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여자, 야구 선수. 이것들은 마치 비빔밥 재료와도 같아서 따로 있을 땐 평범해 보여도 버무려지면 뭔가 특별해진다. 희수는 평범한 것보다는 특별해 보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졸업이 다가오는 지금, 고등학교에 가서도 야구를 하려면 어떻게든 튀어야 하니까. 오늘 밤, 희수는 특별하게 보일 기회를 얻었다. 희수가 속한 야구부가 TV에 나오기 때문이다.
_본문 7쪽
대윤은 야구가 좋았다. 좋아서 6년이나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 재능도 없고, 한계도 보이고, 그래서일까 미련도 없다. 끝을 준비하기엔 이른 나이지만, 야구에 한해서는 정말 끝이었다. 어쩌다 야구 같은 걸 했지? 따지고 보면 모두 그놈 때문이야.
_본문 23쪽
희수는 주머니 안 야구공을 만지작거렸다. 야구공을 다른 말로는 ‘하드볼’이라고 부른다. 하드볼을 손가락으로 채는 느낌은 소프트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더 작고 더 빠르고 더 다채롭고 더 날카롭다. 108개의 실밥을 손가락으로 돌리거나 짓이기며 만들어 내는 마법. 대기를 가르는 공에 타자의 방망이가 헛돌 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통쾌하고 짜릿하다. 황홀할 정도로.
그래, 역시 난 야구를 해야 해. 야구공을 포수의 미트가 아닌 사타구니로 던지는 한이 있어도.
_본문 38쪽
“늬들 둘이 일루 와 봐.”
“네?”
갑자기 손 감독이 희수와 대윤을 불러 세웠다.
“둘이 얼굴이 와 그려? 싸웠냐?”
“아뇨. 누가 싸웠다고 그래요?”
“안 싸웠어요.”
“싸웠으면 얼렁 화해허고. 이제부터 둘에게 아주 중대한 임무를 줄 거닝께.”
“뭔데요?”
“둘을 우리 학교 ‘보배’로 임명한다.”
“보배요?”
“보배는 보조 배터리란 뜻이여. 늬들 핸드폰 쓰냐 안 쓰냐.”
“쓰지요.”
“그 핸드폰 빠떼리 나가면 뭐가 필요하냐? 충전이잖어. 그 충전을 하기 전까지 팀이 버틸 힘을 주는 게 바로 보조 빠떼리의 임무다 이 말이여.”
_본문 66쪽
“고작 한 경기 가지고 뭘 그래. 아직 대회 안 끝났어.”
“난 이제 열심히 안 할래. 내가 열심히 할수록 나도 다치고 친구도 다쳐. 열심히 할수록 공 던지는 게 무서워져. 아직 130도 못 던지면서 어깨가 아파. 공이 마음먹은 데로 가지도 않고. 구속도 느리고 제구도 안 되는 투수를 어느 학교가 원할까? 벌 받은 거야. 내 마음이 괴롭다고 친구까지 버렸으니 그럴 만도 해.”
“그딴 소리 할 거면 차라리 글러브를 핥아라. 찌질하게 굴지 말고.”
“몰랐어? 나 원래 찌질해.”
“뭐가 원래 그래!”
이번엔 희수가 놀란 눈으로 대윤을 쳐다보았다. 의욕이라곤 전혀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대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아주 멋진 야구 선수라고 생각해.”
_본문 84쪽
대윤은 더그아웃에서 나와 그라운드로 한 발을 디뎠다. 붉은 흙, 하얀 선. 초록 들판.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관중의 파도.
“중왕중학교 선수 교체. 타석에 7번 타자 포수 김대윤.”
와아아아.
대윤은 비록 지금의 함성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닐지라도 모두가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고 여겼다. 아니 자신과 희수를, 더 나아가 모든 주전이 아닌 친구들을. 이번 대회가 마지막이 될 모든 친구들을. 재능도 행운도, 어쩌면 피나는 노력도 없지만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걸 끝까지 해내려 했던 그들의 의지 하나하나를.
_본문 126~127쪽
희수는 야구를 하는 내내 확실한 뭔가를 가지고 싶었다. 시속 130킬로미터의 속구나 날카로운 각도의 변화구. 너클볼을 던지려다 회전이 조금 걸리거나, 속구를 던지려다 힘없이 떨어지는 공이 아닌, 온전히 미트까지 도달할 수 있는 무언가. 하지만 희수는 지금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미트에 도달하지 못해도, 프로에 가지 못해도, 결국 야구를 할 수 없게 되더라도 그걸 좋아했던 마음은 아직 간직하고 있으니까.
잘 받아라. 모든 게 섞인 내 마지막 공을.
_본문 1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