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명확히 해야 한다. “일자리는 왜 부족한가”라고 묻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마을에 가면 모든 사람이 일한다. 숫자로 보면, 이곳은 ‘완전고용’ 상태다.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가 없으니 길거리에 나가 밤새 만든 목공품이라도 내다 팔아야 한다. 실업이 ‘사치’인 곳에서는 모두가 일해야 하고, 그래서 숫자상으로는 일자리가 부족하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생긴다.
부족한 것은 ‘좋은’ 일자리다. 부자 나라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최저임금에 겨우 미치는 돈을 받으면서 고통과 위험을 감내해야 하는 일은 넘친다. 특히 청년층, 여성층, 노년층에게는 흔한 일상이다. 따라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왜 ‘좋은’ 일자리는 부족한가”이다.
_14쪽, 들어가며
노동시장은 어떻게 ‘시장’이 되는가? 복잡하게 말하자면 한없이 복잡한 것이 시장의 정의이므로, 아주 간단하게 ‘시장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과 거래량이 결정되는 곳’이라고 하자. 물론 시장이라고 해서 꼭 백화점과 같이 얼굴을 맞대고 거래하는 물리적 공간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컴퓨터 자판을 누르는 순간 국경을 넘어 수백만 달러의 거래가 이루어지고, 거래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주식시장도 시장이다.
일자리를 찾아 시장에 온다는 것은 이 수요· 공급의 논리에 제 몸을 맡긴다는 뜻이다. 알아두는 것이 좋으니 차근차근 설명하겠다. 노동에 대한 대가(편의상 ‘임금’)가 오르면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노동공급이 늘어난다. 이를 그래프로 나타내면, 임금 증가와 함께 노동량이 늘어나서 오른쪽 위로 올라가는 선이 그려진다. 어려운 말로, 노동공급곡선이다. 그런데 기업의 입장은 반대다. 임금이 오르면 그만큼 비용이 늘어나기에, 다른 조건에 변화가 없는 한 기업은 고용을 줄이려 한다. 이를 그래프로 나타내면, 임금이 오를수록 고용이 줄어드는 방향 즉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는 선이 그려진다. 역시 어려운 말로, 노동수요곡선이다.
_31~32쪽, 1장 〈실업: 하나의 현실, 갈라지는 생각들〉
그런데 세상에는 ‘거래’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유용한 형태의 노동이 많다. 애써 멀리에서 찾아볼 것도 없이 우리 일상을 보면 된다. 돌봄노동을 비롯한 대부분의 가사노동은 인류의 생존과 행복에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만, 어떤 형태의 명시적 보상은 없다. 희생과 의무의 영역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앞서 살핀 고용의 정의에 따르면 이러한 노동은 ‘고용’이 아니다. 그런데 꼭 그런 걸까?
생각해보자. 한동안 집에서 병든 어머니를 돌보던 여성이 있는데, 아이를 갖게 되면서 상황이 어려워졌다. 어쩔 수 없이 기존에 어머니를 돌보던 일을 간병도우미에게 월급을 주며 맡기게 되었다. 이런 경우, 어머니를 돌보는 일 자체는 동일하지만 ‘비고용’이던 것이 ‘고용’으로 바뀌게 된다. 즉 돌봄노동의 내용에는 아무 변화가 없지만, 이에 대한 사회경제적 인식과 분류가 달라진다. 이제 이 여성의 아이가 돌을 지나면서 상황이 또 달라졌다고 해보자. 출산과 육아로 집에서 돌봄노동을 수행하던 그가 취업 전선에 복귀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이번에는 가사도우미를 고용했다고 하자. 그 결과, 통계상 취업자가 두 명 늘어난다. 금전적 경제활동은 두 배 늘어났지만, 이로 인한 사회적 편익이 얼마나 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만약 그 가사도우미가 일을 하는 동안 그의 초등학생 아이를 집에 혼자 두어야 하고, 취업 전선에 복귀한 여성이 월급의 상당 부분을 가사도우미에게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라 해보자. 사회 전체적인 편익의 계산법은 복잡해진다.
_74쪽, 2장 〈일의 세계: 고용과 노동을 넘어〉
외부성의 논리는 일자리에도 적용된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일자리가 노동자 본인과 가족, 공동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금전적인 보상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설령 반영된다 하더라도, 대부분 즉각적이고 단기적인 영향에 대한 보상이고 중장기적인 영향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현재의 일자리 상실이 장기적으로 장래의 일자리와 소득에 막대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월급봉투에는 이런 사정이 고려되지 않는다. 물론 일자리의 사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차이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추정하기 쉽지 않다. 비금전적 측면을 측정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국가적 상황에 따라 그 차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실업의 사회적 비용 중 약 85~93%는 비금전적 비용이고 7~15%만이 금전적 비용이라고 한다(Winkelmann & Winkelmann, 1995).
일의 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장의 논리만으로 일자리의 규모가 결정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사회적 최적 수준에 미치지 못하게 된다. 즉 노동시장은 늘 일자리를 과소공급하게 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일자리를 줄이는 행위(예컨대 해고)는 언제나 과도한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2014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장 티롤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시장경제는 “노동자들을 너무 자주 해고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Tirole, 2017). 일의 사회적 외부성을 고려하지 않게 되면, 일자리를 만드는 데는 노력이 부족하고 느리지만 일자리를 파괴하는 데는 지나치게 신속한 상황이 생긴다는 것이다.
_94~95쪽, 3장 〈일자리의 가치: 사회적 가치와 기여적 정의〉
어려움은 다른 데서도 온다. 바로 경제정책이다. 앞서 살펴본 분배 악화의 부메랑 효과는 통상적인 경제정책에 반영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임금 인상 뉴스가 있을 때마다 경제학자와 정책 관련자들은 화들짝 놀란다. 물가가 올라갈 것이라는 걱정이다. 이는 ‘임금과 물가의 악순환적 상승’을 걱정하는 논리의 일부이기도 하다. 게다가 지금 통화정책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악순환적 상황의 교과서적 현실이라 할 수 있는 1970~198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을 기억하고 있다. 이들은 복잡하고 현란한 숫자의 세계에서 결정을 내린다고 하겠지만, 기억의 힘을 무시하기는 힘들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스무 살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스무 살에 프랑스 혁명을 경험한 나폴레옹이 한 말이다.
임금과 인플레이션 문제는 실타래처럼 얽힌 사안인 만큼 각 이해관계자의 생각이나 판단도 제각각일 것이다. 경제적이지만 정치적인 사안이기도 하다.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 이후 에너지 가격 폭등으로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을 겪은 지난 몇 년(2022~2024)은 옛적 경험이란 그저 낡은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_140~141쪽, 4장 〈일의 대가: 너무 높은 임금, 너무 낮은 임금〉
경제학의 교과서적 주장은 최저임금이 부정적 고용효과를 초래한다고 강하게 말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지난 40여 년 동안 최저임금 제도는 더 많은 나라에 더 널리 퍼져 나갔다. 말하자면, 최저임금의 ‘정치적’ 인기는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최저임금은 정치인들이 고용 감소라는 큰 비용을 감수하며 저지르는 철없는 자책골 같은 것인가? 그러니까 최저임금은 실제로 고용을 줄이는가? 상황이 역설적인 만큼, 이에 대한 답도 역설적이다. 최저임금에 대한 경제학의 이론적 ‘예언’을 두고 경제학자들이 부지런히 실증연구를 해왔는데, 결과는 대체로 “예수를 증거할 자”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즉 최저임금이 고용을 감소시킨다는 경제학적 예측을 입증할 실증적 증거는 대체적으로 부족하다.
나 또한 2010년경에 수십 년간의 실증연구를 검토한 바 있지만, 최저임금이 고용을 줄인다는 주장의 실증적 근거는 매우 약했다(ILO, 2010). 가장 기념비적인 연구는 2021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데이비드 카드와 앨런 크루거의 연구다. 이들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 있었던 최저임금 변화의 고용효과를 보다 엄격한 기법을 이용하여 측정하였는데,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최저임금 덕분에 임금은 유의미하게 올랐는데, 고용에 대해서는 어떠한 유의미한 부정적 영향도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고용이 오히려 늘어났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수요공급론의 ‘상식’을 벗어난 결과를 두고 숱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이들의 결론을 뒷받침하는 실증연구가 뒤따랐다. 그들이 연구 결과를 모아 낸 책은 그 제목만으로도 내용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신화와 측정: 새로운 최저임금 경제학(Myth and Measurement: The new economics of the minimum wage)》(Card & Krueger, 1995). 통상적 경제이론을 ‘신화’로 격하시키고, 현실에 대한 정확한 ‘측정’을 통한 ‘새로운’ 최저임금의 경제학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_158~159쪽, 5장 〈낮은 일의 대가: 최저임금은 축복인가, 실수인가〉
한국의 경험도 다르지 않다. 한때 3,000시간에 달하던 노동시간이 점차 줄어서, 2008년에는 2,228시간, 2023년에는 1,872시간으로 내려갔다. 15년 만에 약 350시간 단축되었다. 40시간 노동을 기준으로 하면 9주, 약 2개월에 달한다. 이러한 변화는 소득 증가와 함께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단선적 과정은 아니었다. 법정 노동시간이 실제 노동시간을 제대로 규제하지 못한다는 불만은 계속 존재했지만, 사회정치적 압력으로 법정 노동시간이 48시간에서 44시간(1989년) 그리고 40시간(2003년)으로 단축될 때마다 실제 노동시간도 제법 규모 있게 줄었다. 즉 노동시간 단축의 과정은 매끈하게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라기보다는 폭이 넓은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과 같다. 한 번 크게 내려선 뒤 평평하게 걷다가 다시 한번 크게 내려가는 모습이다(Lee & McCann, 2011).
진전은 있었지만, 한국의 노동시간은 상대적으로 높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해도 도드라진다(그림 6-2). 여전히 OECD 평균을 훌쩍 넘고, 지금은 미국 수준에 가깝다. 한국과 미국의 연간 노동시간이 엇비슷한 이유 중 하나는 유급휴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독특하게도 유급휴가를 보장하는 연방법이 없다. ‘괜찮은’ 직장에서는 고용계약을 통해 유급휴가가 제공되지만, 그렇지 못한 많은 일자리에는 유급휴가가 없다. 한국은 법정 유급휴가가 보장되어 있으나, 이를 실제로 찾아 쓰는 비율이 낮은 편이다. 2024년 조사에 따르면, 5인 이상 사업장에서 일하는 상용 노동자들에게 평균 16.6일의 연차휴가가 주어졌는데, 소진율은 76%에 불과했다. 법으로 보장되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이다. 법적 보장이라는 것도 결국 요구하고 찾지 않으면 보장되지 않는다. 요컨대 “구하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다”라는 마태복음의 구절만큼 노동시간의 역사를 절묘하게 요약한 말은 없다.
_188~190쪽, 6장 〈일하는 시간: 노동시간 단축의 꿈과 좌절〉
기술 변화에 따라 일자리가 분화 또는 양극화되고 있다면, 일자리의 위치(place)를 간단히 여겨서는 안 된다. 세계화의 파고가 높았을 때, 경제학자들과 정책 입안자들은 ‘일자리가 어디에서 없어지고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 하는 문제를 부수적으로 생각했다. 예컨대 미국 미시간에서 일자리가 없어지고 실리콘밸리에서 새로 생기거나, 혹은 중국으로 옮겨가더라도 이를 대체할 만한 일자리가 다른 어디에선가 만들어지면 된다고 믿었다. 세계화 과정에는 어차피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인데, 승자의 이익과 패자의 손해를 합친 결과가 전체적으로 이익이 되면 괜찮다고 봤다. 평균에 대한 이러한 과도한 믿음 때문에 세계화의 역풍이 거셌다.
일자리 문제는 보다 심각하다.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일자리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다. 즉 일자리란 사람이 가족, 친구, 공동체, 사회 등으로 형성된 물리적 공간을 기반으로 특정한 생산적 행위를 하고 이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일자리의 ‘물리성’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나 도시에서 일자리가 없어지고 멀리 떨어진 도시에 생겨도 좀체 이동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Goldstein, 2017). 특히 지역 간 사회적· 문화적 격차가 클수록 이런 경향은 더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 변화 등으로 어느 도시의 일자리가 집중적으로 타격을 받으면, 이 도시가 실업, 긴장, 폭력이 넘치는 폐허가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즉 일자리의 양극화가 곧 지역의 양극화를 초래하는 것이다. 3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자리의 사회적 가치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술적 충격으로 일자리 파괴가 일어나면 이를 완전히 복원할 수는 없겠지만, 해당 도시나 공동체에서 적극적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이 있는 곳에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요컨대 사람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가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일자리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영국의 복지국가를 설계한 베버리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이 아니라 일자리가 기다려야 한다Jobs, rather than men, should wait”(Beveridge, 1944).
_230~231쪽, 7장 〈기술 변화: 풍요와 그늘, 분화하는 일자리와 분열하는 일터〉
바로 따져볼 문제가 있다. 이주노동은 왜 늘어나는가? 경제학의 통상적인 접근 방식은 ‘수요요인인가, 공급요인인가’를 따지는 것이다. ‘또 이런 뻔한 이야기’라고 빈축을 살 수 있겠지만, 이번에는 이 차이가 중요하다. 거칠게 표현하면 이주노동자는 ‘떠밀려 온 사람인가, 아니면 불러서 온 사람인가’라는 질문인데, 이 간단한 물음이 가진 정치적 파장은 매우 크다. ‘떠밀려 온 사람’이면 국경 통제와 이민 관리의 문제가 되는 것이고, ‘불러서 온 사람’이면 수용과 환대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못사는 나라의 사람들이 자국에서 쓸 만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벌이가 훨씬 좋은 우리 나라로 몰려와서 이주노동자가 늘어났다.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정책과 정치의 책임이 크다. 전형적인 공급주도론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만성적인 인력 부족으로 기업과 가계가 모두 어렵다. 나라 바깥의 인력을 들여오지 않으면 경제와 살림이 한층 더 어려워질 것이다. 적극적으로 외국 인력을 활용해야 한다. 전형적인 수요주도론이다.
_253쪽, 8장 〈국경을 넘는 노동: 이주노동, 오해, 편견〉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 마을은 여전히 그때를 기억한다. 추억은 기억하되, 고통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도 잊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 실업자가 늘어나는 기미가 보이자, 마을은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보장하는 사업을 한시적으로 도입했다. 장기실업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8주 정도의 훈련 과정을 거친 뒤 민간 기업에 취직하거나 마을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도록 돕는 사업이다. 민간 기업에 취직하면 고용 보조금을 지급하는데, 어떤 경우든 월급은 최저임금 이상이 되도록 했다. 대부분 사회적 기업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강제성은 전혀 없다. 본인이 원하는 경우에만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원하지 않는 경우는 실업급여를 계속 받으면 된다. 일종의 일자리 보장 사업인데, 공식 명칭은 ‘마리엔탈 일자리 보장 시범사업’이다.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의지가 모두 잘 담긴 이름이다. 마을의 온갖 정책도 조율되어 이 사업을 지원한다. 일자리 만들자고 온 마을이 소매 걷고 나선 것이다.
일자리 보장 사업을 총괄하는 사무실은 옛 섬유공장의 터에 자리 잡았다. 역사와 경험이 그렇게 이어진다. 그리고 이 사업을 벌인 장본인인 마을 시장은 마리엔탈의 역사적 경험에 관해 석사 논문을 쓴 사람이다. 그의 말은 거침없다. “당신도 애덤 스미스는 알겠지. 그 양반은 언제나 시장(market)이 옳다고 했단 말이야. 일자리가 없으면 돈을 덜 받고 일하면 된다고 하겠지만, 완전히 틀린 소리야. (…) 일자리 자체가 없는데 무슨 소리인지.” 스미스로서는 이런 오해에 다소 억울할 수 있겠으나, 마을 시장의 의지는 그만큼 굳건하다. 이 마을의 야심 찬 사업은 당분간 계속될 예정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동네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아프리카 속담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어느 작은 마을 마리엔탈에서는 아이 키우듯 일자리를 키우고 있다.
_279쪽, 9장 〈일하는 삶에 투자하는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