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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러복의 탄생

여학생 교복으로 읽는 일본의 근대


  • ISBN-13
    979-11-91535-18-1 (93910)
  • 출판사 / 임프린트
    에디투스 / 에디투스
  • 정가
    30,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5-02-28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오사카베 요시노리
  • 번역
    김동건 , 이정민 , 미우라 토모미
  • 메인주제어
    아시아사
  • 추가주제어
    디자인 역사 , 디자인, 산업/상업예술, 일러스트레이션 , 문화연구: 패션과 사회
  • 키워드
    #디자인 역사 #디자인, 산업/상업예술, 일러스트레이션 #아시아사 #문화연구: 패션과 사회 #문화연구
  • 도서유형
    종이책, 무선제본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40 * 210 mm, 498 Page

책소개

세일러복 혹은 세라복이라는 이름의 여학생 교복. 지금 한국에선 이 교복을 입는 학교가 손꼽을 정도지만 아이돌 그룹의 공연이나 할로윈 코스프레 덕에 낯설지 않다. 그런데 이 끈질긴 존재감을 일본 서브컬처의 영향이나 동경쯤으로 이해하면 너무 피상적이다. 물론 세일러복이 일본을 거쳐 우리에게 온 것이라는 이유로 거북함을 느낄 수도 있는데 이 또한 역사적 사실과 맥락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 오해일 수 있다. 『세일러복의 탄생: 여학생 교복으로 읽는 일본의 근대』는 이러한 막연한 이해나 오해를 시원하게 해결해 준다. 책은 제목 그대로 세일러복의 탄생(기원)을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시작한다.

 

세일러복은 어떻게 일본 여학생들의 교복이 되었을까? 그리고 그 작은 옷 한 벌에 일본 사회와 문화의 어떤 변화가 스며들어 있을까? 저자는 세일러복의 탄생 배경부터 사회적·문화적으로 확산된 과정, 그리고 일본 대중문화에서 갖는 상징적 의미까지 깊이 탐구한다. 세일러복은 단순한 교복이 아니라 일본 사회의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온 문화적 아이콘이다. 학교라는 공간을 넘어 애니메이션, 영화, 서브컬처에 이르기까지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부여받아 왔다. 그 바탕에는 세일러복이 일본의 근대화 과정과 긴밀하게 얽혀 있으며, 그에 따른 여성의 교육과 미적 욕구가 자리 한다. 이 책은 세일러복이라는 친숙한 아이템을 통해 일본 사회의 변천을 흥미롭게 조망하는 특별한 여정을 선사한다.

목차

들어가며: 세일러복 탄생 100주년―교복에 대한 여학생의 관점과 인기의 이유

 

서장/  매력적인 세일러복

제1장/ 체조복과 개량복

제2장/ 복장 교육으로서의 효과

제3장/ 세일러복의 세 도시와 세 항구

제4장/ 세일러복으로 통일하고자 했던 현

제5장/ 서양식 교복으로의 통일을 원치 않은 현과 제정이 늦어진 현

제6장/ 전국의 세일러복의 상황과 개성

제7장/ 개성이 강한 미션 계열

제8장/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 전쟁하의 세일러복

마지막 장/ 세일러복이 탄생한 의미

끝으로

 

전국 고등 여학교 서양식 교복 일람

옮긴이의 말

본문인용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세일러복의 기원은 헤이안 여학원도 후쿠오카 여학원도 아니었다. … 헤이안 여학원의 교복이 세일러복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그 교복이 세일러복의 기본적인 구조와 다르기 때문이다. 해군 수병의 세일러복은 상하의로 나뉘어 있는 형태이며 벗기 쉬워야 한다. 이 기본적인 구조가 가장 큰 이유다.[28쪽]

 

1930년에 세일러복을 교복으로 정했기 때문에 나온 당연한 결과겠지만, 세일러복의 교복 규정이 절대적이지는 않았음은 그 후에도 일본식 복장을 입었던 학생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학생들은 일본식 복장과 세일러복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었고 최종적으로 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로써 학생들에게 세일러복이 압도적으로 인기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37쪽]

 

학교에 도입된 세일러복은 원래 통학용 교복이 아니라 ‘운동복’인 체조복이었다. 그것을 일본의 교육 현장에 들여온 이가 1899년에 문부성 유학생으로 미국에 유학을 갔던 이노쿠치아쿠리였다. … 세일러복을 전국적으로 보급하려 했던 것은 이노쿠치가 귀국 후에 본 여학생의 통학 풍경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1903년 3월 15일에 이노쿠치는 제국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일본에 귀국한 후 개량복을 입은 학생은 한 명밖에 보지 못했으며, 통소매에 하카마도 심상과에는 보이지만 고등과로 올라가면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미국의 학교에서는 코르셋을 입지 않게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연설에서 세일러복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타개책으로서 그녀가 세일러복에 주목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노쿠치는 도쿄 여자 고등 사범학교에서 착용하고 있던 세일러복을 전국의 ‘학교 평상복’과 ‘운동복’으로 삼겠다고 했던 것이다.[53-54쪽]

 

남자 아동의 강건한 소질을 키우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낳는 어머니의 몸이 건강해야 한다. 때문에 여성 교육에서 체육의 필요성이 대두한 것은 1894년의 청일전쟁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운동에 적합한 복장은 이후 여학생에게 하카마를 입히는 데까지 보급되었지만 이노쿠치 아쿠리가 추천한 세일러복 형태의 체조복은 널리 퍼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이쇼 시대를 맞이하면서 세일러복 형태를 받아들이는 고녀가 등장한다. … 이 배경에는 메이지 시대까지 여자 교육에서의 체육에 놀이적인 측면이 강했던 것에 비해 다이쇼 시기에는 경기로서의 의미가 등장했기 때문이다.[68쪽]

 

세일러복이 나고야 시가지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긴조 여학교에서 최초로 세일러복을 입었던 학생들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모던했으며 주위 사람들을 주목하게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학교에서 교복이 만들어졌는데, 처음에는 보기도 입기도 익숙하지 않아서 부끄러웠습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세일러복을 입음으로써 고녀 학생이 되었습니다”라든지 “가슴을 펼 수 있게 되었습니다”같은 이야기가 나온 것은 수년이 지난 후였다. 당시의 일본에서 누구도 입지 않았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행위였다. … 다이쇼 시대부터 1935년까지 전국 각지에서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여학생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과 더불어 그러한 모습이 정착됨으로써 여학생의 서양식 교복은 당연한 존재가 되어 갔다. 그중에서도 세일러복은 기모노와 하카마를 대신하여 고녀생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75-76쪽]

 

고녀가 양장화의 필요성을 받아들인 것은 간토 대지진(1923년)이 아니라 복장 개선 운동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운동을 문부성을 중심으로 조직화된 생활 개선 동맹회가 이끌었다는 점이 컸을 것이다. … 초기 단계에서 세일러복은 주류가 아니었다. 복장 개선 운동에

관계했던 공립학교장 다수가 스탠드 칼라나 스퀘어 깃이 달린 상의, 블레이저 등을 지지했으며 사립학교 창립자들은 원피스를 고안했기 때문이다.[80쪽]

 

세일러복은 직선적 재단의 평면적 구성이기 때문에 바느질로도 비교적 간단하게 만들 수 있었다. 세일러복이 인기가 있었던 이유로 자신이 직접 봉제를 할 수 있다는, 즉 만들기 쉽다는 점도 고려되고 있다. 고도의 기술이 없어도 재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손쉽게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인기의 이유였다. … 서양식 학교 교복을 자기가 만드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한 도구는 재봉틀이었다. 재봉틀과 봉제의 전문적 지식을 가진 지도자가 있다면 여학생들은 양복점이나 백화점에 가지 않아도 서양식 교복을 만들 수 있었다. … 교복 제작은 봉제 기술의

훈련이었으며, 학생 사이의 심리적 유대도 이끌어 낼 수 있었다.[84-85, 88, 95쪽]

 

교복은 입으면 학교 바깥에서 여러 학교의 학생이 있어도 바로 어느 학교 학생인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교복을 견본과 동일하게 만들어야 한다. 넥타이나 리본의 색을 바꾸거나, 깃이나 소매의 흰색 선을 검은색으로 바꾸거나, 두 줄의 선을 세 줄로 바꾸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 세일러복이 교복이 됨에 따라 새로운 아이템이 탄생했다. 그것은 왼쪽 가슴에서 빛나는, 고녀의 증표라고 할 수 있는 휘장이다. 학교 측에서 볼 때 가슴의 휘장은 학생을 관리하는 아이템이었으며, 학생들에게는 고녀의 증표로서 자부심을 보여주었다. 학교의 교복에는 관리와 긍지라는 두 측면이 동거하고 있었다.[104-111쪽]

 

피복 협회가 남학생 교복을 통일하고자 애썼던 것은 원래 경제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가쿠란이 육군 군복과 같은 형태였기에 전쟁 등의 긴급시에 바로 군복으로 이용할 수있는 “군민 피복의 근접”을 계획한다는 의미로 서서히 중점이 변화되었다. 여학생 교복을 통일한 지역은 남학생 교복에 비해 매우 적다. 여자 중등학교에서 교복을 통일한다는 것은 “경제적 문제”에는 효과적이지만 “군민 피복의 근접”이라는 관점에서는 일치하지 않았다. 그 증거로 세일러복은 국가 총력전이 필요했던 시기에도 여성의 결전복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이 차이가 많은 부현에서 남자 교복이 통일된 것에 비해 여학생 교복이 통일되지 않았던 요인으로 생각된다.[166쪽]

 

현 내에서 교복을 통일한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쇼와 초기의 공황에 따른 경제 불황의 대책이다. 같은 규격의 소재를 사용하면 양복점마다 발생하는 가격 차이를 없앨 수 있다. 둘째는 1937년 7월에 일어난 중일 전쟁 장기화에 의한 국가 총동원 체제의 정책이다. 국방상의 관점이 중시됨으로써 옷감에 대용품으로서 스테이플 파이버가 사용되거나 흰색 옷깃 커버를 붙임으로써 세탁비를 경감할 수 있게 된다.[236쪽]

 

(태평양 전쟁 중) 피복 협회에서는 국방색 옷감을 목 여밈식 교복에 도입함으로써 군복과 교복의 유사화를 도모했다. 그런 상황에서 여학생 세일러복에 국방색 옷감을 사용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도 이상하지는 않다. 1938년 3월 20일자의 『부녀신문』에는 「여학생 교복도 국방색으로」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나 피복 협회의 잡지인 『피복』을 통독해도 전국의 여자 중등학교에서 국방색 옷감을 도입했다는 보고는 실려 있지 않았다. “여학생의 교복도 국방색으로”는 구상에 머물렀고, 고녀의 국방색 교복은 실현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366-367쪽]

 

국민정신 총동원 중앙 연맹이 설치한 복장에 관한 위원회는 1938년 11월 15일 제1회 위원회를 개최했다. … 문부성 표준복으로 세일러복이 선정되지 않았던 이유는 “우리나라 고래의 복장 문화의 특징”과 “일본화”라는 점이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옷깃이 작은 숄칼라는 옷깃이 큰 세일러복에 비해 사용하는 옷감이 적다.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세일러복은 채용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 오사카부 여학생 교복 연구 위원회 위원장으로 이즈오 고녀의 교장이었던 요나이 세쓰지로는 문부성의 표준복 발표를 보고 “상의가 세일러형이 아닌 점, 스커트에 주름이 없는 점은 오사카의 안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새로운 교복에서는 여학생다운 귀여움이 희박해지지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요나이의 걱정은 현실이 된다. 에히메 현립 사이조 고녀 학생은 “동경하던 세일러형 교복은 우리 때부터 스후[단섬유]가 들어가서 펄럭이는 국민복 을형乙型이라는 숄칼라 교복으로 바뀌어 실망했다”라고 회상한다.[371-372]

 

세일러복 차림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 긴조 여자 전문학교 부속 고등 여학부만의 일은 아니었다. 도쿄 부립 제5 고녀의 1944년 3월 졸업생은 257명 전원이 세일러복을 입고 있다. 그녀들은 1940년에 입학했기에 문부성 표준복을 새로 만들지 않고 종래의 세일러복을 졸업할 때까지 입고 있었던 것이다. 세일러복에 스커트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 평화로운 시대의 여학생이 동경하던 모습이었다. 여학생들은 스커트를 입을 수 없다면 하다못해 상의만이라도 세일러복으로 입고 싶어 했다. 그러한 마음에서 세일러복 상의에 바지 또는 몸뻬라는 절충된 모습이 나타났던 것이다.[384쪽]

 

전쟁이 격렬해지자 스커트가 금지되고 바지와 몸뻬의 착용이 강제된다. 그러나 세일러복을 입는 학생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전쟁을 체험한 학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숄칼라와 바지, 몸뻬야말로 “군국주의”의 상징이었다. 세일러복과 스커트 조합은 전쟁 전의 평화로운 시대를 느끼게 했다. 종전 후에는 세일러복에서 블레이저 교복으로 변경하는 고등학교가 늘어난다. 그 이유로 세일러복은 군복을 이미지화한 것이라든가 “군국주의”의 흔적이라는 주장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지적임은 말할 것도 없다. 세일러복은 문부성과 학교 측이 학생에게 강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생이 즐겨 입었던 것이다.[390-391쪽]

 

전쟁 후의 ‘양장 재봉 붐’은 하루아침에 생긴 현상이 아니었다.1927년부터 1945년까지 전국 고녀의 졸업생 수는 195만 7,987명이며 1945년 시점에서 1927년의 졸업생은 36세, 1945년 졸업생은 17세가 되었다. 그녀들이 ‘양장 재봉 붐’을 짊어진 사람들이 되었던 것이다. 전후에 배급 제도가 계속되었어도 양장을 자유로이 재봉할 수 있게 되자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성인 여성의 양장을 추구하는 복장 개선 운동이 다시 시동을 걸었다. 종래의 복식사 연구에서는 ‘양장 재봉 붐’의 도래를 맥아더의 민주화 정책으로부터의 영향과 미국에 대한 동경에서 찾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전쟁 이전과의 연속성을 고려하지 않는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전에 미성년 여학생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세일러복은 전후 성인 여성의 양장화를 가져오는 원인이 된 것이다.[395-396쪽]

서평

세일러복은 문화이기 이전에 역사다

세일러복 혹은 세라복은 어떤 세대에게는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지금 젊은 세대에게는 여전히 아이돌 그룹의 무대 의상으로 등장하거나 할로윈 축제의 코스프레 등으로 현존하는 대상이다. 세일러복을 우리에게 전해준 일본에서도 블레이저로 대체되면서 교복으로선 주류가  아니지만 서브컬처에서는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 등 ‘전투미소녀’의 형상으로 빈번히 출현하고 있고 그것이 지닌 묘한 상징성과 판타지에 국적을 가리지 않고 젊은 세대가 공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떻든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고 끈질긴 존재감을 지니는 까닭을 그러한 서브컬처 속에서 세일러복이 지닌 순수한 미소녀와 섹슈얼리티를 동시에 지니는 표상 이미지 때문이라 이해하면 그만이겠으나 과연 그것만일까? 서브컬처 속의 세일러복은 많은 변용을 거친 것이지만, 역사 속에서 출현하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현실의 그것과 무관한 채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 온당한 것일까? 세일러복의 표상 이미지에 공명하는 젊은 세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우리는 세일러복에 양가적 감정을 느낀다. 우리에게도 그것은 청소년기가 담긴 교복의 추억으로 잔존하지만 동시에 일본 군국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전후 일본에서조차 교복이 블레이저로 교체되어 갔다고 한다면 세일러복을 식민지 교육의 잔재 정도로 이해하는 것도 부당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또한 역사 속에 존재했던 세일러복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번에 한국어로 소개되는 『세일러복의 탄생: 여학생 교복으로 읽는 일본의 근대』는 그간의 여러 의문이나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기에 적절한 책이다. 이 책에 앞서 출간된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이나 『캐릭터의 정신분석』이 일본의 서브컬처라는 허구의 공간에 출현하고 소비되어 온 여러 표상 이미지들에 대한 사회학적·문화적 비평서라면 『세일러복의 탄생』은 역사 속에서 출현하여 현실 속의 인간들과 부대껴온 세일러복의 역사를 추적하여 실체적 진실을 해명하는 문화사, 풍속사에 해당한다. 책은 세일러복이 언제, 어떻게 일본 여학생들의 교복이 되었는지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작은 옷 한 벌에 일본 사회와 문화의 어떤 변화가 스며들어 있는지를 현미경을 들이대듯 촘촘한 그물망을 펼친다. 세일러복의 탄생 배경부터 사회적·문화적으로 확산된 과정, 그리고(무엇보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데) 당시 근대 일본인들(특히 ‘고녀’에 해당하는 여학생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탐구하는 이 책은 일반적인 복식사를 넘어선다. 세일러복이라는 바늘구멍을 통해 일본 근대의 풍경과 사회의 변천을 따라가 보는 특별한 여정이 되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통해 세일러복에 대한 그간의 빗나간 억측과 오해를 벗겨내고 근대기를 살았던 당사자들 속에 어떤 상징적 의미와 자긍심으로 받아들였는지를 제대로 복원해 냄으로써 세일러복이 단순한 교복이 아니라 일본 사회의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온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고 지금도 그러한 연유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얻게 하는 소중한 텍스트이다.

  

세일러복이 ‘고녀’의 교복이 되기까지

『세일러복의 탄생』은, 제목 그대로, 책장을 펼치면서부터 세일러복의 기원에 대한 그간 일본 관련 연구자들의 오류를 반박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우리가 보는 위키백과 등 사전 정보도 이 오류들에 근거한다). 그 오류들은 세일러복을 판단하는 기준부터가 모호한 데서 비롯되는 것들로 저자가 제시하는 정의와 논거들이 어느 정도의 치밀한 실증에 기초해 있는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정도에서 놀라면 안 된다. 도대체 세일러복이라는 여학생 교복 하나의 탄생과 변천 과정에 어느 정도의 자료 조사와 실증적인 연구가 요구되기에 이러나 싶을 만큼 책은 촘촘하고도 방대한 조사 결과들을 펼쳐놓는다. 보통 이 대목은 독자에게 본문을 압축하여 안내하지만 여기서 본문을 압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실토한다. 홋카이도에서부터 저 멀리 오키나와까지 일본 열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조사 작업이 과연 한 사람의 노력으로 가능한지조차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책의 대부분은 그 결과물로 채워진다. 이쯤 되면 저자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해진다. 일찌감치 중학교 1학년 등교날부터 교복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저자는 니혼대학 교수가 되어서부터 연구에 착수하여 앞서 집필하던 일본 정치를 주도하는 정치가와 관료들의 대례복 연구를 끝낸 후 곧바로 전국의 여자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는 끝도 없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조차 중도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과거와 다르지 않은 풍경을 보거나 다이쇼부터 쇼와 시대 전쟁 전의 졸업 사진첩을 타임 슬립 유학을 하여 그 시대 세일러복 차림의 여학생들과 이야기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이 책에 실린 일본 전역 세일러복 여고생의 사진들은 그가 그렇게 발로 뛰어 얻어낸 것들이다. 그래서 이것들을 요약하는 일을 제쳐두고 여기서는 이 책을 여행하는 한 가지 제안하기로 한다. 우리도 그러한 사진들 속으로, 그 시대의 ‘풍경’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는 것이다. 그 시대 그곳의 여학생들이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등교하는 거리에 접어들 것 같은 착각에서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로쿠메이칸 시대’라 불리는 1883년부터 1887년 사이 유럽화 정책에 쫓기던 일본에서 여성들 역시 양복 착용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처음 여성의 양복은 가격이 비싸고 착용감이 어색하고 불편하여 활동적이지 않다는 삼중고가 있었으나 세일러복은 달랐다. 원래 영국 해군의 수병복인 세일러복 자체가 입고 벗기가 편한 디자인이고 제작도 그리 복잡하지 않은 터인 데다 기원이 되는 영국에서도 군복을 넘어 아동복으로도 용도가 넓혀져 빅토리아 여왕이 황태자들에게도 입혔던 정도였다. 이 세일러복은 다른 나라들에도 전해지고 여학생들에게는 처음 (등)교복이 아닌 체육복으로 응용되었고 미션학교를 운영하는 외국인 교장이나 해외 유학을 하고 온 일본인 여성 교사들의 인식 안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세일러복이 여자 고등학생들의 교복으로 자리 잡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기모노나 개량된 하카마 차림으로 학교에 다니던 여학생들에게 세일러복이 교복으로 자리 잡는 과정은 일본에서조차 오인된 1923년의 간토대지진 등의 외부적 사변이나 천화에서 비롯된 외부적 지시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진행된 지난한 복장 개선 운동의 결과였다. 그리고 여기서 다른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여성 교육 주체들인 교사나 학생들의 사고의 변천과 수용의 태도와 감각, 그중에서도 여학생들의 지지가 갈수록 세일러복으로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세일러복 디자인으로 표상되는 서구의 모던에 대한 여학생들의 지지, 부모의 경제적 부담의 경감, 빈부의 격차를 감출 수 있고 학교 측의 복장 교육의 실시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복장 개선 운동과 교육 주체들의 합의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 중에서도 그것이 여학생들의 미적 감각에서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아 거부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재봉틀의 보급과 함께 상급생들은 기꺼이 하급생들의 세일러복을 만들며 여학생들의 유대감이 형성되고 이 세일러복 속에서 긍지와 기쁨이 없었더라면. 세일러복에 흰 선을 몇 개 넣고 주름을 몇 개나 접어야 하는지, 어떤 타이와 배지를 더하는가에서 스스로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형성해 갔던 그 시대 근대로 들어서는 여학생들의 표정을 읽지 못한다면.


 

세라복, 오해를 벗다

그렇다면 이 세일러복은 1937년의 중일전쟁의 발발과 장기화, 그리고 아시아·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국가 총력전의 상황 속에서 어떤 운명을 겪어야 했을까? 그것을 사실에 의거해 파악하는 것은 그간 우리에게도 오랜 오해와 의구심으로 남아 있는 세일러복에 대한 군국주의의 그림자를 벗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한마디로 세일러복은 총력전 체제의 소산이 아니라 군국주의 정부의 지시나 문부성 표준복의 제시와 반대편에 있으며 이를테면 탄압의 대상이었다. 다만 물자 부족 상황에서 군국주의 측은 표준복만을 강요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기존에 갖고 있던 세일러복의 착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여학생들은 그 틈새 속에서 조악한 표준복이 아니라 낡은 세일러복으로라도 그 시간들을 버티고자 했다. 간단히 세일러복이라 하지만 지역마다의 특색이 생겨나고 각각의 개성적인 스타일과 특색을 만들어냈던 열정의 시간들이 전시체제하에서도 쉽게 무화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옮긴이가 밝히고 있듯이 최근 일본 대학 졸업식에서 양복 대신 하카마를 입고 등장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띤다고 한다. 옷이란 이런 것이다. 『세일러복의 탄생』은 당연히 세일러복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세일러복에 대한 통속적인 이미지를 뒤집고 쇼와 초기의 일본 여학생 사회의 근대적 지향이 어떠했는가를 규명하지만, 그에 선행하여 여학생 교복으로 사용되던 하카마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어 서양식 제목 도입 이전의 교복에 대한 이해도 깊게 해준다. 이 조밀하고 빼어난 풍속사 텍스트가 오늘날 젊은 세대가 공명하는 세일러복에 대한 관심의 이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저자소개

저자 : 오사카베 요시노리
1977년 도쿄 출생. 주오대학 대학원 박사(문학). 주오대학 문학부 일본사학 전공 겸임강사를 거쳐 현재 니혼대학 상학부 교수로 근무 중이며, 전공 분야는 일본 근대사이다. 2018년도 NHK의 대하드라마 〈세고돈西郷どん〉에서 군장, 양장 고증을 담당했다. 2020년도의 NHK 연속소설 드라마 〈에르エール〉에서는 풍속 고증을 담당했다. 〈다케다 데츠야의 쇼와는 빛나고 있었다武田鉄矢の昭和は輝 いていた〉(BS 도쿄) 등 다수의 TV 출연 경력을 가지고 있다. 『양복, 산발, 탈도洋服 ・ 散髪 ・ 脱刀』(講談社選書メチエ, 2010), 『메이지 국가의 복제와 화족 明治国家の服制と華族』(吉川弘文館, 2012)으로 일본풍속사학회의 에마江馬 상 수상, 『교토에 남은 공가들京都に残った公家たち』(吉川弘文館歴史文化ライブラリー 2014),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吉川弘文館, 2016), 『제국 일본의 대례복帝国日本の大礼服』(法政大学出版局, 2016), 『공가들의 막말 유신公家たちの幕末維新』(中公新書, 2018), 『고세키 유지古関裕而』(中公新書, 2019) 등 다수의 저작을 내었다.
번역 : 김동건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오이타현 국제교류원(JET프로그램)에서 근무했다. 도쿄대학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는 성균관대학교 일본학 연계 전공 강사로 재직 중이다.
번역 : 이정민
동아시아 정신분석 수용사 연구자로, 성균관대학교에서 비교문화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만 타이베이 소재 중국문화대학 한국어문학과 조교수로 근무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한국의 초기 정신분석학 수용에서 일본의 영향: 김성희와 고사와 헤이사쿠의 이론적 유사점을 바탕으로」와 「한국의 프로이트 이론 수용 양상 연구」가 있으며, 역서로 『라캉, 환자와의 대화』,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 『캐릭터의 정신분석』, 『라캉과 철학자들』(에디투스) 등이 있다.
번역 : 미우라 토모미
사이타마 출생. 성균관대학교 철학과에서 수학하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비교문화협동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의 근대 초기 번역 문학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 연구로는 「1960년대 한국과 일본 혼혈 양공주의 국가 정체성 형성과 냉전 체제―박에니와 고제키 케이코의 수기를 중심으로」(2024)가 있다.
라틴어〈édĭtus〉는 “출판된, 드높은, 높이 솟은, 탁월한”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책에도 영혼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편집자적 사유와 거기에 발 딛고 선 정신일 거라는 생각이 이 오래된 단어를 출판사 이름으로 정하게 했습니다.
에디투스의 시작과 끝에는 하나의 윤리적 질문―어떤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이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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