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지구에서 방주를 찾아 떠나는
라스트 사피엔스, 에리카의 길고 긴 여정
에리카는 냉동 캡슐에서 눈을 뜬다. 지금이 몇 년도인지, 이곳은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지구가 분명하지만, 에리카가 살았던 지구와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의 지구. 에리카는 자신이 누군지 모를 여자와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한다. 그리고 사진 뒷면에 적힌 메시지. ‘26세기, 밝은 미래에서 다시 만나.’ 에리카는 지금이 26세기인지, 그렇다면 여자는 어디 있는 것인지 혼란을 느끼다가 시간을 표시하고 있는 듯한 장치를 발견한다. 에리카가 깨어난 지금은 바로 27543년. 사진 속 여자와 약속한 시간에서 약 25000년이 지났다.
에리카의 희망은 설득력이 없었다. 그는 창틀 너머로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목이 찢어질 듯한 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상스러운 욕설에 거친 숨이 섞이며 의미 없는 단어들이 허공으로 튀어나갔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누구의 대답도 바라지 않았다. 에리카 자신을 향한 절규였다. (40쪽)
에리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생존자를 찾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지난 일을 예상하는 것뿐이었다. 더 이상 살기 힘든 지구를 위해 인간들은 냉동 수면을 택했다. 26세기에 열린 방주에서 냉동 수면을 하던 인간들이 깨어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로 방주는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약 250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제야 에리카가 잠들어 있는 냉동 캡슐이 열렸다.
에리카는 끊임없는 고독감과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간다. 또다른 캡슐 안에 웅크리고 죽어 있는 사람을 발견하기도 하고, 주변의 현대적인 건축물과 ‘구원’이라고 써 있는 글자를 통해 이미 방주가 열렸던 것이 아닐지 유추하기도 한다. 에리카는 이 모든 사실을 확인하는 역할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다르지만 같고, 같지만 다른
21세기와 276세기의 지구
에리카가 멸망한 지구의 숲속에서 살아가는데 익숙해졌을 무렵, 에리카는 켄티펀트를 마주한다. 조랑말을 닮은 몸에 코끼리를 닮은 얼굴을 한 켄티퍼트들의 귀에는 모두 귀걸이가 걸려있다. 에리카는 귀걸이의 의미가 무엇인지 의문을 품으며, 유일하게 귀걸이가 걸려있지 않은 어린 켄티펀트에게 ‘켄티’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유대감을 형성한다.
켄티와 함께 방주를 향해 가던 중, 에리카는 인간인 듯 인간이 아닌 듯한 ‘배드 피플’ 한 쌍의 서식지를 발견한다. 배드 피플의 서식지에 목줄에 묶인 채 웅크리고 있는 켄티펀트들을 보고, 에리카는 켄티펀트들의 귀걸이가 가축을 관리하기 위한 표식임을 깨닫는다. 유일하게 귀걸이가 걸려있지 않은 켄티는 배드 피플의 손에서 벗어난 켄티펀트들에게서 태어난 아이였다.
에리카는 그 순간 깨달았다. 배드 피플은 놀이를 하고 있었다. 다리를 절뚝거리다가 몸 여기저기에 아문 흉터가 있는 켄티펀트들을 보니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도 분명했다. (147쪽)
에리카는 배드 피플의 위에서 그들을 군림하는 인간을 발견한다. 그 인간은 에리카와 같은 존재, 현대인이었다. 배드 피플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위협적인 인간에게서 에리카와 켄티는 도망쳐 나오지만, 그 과정에서 켄티는 희생된다. 에리카는 켄티와 함께 가려던 방주를 향해 홀로 나아간다.
『라스트 사피엔스』는 21세기와는 너무나도 다른 276세기의 지구를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모든 것이 다르다고 할 수는 없다. 인류가 멸망했어도, 유일하게 남은 인간은 배드 피플과 켄티펀트들의 위에 서서 군림한다. 배드 피플은 켄티펀트들을 사육하며 괴롭힌다. 21세기와 276세기 사이에는 수많은 시간이 흘렀겠지만, 인간이 존재하는 지구는 다르지만 같고, 같지만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 시대의 마지막 사피엔스, 에리카
방주에 도착한 에리카는 지금껏 알 수 없었던 현실을 마주한다. 냉동 캡슐에 잠들어 있던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깨어나 살아가다가 다시 멸망했다. 기원 후 10000년, 인류의 두 번째 멸망이었다. ‘깨우는 자’로 선발되었던 스무 명의 사람들 중 살아있는 자는 단 한 명, 에리카뿐이었다. 에리카는 모든 희망과 목적을 상실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무엇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은 무엇인지 에리카는 알 수 없었다.
우주가 다시 한번 말했다.
“살아라.”
에리카는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들었다.
“살아라.” (204쪽)
『라스트 사피엔스』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독자들에게 의문점을 남긴다. 멸망한 지구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 에리카의 존재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27543년의 지구에서 에리카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계속해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래의 지구에서 살아남은 라스트 사피엔스, 에리카의 여정을 끝까지 지켜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