근히 드러내는 아름다운 외모나 세련된 겉모습을 신화적 여성성의 핵심이라 여겼지만, 커샛은 감상자가 그림 속 인물을 대상이나 신화가 아닌 주체로 만날 수 있도록 어떤 계층의 모델이든 에로틱한 응시를 끌지 않는 모델을 특별히 선택했다. 커샛의 그림에서는 아이든 어른이든 심리적 내면성을 전달한다. 심리적 내면성이란 ‘내면적 삶’을 드러내는 생각과 감정의 결합인데, 아마 세가르는 이런 내면을 이제는 구식으로 들리는 ‘영혼’이라는 용어로밖에 부를 수 없었을 것이다. – 서문 중에서
드로잉에 기반한 위대한 미술 전통에서 스타일은 개념적 구현과 기법적 구현을 결합해 예술 창작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경지를 뜻한다. 미술 이론에서 스타일은 남성적이고 힘찬 것으로 암묵적으로 취급된다. 세가르는 한때 드가가 소유했고, 심지어 그의 사후에 유언 집행자들의 손에서 드가의 작품으로 분류됐던 〈습작〉(1886)에서 커샛의 스타일을 알아보았다. 무엇보다 이 그림은 여성은 스타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는 드가의 도발적이고 불쾌한 발언에 커샛이 반박하기 위해 그린 것이었다. – 서문 중에서
커샛이 처음으로 ‘메리 커샛’라는 이름으로 살롱전에 등장한 때는 1874년이었다. 드가가 커샛의 〈아이다〉를 보고, “여기 나처럼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선언한 것도 바로 이 살롱전에서였던 듯하다. 어쩌면 사실이 아닌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런 사건이 있었는데도, 두 미술가가 실제로 만난 것은 1877년 봄이 되어서였다. 그해 드가는 1874년에 결성된 독립 미술가 그룹에 커샛이 참유하길 권유했다. – 3장 중에서
1875년 파리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 루이진은 커샛과 함께 오스망 대로의 뒤랑뤼엘 갤러리와 클로젤 거리의 줄리앙 탕기 영감의 물감 가게를 방문했다. 커샛은 이 젊은 친구를 설득해서 그가 자신과 여동생의 용돈까지 탈탈 털어 에드가 드가의 파스텔화 〈발레 리허설〉(1875년경)을 사들이게 했다. 루이진이 500프랑(100달러)에 산 이 그림은 미국인이 최초로 구입한 드가의 작품이었다. 해브마이어가 남긴 기록에서 이 작품에 대한 커샛의 감상평을 전해 들을 수 있다. “그림의 드로잉은 옛 화가들만큼 확실하고, 평면과 시점의 어려운 문제들을 거장처럼 다루는데, 명암 효과와 색채의 아름다움이 말 그대로 매혹적이다.” – 3장 중에서
커샛은 나중에 이렇게 썼다. “나는 아이들을 그리길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무척 자연스럽고 진실하지요. 아이들에게는 숨은 의도가 없어요.” 커샛은1878년부터 아이 한 명을 등장시킨 일련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는 화가와 어린 소녀 사이의 인상적인 만남으로 그려진 〈큼직한 빨간 모자를 쓴 소녀〉(1881)와 〈밀짚모자를 쓴 소녀〉(1886)로 이어졌다. 〈밀짚모자를 쓴 소녀〉는 단순한 슈미즈 위에 점퍼스커트를 걸친 노동계급의 아이를 보여준다. 아이는 아무렇게나 자른 머리 위에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고 있다. 정교하게 설정된 배경 대신 벨라스케스풍의 단순한 회색 배경 앞에서 애처로운 작은 얼굴이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정면을 살짝 벗어난 방향을 바라본다. … 여자아이를 탐구한 이 그림들에서 커샛은 당대 페미니스트들의 질문을 묻고 있다. 여성의 본성이란 것이 있는가? 아니면 지배적인 젠더 개념이 사회적 명령으로써 몸과 마음 모두를 가두고 제한하는가? – 4장 중에서
‘책 읽는 여자’ 주제를 다룬 기념비적인 작품 〈여인의 초상〉(일명 〈《피가로》를 읽는 화가의 어머니〉)(1878)는 어머니 캐서린 커샛이 보들레르적 현대성의 상징인 신문을 읽는 모습을 그렸다. 캐서린 커샛은 옅은 아이보리색 벽을 배경으로, 커샛의 다른 그림에서 소녀가 앉았던 것과 같은 꽃무늬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 커샛은 신문 일부가 비치는 거울을 화폭에 넣었다. 커샛의 작품이 새로 합류한 그룹에서 관심을 끌었다는 것을 1879년 마네의 그림에서 눈치챌 수 있다. 마네는 파리의 한 카페 정원에서 삽화가 들어간 신문을 읽는 근사한 젊은 여성을 그렸다. – 4장 중에서
극장은 커샛이 인상주의 그룹 전시에 데뷔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커샛의 극장 그림은 어떻게 그가 이 새로운 미술계의 열정적이고 예술적인 지식인들과 함께 자리를 잡았는지 보여준다. … 1870년대 후반 커샛은 마네가 카페와 카페콩세르를 그리고, 또 그리며 구도와 상황, 사회적 인물 유형을 실험하면서 현대성의 모든 복잡성을 단 하나의 그림으로 응축하려 애쓰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 그러나 이 그림의 두 가지 세부 요소에서 우리는 마네의 해법이 커샛과의 예술적 교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폴리베르제르 바〉의 뒤편에는 거울이 길게 펼쳐져 청중석과 청중을 비추고 있다. 그리고 그 청중 중에 근사하게 차려 입고 오페라 안경을 눈에 갖다 댄 여성이 있다. 우리는 이 여성의 모습에서 마네가 커샛의 1878년 그림 〈칸막이 관람석에서〉를 의도적으로 인용했음을 알아볼 수 있다. – 4장 중에서
메리 커샛은 ‘신회화 화가’로 알려진 만큼이나 아방가르드 판화가로도 유명하다. 1909년 뉴욕 공립도서관의 판화 큐레이터 프랭크 화이튼캠프는 커샛의 에칭과 드라이포인트 작품이 “매체의 본질에 대한 완전한 이해(그가 사용하는 모델로 인해 강조되곤 하는 탄탄한 느낌에도 여전히 섬세한)와 매체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인식, 노련한 기교, 견고함, 자유분방한 활기, 간결하고 진솔한 표현, 선의 적절한 경제적 사용”을 갖췄다고 호평했다. 그러나 1916년 또 다른 글에서 화이튼캠프는 프랑스 모더니즘을 처음 접하는 관람자에게는 그렇게 견고한 판화가 처음에는 “어려울” 수 있다고 인정했다. – 5장 중에서
따라서 어머니와 아이를 그렸다고 여겨지는 커샛의 그림들은 사실 결코 그런 그림이 아니다. 물론 그중에는 육아에 관한 그림도 있다. 그러나 그림의 관점은 어머니로서 여성의 관점이 아니다. 커샛은 어머니였던 적이 없다. 커샛의 그림은 딸의 자리에서 그려졌다. 그리고 감상자로서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동일시하는 자리도 딸의 자리이다. 그의 그림은 딸이 어머니와 맺는 관계에 대한 표현이자. 여성이 사회와 맺는 관계가 역사적으로 달라진 시대 속에서 변화하는 여성성의 형상화로 읽을 수 있다. 커샛의 그림에서 탐구되는 여성성은 그의 어머니가 그의 삶에서 했던 역할의 특성을 거스르는 한편, 그 영향 속에서 창조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 5장 중에서
커샛의 후기 작품에서 새로운 것은 호기심과 생각이 많은 딸의 이미지다. 이를테면 〈해바라기를 꽂은 여자〉(1905년경)에서 우리는 거울을 꼭 쥐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캔버스 바깥으로 돌려 우리와 눈을 맞추며, 간접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딸을 만난다. 그리고 〈바느질하는 젊은 엄마〉(1901년경)에서는 화가의 존재를 넌지시 가리키는 딸을 만난다. 어린 소녀의 응시가 상기시키는 것은 그림이 그려지던 그 순간에 마주보았던 화가와 그의 작품이다. 여성 미술가이자 지식인, 화가, 페미니스트, 딸, 동생, 친구, 큐레이터였던 커샛은 이제 우리에게는 페미니즘의 역사적 한 순간을 살았던 ‘다른 여성’이다. 그리고 그 시대의 고고학적 탐구는 현대 페미니즘에 무척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커샛의 모더니즘은 현대 예술과 현대 여성의 창조적 교차점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 5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