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세일러복의 기원은 헤이안 여학원도 후쿠오카 여학원도 아니었다. … 헤이안 여학원의 교복이 세일러복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그 교복이 세일러복의 기본적인 구조와 다르기 때문이다. 해군 수병의 세일러복은 상하의로 나뉘어 있는 형태이며 벗기 쉬워야 한다. 이 기본적인 구조가 가장 큰 이유다.[28쪽]
1930년에 세일러복을 교복으로 정했기 때문에 나온 당연한 결과겠지만, 세일러복의 교복 규정이 절대적이지는 않았음은 그 후에도 일본식 복장을 입었던 학생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학생들은 일본식 복장과 세일러복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었고 최종적으로 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로써 학생들에게 세일러복이 압도적으로 인기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37쪽]
학교에 도입된 세일러복은 원래 통학용 교복이 아니라 ‘운동복’인 체조복이었다. 그것을 일본의 교육 현장에 들여온 이가 1899년에 문부성 유학생으로 미국에 유학을 갔던 이노쿠치아쿠리였다. … 세일러복을 전국적으로 보급하려 했던 것은 이노쿠치가 귀국 후에 본 여학생의 통학 풍경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1903년 3월 15일에 이노쿠치는 제국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일본에 귀국한 후 개량복을 입은 학생은 한 명밖에 보지 못했으며, 통소매에 하카마도 심상과에는 보이지만 고등과로 올라가면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미국의 학교에서는 코르셋을 입지 않게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연설에서 세일러복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타개책으로서 그녀가 세일러복에 주목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노쿠치는 도쿄 여자 고등 사범학교에서 착용하고 있던 세일러복을 전국의 ‘학교 평상복’과 ‘운동복’으로 삼겠다고 했던 것이다.[53-54쪽]
남자 아동의 강건한 소질을 키우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낳는 어머니의 몸이 건강해야 한다. 때문에 여성 교육에서 체육의 필요성이 대두한 것은 1894년의 청일전쟁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운동에 적합한 복장은 이후 여학생에게 하카마를 입히는 데까지 보급되었지만 이노쿠치 아쿠리가 추천한 세일러복 형태의 체조복은 널리 퍼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이쇼 시대를 맞이하면서 세일러복 형태를 받아들이는 고녀가 등장한다. … 이 배경에는 메이지 시대까지 여자 교육에서의 체육에 놀이적인 측면이 강했던 것에 비해 다이쇼 시기에는 경기로서의 의미가 등장했기 때문이다.[68쪽]
세일러복이 나고야 시가지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긴조 여학교에서 최초로 세일러복을 입었던 학생들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모던했으며 주위 사람들을 주목하게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학교에서 교복이 만들어졌는데, 처음에는 보기도 입기도 익숙하지 않아서 부끄러웠습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세일러복을 입음으로써 고녀 학생이 되었습니다”라든지 “가슴을 펼 수 있게 되었습니다”같은 이야기가 나온 것은 수년이 지난 후였다. 당시의 일본에서 누구도 입지 않았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행위였다. … 다이쇼 시대부터 1935년까지 전국 각지에서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여학생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과 더불어 그러한 모습이 정착됨으로써 여학생의 서양식 교복은 당연한 존재가 되어 갔다. 그중에서도 세일러복은 기모노와 하카마를 대신하여 고녀생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75-76쪽]
고녀가 양장화의 필요성을 받아들인 것은 간토 대지진(1923년)이 아니라 복장 개선 운동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운동을 문부성을 중심으로 조직화된 생활 개선 동맹회가 이끌었다는 점이 컸을 것이다. … 초기 단계에서 세일러복은 주류가 아니었다. 복장 개선 운동에
관계했던 공립학교장 다수가 스탠드 칼라나 스퀘어 깃이 달린 상의, 블레이저 등을 지지했으며 사립학교 창립자들은 원피스를 고안했기 때문이다.[80쪽]
세일러복은 직선적 재단의 평면적 구성이기 때문에 바느질로도 비교적 간단하게 만들 수 있었다. 세일러복이 인기가 있었던 이유로 자신이 직접 봉제를 할 수 있다는, 즉 만들기 쉽다는 점도 고려되고 있다. 고도의 기술이 없어도 재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손쉽게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인기의 이유였다. … 서양식 학교 교복을 자기가 만드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한 도구는 재봉틀이었다. 재봉틀과 봉제의 전문적 지식을 가진 지도자가 있다면 여학생들은 양복점이나 백화점에 가지 않아도 서양식 교복을 만들 수 있었다. … 교복 제작은 봉제 기술의
훈련이었으며, 학생 사이의 심리적 유대도 이끌어 낼 수 있었다.[84-85, 88, 95쪽]
교복은 입으면 학교 바깥에서 여러 학교의 학생이 있어도 바로 어느 학교 학생인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교복을 견본과 동일하게 만들어야 한다. 넥타이나 리본의 색을 바꾸거나, 깃이나 소매의 흰색 선을 검은색으로 바꾸거나, 두 줄의 선을 세 줄로 바꾸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 세일러복이 교복이 됨에 따라 새로운 아이템이 탄생했다. 그것은 왼쪽 가슴에서 빛나는, 고녀의 증표라고 할 수 있는 휘장이다. 학교 측에서 볼 때 가슴의 휘장은 학생을 관리하는 아이템이었으며, 학생들에게는 고녀의 증표로서 자부심을 보여주었다. 학교의 교복에는 관리와 긍지라는 두 측면이 동거하고 있었다.[104-111쪽]
피복 협회가 남학생 교복을 통일하고자 애썼던 것은 원래 경제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가쿠란이 육군 군복과 같은 형태였기에 전쟁 등의 긴급시에 바로 군복으로 이용할 수있는 “군민 피복의 근접”을 계획한다는 의미로 서서히 중점이 변화되었다. 여학생 교복을 통일한 지역은 남학생 교복에 비해 매우 적다. 여자 중등학교에서 교복을 통일한다는 것은 “경제적 문제”에는 효과적이지만 “군민 피복의 근접”이라는 관점에서는 일치하지 않았다. 그 증거로 세일러복은 국가 총력전이 필요했던 시기에도 여성의 결전복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이 차이가 많은 부현에서 남자 교복이 통일된 것에 비해 여학생 교복이 통일되지 않았던 요인으로 생각된다.[166쪽]
현 내에서 교복을 통일한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쇼와 초기의 공황에 따른 경제 불황의 대책이다. 같은 규격의 소재를 사용하면 양복점마다 발생하는 가격 차이를 없앨 수 있다. 둘째는 1937년 7월에 일어난 중일 전쟁 장기화에 의한 국가 총동원 체제의 정책이다. 국방상의 관점이 중시됨으로써 옷감에 대용품으로서 스테이플 파이버가 사용되거나 흰색 옷깃 커버를 붙임으로써 세탁비를 경감할 수 있게 된다.[236쪽]
(태평양 전쟁 중) 피복 협회에서는 국방색 옷감을 목 여밈식 교복에 도입함으로써 군복과 교복의 유사화를 도모했다. 그런 상황에서 여학생 세일러복에 국방색 옷감을 사용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도 이상하지는 않다. 1938년 3월 20일자의 『부녀신문』에는 「여학생 교복도 국방색으로」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나 피복 협회의 잡지인 『피복』을 통독해도 전국의 여자 중등학교에서 국방색 옷감을 도입했다는 보고는 실려 있지 않았다. “여학생의 교복도 국방색으로”는 구상에 머물렀고, 고녀의 국방색 교복은 실현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366-367쪽]
국민정신 총동원 중앙 연맹이 설치한 복장에 관한 위원회는 1938년 11월 15일 제1회 위원회를 개최했다. … 문부성 표준복으로 세일러복이 선정되지 않았던 이유는 “우리나라 고래의 복장 문화의 특징”과 “일본화”라는 점이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옷깃이 작은 숄칼라는 옷깃이 큰 세일러복에 비해 사용하는 옷감이 적다.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세일러복은 채용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 오사카부 여학생 교복 연구 위원회 위원장으로 이즈오 고녀의 교장이었던 요나이 세쓰지로는 문부성의 표준복 발표를 보고 “상의가 세일러형이 아닌 점, 스커트에 주름이 없는 점은 오사카의 안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새로운 교복에서는 여학생다운 귀여움이 희박해지지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요나이의 걱정은 현실이 된다. 에히메 현립 사이조 고녀 학생은 “동경하던 세일러형 교복은 우리 때부터 스후[단섬유]가 들어가서 펄럭이는 국민복 을형乙型이라는 숄칼라 교복으로 바뀌어 실망했다”라고 회상한다.[371-372]
세일러복 차림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 긴조 여자 전문학교 부속 고등 여학부만의 일은 아니었다. 도쿄 부립 제5 고녀의 1944년 3월 졸업생은 257명 전원이 세일러복을 입고 있다. 그녀들은 1940년에 입학했기에 문부성 표준복을 새로 만들지 않고 종래의 세일러복을 졸업할 때까지 입고 있었던 것이다. 세일러복에 스커트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 평화로운 시대의 여학생이 동경하던 모습이었다. 여학생들은 스커트를 입을 수 없다면 하다못해 상의만이라도 세일러복으로 입고 싶어 했다. 그러한 마음에서 세일러복 상의에 바지 또는 몸뻬라는 절충된 모습이 나타났던 것이다.[384쪽]
전쟁이 격렬해지자 스커트가 금지되고 바지와 몸뻬의 착용이 강제된다. 그러나 세일러복을 입는 학생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전쟁을 체험한 학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숄칼라와 바지, 몸뻬야말로 “군국주의”의 상징이었다. 세일러복과 스커트 조합은 전쟁 전의 평화로운 시대를 느끼게 했다. 종전 후에는 세일러복에서 블레이저 교복으로 변경하는 고등학교가 늘어난다. 그 이유로 세일러복은 군복을 이미지화한 것이라든가 “군국주의”의 흔적이라는 주장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지적임은 말할 것도 없다. 세일러복은 문부성과 학교 측이 학생에게 강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생이 즐겨 입었던 것이다.[390-391쪽]
전쟁 후의 ‘양장 재봉 붐’은 하루아침에 생긴 현상이 아니었다.1927년부터 1945년까지 전국 고녀의 졸업생 수는 195만 7,987명이며 1945년 시점에서 1927년의 졸업생은 36세, 1945년 졸업생은 17세가 되었다. 그녀들이 ‘양장 재봉 붐’을 짊어진 사람들이 되었던 것이다. 전후에 배급 제도가 계속되었어도 양장을 자유로이 재봉할 수 있게 되자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성인 여성의 양장을 추구하는 복장 개선 운동이 다시 시동을 걸었다. 종래의 복식사 연구에서는 ‘양장 재봉 붐’의 도래를 맥아더의 민주화 정책으로부터의 영향과 미국에 대한 동경에서 찾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전쟁 이전과의 연속성을 고려하지 않는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전에 미성년 여학생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세일러복은 전후 성인 여성의 양장화를 가져오는 원인이 된 것이다.[395-3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