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자를 추앙하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한 개별자의 신체적 특(수)성은 인간 발달의 사회적 근원이라는 보편성과 연관을 끊고, 그 특수성을 개인의 속성으로 인식하게 강요한다. 그렇게 ‘특수’라는 이름으로 신체적 차이를 가진 장애라 명명된 학생에 대한 분리는 당연한 것이 되고, 능력주의 사회에서 능력 없는 존재로서 받는 차별과 배제의 최전선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 이 책은 특수성을 개별 학생 안에 가두는 것을 넘어 인간 보편성의 측면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특수’를 ‘특수하게’ 보편성과 떨어뜨려 개인에게 가두기보다, 인간과 교육에 대한 보편적 시선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고자 하는 불완전한 시도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도는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의 특수교육 주도의 통합교육 담론이 갖는 안정성이 통합교육 현실을 불의에 빠뜨렸음을 경고한다. 그렇게 특정 신체적만을 정상적이라고 가정하는 상식과 당위를 거부하고, 통합교육에 대한 이론과 실천의 공간이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해체될 수 있어야 한다는 급진적 제안을 이 책을 통해 시작하고자 한다.
- 윤상원, 〈책을 펴내며〉, 본문 10~11쪽
장애학은 기성 사회의 질서를 깨고 장애인의 위치를 다시 정립하려 하고, 학교는 사회에 필요한 인력을 키우고 국가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 장애학이 기성 사회의 부조리를 찌르는 창이라면 학교는 (부조리를 포함한) 사회 전체를 지키는 방패인 셈이다. 이처럼 장애학과 학교는 근본부터 다르다. 보수적인 국가 기관인 학교 입장에서 지향점이 다른 장애학이 적극적으로 통합교육 문제에 개입한다면 참으로 난감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어려움은 통합 학생 때문은 아니다. 그중 일부는 준비되지 않은 채 시작된 탓에 겪는 시행착오이고 다른 일부는 이미 학교가 안고 있었던 많은 문제들이 통합교육 상황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 구윤숙, 〈통합교육, 장애학이 학교에 건넨 “판도라의 상자”〉, 본문 17~18쪽
능력주의 사회에서 이방인의 존재는 불편함을 초래하며, 이는 차별과 배제, 심지어 혐오와 폭력으로 이어진다. 마치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을 특수학교(급)에 격리함으로써, 그 바깥의 학생들을 ‘정상적인 학습자’로 규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면 특수반 가야겠네!”라는 말 속에도 이러한 배제의 논리가 숨어 있다. 결국, 특수교육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격리의 장치로 작동할 때,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은 일반 교육의 범주에서 밀려나고, 사회는 그들을 향한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한다.
- 윤상원, 〈모든 개인의 특수성은 보편적이다〉, 본문 69~70쪽
특수교육이 특수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장애 아동을 위한답시고 특수교육이 모든 아동을 위한 일반 교육에 대한 하위의 종속 변인(분리 교육)으로 존재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이원 구조 체제를 탈피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애초에 특수교육은 공교육 체제에서 비장애 아동과 함께 공부할 수 없는 장애 아동을 따로 분리하는 기숙제 특수학교로 성립되었다. 농학교와 맹학교의 경우 감각장애의 특수성에 비추어 분리된 특수학교 체제가 애초에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지적장애 아동의 경우 처음부터 비장애 아동의 공교육 수행에 심각한 저해가 되는 아이들을 따로 가려내기 위한 방편으로 성립되었다. 이를 위해 지능 측정 도구가 개발되고, 마침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측정 만능’ 시대를 초래하였다.
- 김병하, 〈특수교육의 정체성〉, 본문 91쪽
불구가 접근할 수 있는 교육을 만드는 일은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교육을 만드는 일이다. 건강중심주의와 비장애중심주의, 그로 인한 물리적·제도적·문화적·경제적·지적 자원에의 접근 제약이 미치는 효과가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는 것처럼, 교육을 불구화하는 것의 효과도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만 미치지 않는 까닭이다. 사회와 학교에서 인정받는 능력 및 업적을 얻기 위해 각개약진하는 능력주의적 ‘자기계발 주체’, 그 경쟁적 삶이 자신의 몸/마음에 맞지 않아 소진되고 무능함을 체감하고 자책하는 ‘우울증적 주체’들은 모두 특정한 몸/마음을 특권화하는 사회와 교육의 희생자들이라는 점에서 불구적이다. 따라서 교육을 불구화한다는 것은 장시간 고강도로 일하고 공부할 수 있는 생산적인 몸/마음, 나와 후손들이 갖기에 바람직한 몸/마음, 고로 미래에 재생산하고 싶은, 재생산해야 하는 몸/마음을 가진 이를 떠올릴 때, 여기서 누락되는 이들이 모두 접근할 수 있는 교육을 상상하고 마련한다는 의미이다.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다른 시간 동안 활동하고 다른 장비를 이용하고 다른 부피와 장소를 차지하는 이, 다른 발달 과업과 건강, 수명이 기대되는 이, 그리하여 규범적인 정체성, 노동, 관계, 정서, 태도에서 빈번히 미끄러지는 이, 그럼에도 자본주의가 정해 놓은 생산성, 독립성, 효율성 위주의 시공간에서 벗어나 고유한 방식으로 인식하고 상호의존하는 이들을 위한 교육 말이다.
- 이명훈, 〈‘불구’의 관점으로 교육을 재상상하기〉, 본문 128~129쪽
선생님이 해야 할 일은 학교에서 공부를 지원해 주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발달장애인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을 외면하거나 학생을 다른 곳으로 분리하면 안 됩니다. 그 학생의 행동이 어떤 뜻인지 선생님이 같은 반 친구들에게 설명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쉽게 비난하고 무서워하는 문제 행동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말하는 방법’으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비장애인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발달장애인도 사회에서 비장애인과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부터 분리를 한다면 발달장애인이 하는 행동은 이상하고 발달장애인은 우리와 다른 사람이어서 따로 있어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특수학급도 결국 장애인을 지역 사회에서 살지 못하게 하는 거주 시설이랑 다를 것이 없는 분리된 공간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장애인을 학교에서 배제하거나 분리하지 않는 통합교육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고 지내는 것이 어렵고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같이 풀어 나가야 할지 모른다고 느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 박경인, 〈우리를 교실에서 배제하지 마세요〉, 본문 140쪽
현장에서 교수적 수정 등 보편적 학습 설계를 열심히 하고 있는 선생님들의 소식을 듣는다. 모든 학생이 참여하는 수업,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 수업을 위해 노력하는 교사분들에게 참으로 감사드린다. 하지만 모든 교사에게 이런 사례를 들며 장애 학생을 위한 보편적 학습 설계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학부모가 이야기하는 것이란 쉽지 않다. 지금 학교 현장은 교실에 대한 모든 책임을 한 교사 개인에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한 교사 개인의 노력을 넘어 학교 문화가 통합교육에 협조적이어야 하고 교사와 지원 인력이 더 배치되어야 한다.
- 조경미, 〈통합교육의 기쁨과 슬픔〉, 본문 159~160쪽
다만 여전히 조심스럽고 소심하겠지만, 한 걸음은 더 나아가고 싶다. 그것은 두려움 없는 협력이다. 아이의 학교생활이 조금 더 참여로 채워질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이 무엇인지 혼자 고민하지는 않겠다. ‘왜 이런 것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 대신 작은 것 하나라도 어떻게 하면 가능할지 교사와 아이와 보호자가 머리를 맞대고 싶다.
친구들만큼 잘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과제를 찾아 애쓰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를 보며, 한 번에 이 복잡한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작은 성공의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 가고 싶다.
(……)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실패는 자극이 되고 성공은 거름이 되어 마침내 학교를 떠나는 날에는, 사회가 규정해 왔던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아상을 내 아이가 흐릿하게라도 그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 나는 특수교육대상자 보호자로 12년 학교를 함께 다니는 동안, 조금은 더 나은 민주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며, 역시 학교는 학생뿐만 아니라 그 보호자에게도 소중한 교육 활동이 일어나는 곳임을 증언하러 다닐 수도 있겠다.
- 정예현, 〈특수교육대상자 보호자의 반성문〉, 본문 182~183쪽
특수교육은 곧 통합교육이어야 한다는 내 마음속 지향과 다르게 어쩌다 보니 특수학교에서만 30년 넘게 근무하고 있다. (……) 과거에는 중도중복장애 학생들에 대한 교육 여건이 너무 열악해서 나라도 더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는데 요즘의 특수교육을 생각하면 그러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특수학교로 가라고!’ 하는 목소리들이 혹시 나 때문은 아닌지 괜히 돌아보게 된다. 특수학교 교사라고 소개를 하자마자 학교의 시설이나 수업 방법들을 물어보는 일반 교사들을 종종 만났다. 그러고는 ‘내가 잘 몰라서 (특수교육대상 학생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혹시 학교에 빈자리가 있냐’는 질문이 이어진다. 지금 교실에서 만나는 학생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전해 주고 싶어서 대화를 이어 가지만 대화가 길어질수록 그 선생님의 표정은 어쩐지 ‘역시 그 학생은 내가 가르쳐야 하는 학생이 아니었던 거야’ 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해지곤 했다.
- 공진하, 〈특수학교에서 일하는 특수 교사의 딜레마〉, 190~191쪽
초등학교 특수학급은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이 가진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이곳은 특수교육과 일반 교육이라는 두 세계가 만나는 경계이자, 완전한 분리와 완전한 통합 사이의 어정쩡한 중간 지대다. 법과 제도는 이 공간을 통합교육의 핵심 거점으로 규정하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분리와 배제가 일상화된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특수학급이라는 공간이 가진 이중성은 여러 층위에서 발견된다. 먼저 물리적 차원에서 특수학급은 일반 교실과 구분된 별도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특별한’ 교육이 필요한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명목으로 설치되지만, 많은 경우 실상은 장애 학생들을 일반 학생들과 분리하는 경계선으로 작용한다. 통합학급에서 ‘문제 행동’을 보이는 학생들이 이곳으로 ‘격리’되는 현실은 이 공간이 가진 분리의 기능을 잘 보여 준다.
- 김헌용, 〈경계의 공간에서 일어난 세 가지 비극〉, 본문 217쪽
“통합교육이 가능한, 통합이 준비된 장애 학생만 일반 학교에 오면 좋겠어요.”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그리고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을 위한 통합교육의 효과에 대해서도 듣는다. 하지만 통합교육은 준비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효과가 있어서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애 학생의 통합교육은 해야 하니까 하는 거다. 우리는 모두 준비해서 삶을 살지 않는다. 준비되었다고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면서 삶에 필요한 여러 준비를 한다. 장애 학생도, 장애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 류경원, 〈래디컬한 특수교육이 모두를 위한 통합교육의 성공을 이끈다〉, 본문 261~262쪽
통합교육은 어렵다. 특수 교사 자격증이 있고 통합교육 경험이 많은 나에게도 그렇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다. 초등 교사로 살아가는 한 우연히 그리고 반드시 통합 교실에 들어서야 한다. 그러니 좋은 통합 교실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지금까지 가졌던 통념이 부서지는 독특한 기쁨이 찾아온다. 현장에 있는 교사들이라면 통합교육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런 역설적인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런 순간은 특수 학생이 만들어 주기도 하고 교실의 다른 아이들이 만들어 주기도 한다. 기쁨은 의무나 책임감보다 힘이 세다. 꼭 기쁨의 순간들을 기억해야 한다.
통합교육은 고상하지 않다. 침을 닦아 주고 감정이 폭주하는 아이를 달래고 그런 친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학급 아이들을 설득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학부모를 상대하는 시간이 지난할 수도 있다. 책에 나오는 학습장애 영재 아동을 만나는 일도 거의 없을 것이다. 특수 학생을 순식간에 변화시키는 놀랄 만한 기술이나 마법 같은 시간도 물론 없다. 교사는 특수 학생을 구원하는 영웅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찾아보면 크고 작은 방법들을 찾아낸 교사들이 분명 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분이 교사이고 내가 느꼈던 좌절과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그런 동료들의 성과들을 찾아보고 통합교육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되길 기도한다.
- 구윤숙, 〈통합교육, 어설프게 찬란하고 서툴게 아름다운〉, 285~286쪽
아이의 통합교육을 1년간 지켜본 후, 나는 통합교육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던 아이들이 변화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동안 분리 교육이 장애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을 조장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또한 내 아이가 교육 현장에 ‘존재’함으로써 시작된 수많은 ‘고민’을 보며 학교에 보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재하지 않았다면 교사도, 학생들도, 학교도, 교육청도 나아가 이 사회도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준비가 되지 않은 환경에 내 아이를 밀어 넣는 두려움과 아픔을 상쇄할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내 아이의 존재로 인해 장애가 있는 사람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지를 일상 속에서 고민하는 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학교는 함께 사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수현, 〈통합교육, 함께 사는 사회의 축소판〉, 본문 294쪽
과거에는 특수교육대상 학생들은 성적에 상관없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므로 고등학교 진학에 어려움이 있는 비장애 학생들을 위해 평가에서, 이른바 “바닥을 깔아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수행 평가에서 특수교육대상 학생이 배우지 않은 것을 평가받아야 하는 것에 누구도 의구심을 가지지 못하게 만들었고, 으레 그래 왔던 것처럼 특수교육대상 학생들은 수행 평가지에 이름만 쓰고 최하점이나 최하점의 차하점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많은 교사들이 이러한 방식에 대해 문제의식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수업 시간에 가르치지 않은 학생을 평가해도 되는가? 자신이 가르치지 않은 것을 평가하는 것이 맞는가? 교사들이 생각해도 그것은 공정하지 않은 방식이었고,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민원이나 공정성 시비에 대해 자신들이 방어할 수 없다는 부담감 또한 특수교육대상 학생의 수행 평가에서 평가 조정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마음이야 어찌 되었든 특수교육대상 학생이 수행 평가에서만이라도 자신이 배운 것을,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대로 평가받을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이러한 평가가 많은 교과에서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 김민진, 〈모두 참여 수업과 평가〉, 본문 314~315쪽
통합교육은 그동안 학교를 통해 어떤 사회를 재생산하려고 했는지 질문하게 한다. 동시에 우리가 왜 어떻게 서로를 돌보는지,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도 한다. 통합교육은 단순히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한 공간에 있게 하는 것을 넘어 교육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경쟁을 통해 능력의 차이를 구별하고 입시 중심의 성취 교육을 지향한다면 통합교육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통합교육을 고민하다 보면 교육에서 무엇을 실패하고 있는지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다.
- 최경미, 〈급진적 교육으로서 통합교육 제안서〉, 본문 3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