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존재하는 미생물들의 주요 기능은 유기물을 분해하는 것이다. 화성이나 달에는 미생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음식물을 쓰레기통에 넣더라도 영원히 그대로 남을 수 있다. 지구 상에서 유기물들이 썩으면서 냄새를 만드는 것도 어쩌면 축복인지 모른다. 지구 생태계에서 유기물이 분해되고 이산화탄소가 만들어지면 식물이 광합성을 하여 당을 만들어낸다. 이것을 동물이 먹으면 다시 미생물이 동물의 장 속에서 분해한다. 동물이 똥을 누면 다시 한번 미생물이 분해하여 다시 이산화탄소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미생물들을 쏙 빼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지구의 많은 생명을 미생물이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17~18쪽
내가 박사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때 집중했던 실험 중 하나는 곤충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식물이 뿌리에서 특별한 물질을 분비하여 곤충을 막을 수 있는 유용 미생물을 끌어들인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식물이 끌어들인 유용 미생물은 직접 곤충을 죽이거나 식물의 면역을 증가시켜 곤충의 공격을 막아낸다. -75쪽
병이 아니라 환경 스트레스에 의해서도, 다음 세대에 환경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을 증가시키는 미생물이 토양 속에 존재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도 보고되었다. 토양은 작년에 식물이 어떤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78쪽
식물은 광합성으로 만든 포도당의 30퍼센트를 뿌리를 통해서 토양으로 누출한다.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 식물은 고생해서 만든 음식을 그냥 토양에 뿌려주는 자선가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왜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을까? 그 영양분의 대부분의 수요자는 뿌리에서 1밀리미터 내에 존재하는 미생물들이다. 그래서 이 1밀리미터 내에 식물과 함께 잘 적응한 미생물이 모여 살게 된 것이다. -80쪽
식물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만든 페놀 물질들이 토양 속으로 흘러나오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미생물들만 살아남고 식물과 계속해서 상호작용해왔을 것이다. 식물이 이들을 선택해서 자기 근처에 자라게 하는 이유는 식물 입장에서도 유리한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호작용은 한쪽만 이익을 보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서로에게 이익을 준다. 그래서 공생이 두 생명체가 살아남는 데 큰 이득으로 작용할 수 있다. -83쪽
토양 속 미생물에 의해서 식물이 기억의 편린을 유지하는 것은 다시 봐도 신기한 일이다. 마치 문자를 가지지 못한 식물이 자손들을 위해서 토양에 새겨놓아 역사를 기록한 오벨리스크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우리가 땅 위를 걸을 때 수만 년 동안의 기억이 발아래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땅에 닿는 느낌이 새로워지지 않을까? -84쪽
자연은 하나의 미생물이 우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몸에서 한 미생물이 우점하는 현상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그 미생물 때문에 더 이상 살기 힘들 것이다. 대부분의 병원균들이 이런 길을 간다. 인간의 면역은 하나의 미생물이 급격히 증가하지 못하게 막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생명체는 다양성 속에서 적당한 밀도를 이루며 서로 협력하며 살고 있다. 지구 전체로 보면 유일한 예외가 인간이다. -92쪽
식물은 늘 냄새를 풍긴다. 우리가 조금만 민감하게 식물에 다가가 코를 가까이 한다면 식물 고유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다양한 냄새를 풍기는 토마토는 그중 대표 선수다. -98쪽
식물이 곤충의 공격을 받으면 냄새를 풍겨 이웃 식물에게 경고하고 미리 대비하게 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때 만들어진 냄새를 ‘곤충에 의해 유도된 식물 냄새herbivore-induced plant volatile, HIPV’라고 한다. 우리 연구의 의의는 미생물에 의해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사례를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미생물에 의해 유도된 식물 냄새Micorbe-induced plant volatile, MIPV’라는 말을 만들어 우리 실험실에서 최초로 사용하였다. 이제 비슷한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은 이 단어를 사용할 것이다. -101쪽
동물이 아닌 식물은 소리를 어떻게 인지할까? 식물은 고막 비슷한 기관이나 더듬이 비슷한 구조도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식물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움직이는 동물들이야 소리에 반응하는 것을 움직임으로 알 수 있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 소리를 인식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106~107쪽
토마토가 익는 속도를 소리로 늦출 수 있다면 소비자들은 환경친화적인 방법으로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점은 또 있는데, 추가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저 헤르츠가 일정한 ‘찡~’ 하는 기계음을 들려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스피커만 있으면 끝이다. -110~111쪽
우리는 고요한 상자 안 애기장대에게 하루에 세 시간씩 10일 동안 10킬로헤르츠와 90데시벨의 소리를 계속 틀어준 후 풋마름병원 세균을 뿌리에 물 주듯이 부어주었다. 보통 10일이 지나면 식물이 시드는 증상이 나타나고, 20일이 지나면 모두 말라 죽는다. 그런데 소리를 들려준 애기장대의 경우 병이 들었어도 증상이 확실히 적었고 병징이 거의 없는 건강한 애기장대도 있었다. -115~116쪽
그러면 왜 식물은 소리를 듣게 되었을까? 자연계에서는 완두콩 뿌리가 지하수 흐르는 소리를 인식해서 뿌리가 그쪽으로 자라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옥수수 뿌리도 100~300헤르츠에 반응하여 그쪽으로 움직이며 자라는 것이 관찰되었다. -116쪽
실험 결과 식물은 20~2,000킬로헤르츠의 소리를 냈다. 식물이 자라는 데는 물이 중요한데, 물이 없을 때 특별한 소리를 냈다. 물을 주지 않은 날이 길어질수록 소리가 더 크고 강해졌다. 가뭄 외에 가위로 잎을 자르거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도록 했을 때도 특별한 소리를 냈다. -118쪽
파이토플라스마에 감염된 식물에는 특이한 병징이 나타난다. 보통 병징은 식물이 죽거나 시들거나 색이 누렇게 바뀌는 것이지만 파이토플라스마 감염의 결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잎이 더 무성하게 자라는 것이다. 그것도 일반적인 잎의 모양이 아닌 뾰족한 형태(마치 소나무잎과 같은)의 잎들이 과다하게 만들어진다. -135~136쪽
우리의 생각(자유의지)이라고 착각하는 많은 부분을 혹시 알지 못하는 다른 존재가 조종하고 있지는 않을까? 인간이라는 단일종이 아닌 미생물도 우리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이들의 역할에 우리의 행동과 생각도 할애해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미생물이 인간보다 훨씬 먼저 존재했고, 자신들의 경험을 다세포 생명체인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대화를 시도했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137쪽
일부 우울증의 원인 중에는 장내 세균인 클로스트리듐이 내는 독소가 포함된다. 그래서 이들 세균을 항생제로 제거하면 우울증이 호전되는 것이다. 결국 정신질환의 원인 중 하나는 장내 미생물의 불균형이라는 이야기다. -139쪽
인간의 항생제 발견과 슈퍼박테리아의 출현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세균도 생물이기에 살아남기 위해 돌연변이를 통해서 자기 DNA를 변형시켜 (뼈는 없지만) 뼈를 깎는 노력을 한다. 그래서 현재는 인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균이 완전히 승리한다면 인간은 항생제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189쪽
꿀벌부채명나방 애벌레의 탈출이라는 우연치 않은 현상을 자세히 관찰한 덕분에 플라스틱을 분해할 수 있는 효소를 찾고 이를 적용할 기술까지 개발한 경험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와는 별개가 아니라 내가 찾고 있는 바로 그것일 수도 있다는 파랑새 증후군을 극복하려 한 것도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했다. 과학에서는 이렇듯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필연적으로 얽혀 있다. -209쪽
우리의 발견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꿀벌부채명나방에서 반코마이신으로 죽는 세균을 분리하여 추가 실험을 했다. 그람양성 세균이 없어졌을 때 변태가 빨라진다면, 반대로 그람양성 세균인 장내구균을 억지로 더 많이 넣어주면 변태 속도를 늦출 수 있을까? 그래서 장내에서 분리한 그람양성 세균을 장내에 넣어주니 변태 시기가 2~4일 정도 늦어졌다. 흥미롭게도, 꿀벌부채명나방의 장내에서 발견되지 않은 바실러스(낫토균으로 알려져 있다)를 장내에 넣어도 변태를 비슷하게 늦출 수 있었다. -234쪽
마스크 속에서 여드름을 유발하는 세균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하나씩 점검하기로 했다. 피부에 염증을 일으키는 포도상구균과 같은 세균들이 어디에 사는지를 찾아보았다. 이들은 피부 깊숙한 모낭 속에 있으면서 갑자기 증식하고 독소를 만들어서 피부 세포를 공격한다. 이후 피부 세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염증을 일으켜 세균을 죽이려고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피부에 염증 반응이 일어나는데, 이를 여드름이라고 부른다. 미생물학자로서 내가 처음 한 질문은 ‘이런 세균들은 왜 피부 깊이 숨어 있는가?’였다. -245~2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