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싫고
보여 줄 수 없을때, 저는 외로웠어요
오랜 시간 청소년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쳐 온 교사인 서현숙의 눈에 청소년들은 섬세하고 예민한, 노란 종잇장처럼 수시로 펄럭거리는, 단단하지 못한, ‘마음’을 지닌 존재들이다. 살아갈 힘이 약해져 있거나,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화가 나거나, 좋아하는 사람과 마음이 비껴가서 슬프거나, 처음 하는 일을 앞두고 두렵거나, 남들은 다 가진 것 같은 꿈이 없어서 막막하거나……. 이런 시간을 통과하고 있을 청소년들이 자기의 난처한 마음에 적절한 제목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작가는 자신의 십대를 돌아본다.
서현숙 작가는 여전히 소심하고 예민하고, 때때로 찾아오는 난처한 마음에 당황하는 어른으로 살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서 타인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이 된다고 바로 어른이 되는 게 아니듯, 단단하지 못한 마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단단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는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 준 한 사람, 마음에 깊이 박힌 어느 책 속의 한 문장, 예상치 못하게 다가오는 작은 응원들, 낯선 풍경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그 모든 것이 쌓이고 모여 마음이 여무는 순간을 보여 준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지금의 의미를 알고 싶다면
강제로 밤까지 학교에 남아서 해야 했던 야간 자율학습, 그 시간이 너무 싫어서 몰래 야자를 빠지고 서점에 가서 책을 보던 시간들이 있었다. 교사에게 말대꾸하다가 뺨을 맞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읽은 책에 대해 적어서 내면 야자 빠진 걸 인정해 주는 선생님도 있었고, 나도 모르는 나의 재능을 먼저 알아봐 준 선생님도 있었다. 복도에서 만나면 “누나, 안녕하세요?” 인사하던 남학생과 설레는 로맨스도 있었다. 학창 시절이든, 시험을 앞둔 수험생 시절이든, 그 시간 안에 있을 때는 모른다. 이 모든 일들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지금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이 나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
다행히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더라. 미래의 시간에, 지금의 내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 100쪽
책을 좋아하던 소녀는 국어 교사가 되었다. 학생들 앞에서 먼저 울음을 터트리던 어설픈 교사였고, 도서관 담당 교사면서 작가 초청을 못하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좋아하던 사람과 헤어진 뒤 버스에서 나오는 대중가요에 펑펑 울기도 했고, 낯선 고장에 가서 혼자 지내며 불면증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학생들과 함께 독서 모임을 하고, 작가를 초청해 작가와의 만남을 하고, 소년원의 아이들을 만나 국어 수업을 하기도 했다. 덕질에 빠져 일상의 모든 것이 덩달아 다 즐거워지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며, 같은 풍경과 사람이라도 특별하게 느껴지는 예민한 마음을 선물받기도 했다.
어쩌면 세상엔 특별한 게 없을지도 몰라. 무엇인가를 특별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이겠지. - 108쪽
지금의 자기를 ‘고정된 형태’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변화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이야. -99쪽
부끄러워서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 지극히 평범해서 특별할 게 없었던 것 같은 학창 시절 이야기를 솔직하게 해 나가면서 서현숙 작가는 진짜 소중한 한 가지 진실을 발견한다. 인생은 길 곳곳에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즐거움, 뜻밖의 선물을 제법 많이 숨겨 놓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오늘’을 잘 살아가는 것뿐이다.
아, 지금을 살아가는, 지금만 살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오늘을 즐겁게, 정성 들여 사는 거구나. 오늘에 정성을 들이고, 오늘 만난 사람들과 웃으면서 오늘을 걸어야겠구나.
오늘이 흰 눈처럼 차곡차곡 쌓인 뒤에야 비로소 ‘오늘’의 의미를 알 수 있어. -154쪽
지금의 난처한 마음도 언젠가 돌아보면 인생의 반짝이는 한 순간으로 남을 수 있다는 걸, 먼저 그 길을 걸어 본 사람은 알고 있다.
해마 시리즈 소개
청소년에게도 에세이 읽는 기쁨을!
온갖 사연과 인생을 책으로 만날 수 있는 에세이 범람 시대다. 하지만 청소년의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서일까. 에세이는 주로 성인 독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이건 딱 내 얘기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혹은 나와는 다른 경험을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접할 기회를 청소년 독자에게도 만들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청소년 에세이를 기획하게 된 배경이다.
울고 웃고 만나고 헤어지고 몰두하고 외면하고 좋아하고 싫어했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기억의 총합이기도 하다. 기억은 우리 각각을 독특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장치이자, 그 자체로 한 사람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우리 머릿속 ‘해마’라는 장소이다. 기억이 입고되고 저장되고 재생되는 곳. 여기에서 청소년에세이 ‘해마’ 시리즈가 탄생했다.
작가 저마다의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고 뒤엉키고 화해하고 포개지면서 각기 다른 매력과 개성을 지닌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현재의 나를 만든 강렬한 기억을 찾아가는 여정을 함께하며 청소년 독자들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에세이 읽는 기쁨을 한껏 누리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한 권의 책과 접속하는 신비를 경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