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으로 들끓는 청년 루터의 내면을 해부하는 정신분석 혁명가 에릭 에릭슨의 기념비적 저작
1505년 천둥 벼락이 내리치던 어느 날, 공포에 휩싸여 극심한 불안에 떨던 스물한 살의 학생 루터는 그 자리에서 수도사가 되겠다고 하늘에 맹세했다. 그리고 불과 10여 년 만에 기독교 세계를 뿌리째 뒤흔든 거대한 반역자, 자기 시대의 가장 뛰어난 웅변가, 무서운 카리스마를 지닌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청년 루터》는 20세기 위대한 정신분석가 에릭 에릭슨이 청년 마르틴 루터가 겪은 격렬한 내면적 갈등을 예리하게 분석한 ‘심리 전기’다. 에릭슨은 이 책에서 심리학과 역사학을 결합한 독창적인 방법론을 구축해, 성경 강해와 《탁상담화》 같은 루터가 남긴 방대한 문헌을 조사하고 루터에 관한 가톨릭·개신교·정신의학·사회학 분야의 해석들을 가로질러,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대전환을 불러온 예외적 정신을 조명한다. 아버지에 대한 순종적이고도 반역적인 오이디푸스적 관계에서 시작해 과잉 순응으로 치달은 자기 처벌적인 수도원 생활, 내면의 악마와 싸우는 극렬한 불안 발작, 교황청이라는 대타자와 벌인 목숨을 건 대결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루터의 정신이 분출하는 결정적 장면들을 포착하여, 근대의 문을 연 역사적 인물의 심리적 초상을 순도 높은 통찰의 언어로 그려낸다.
악령에 시달리던 영혼은 어떻게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정신이 되었나?
에릭슨은 인간이 중대한 인생의 전환기에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하는 ‘정체성 위기’를 겪는다는 심리적 사실을 발견해 이론으로 정립했다. 이 책은 이 정체성 위기 이론을 메스로 삼아 청년기 루터의 삶을 해부한다. 내면의 격렬한 충동을 억누르며 부모의 뜻을 따르던 루터는 아버지의 소망을 거슬러 수도사가 된 뒤로 청년기 내내 극심한 죄의식과 혹독한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에릭슨은 루터가 폭발시킨 종교적 창조성의 밑바닥에서 이러한 신경증적 고통을 포착해 분석하고, 가톨릭에 맞선 루터의 신학적 투쟁을 비범한 청년이 그때까지 지녀 온 정체성을 벗고 새로운 자아로 재탄생하는 정신의 싸움으로 해석한다. 또 루터의 투쟁에서 동시대 르네상스인들의 인간중심주의를 발견하고, 프로이트와 다윈이 보여준 사상적 독창성의 선례를 찾아낸다. 더 나아가 루터의 불안과 분열 속에서 20세기 정치적 재앙을 불러온 아돌프 히틀러의 심리적 원형을 끄집어낸다. 이 책은 중세와 근대가 엇갈리는 이념의 격변기를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정체성의 의미와 종교성의 본질을 탐구함으로써, 인간 루터에 대한 이해 지평을 넓힘과 동시에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의 해석 지평을 넓힌 기념비적 저작이다.
혁명가이자 반혁명가였던 ‘문제적 인간’ 루터
“루터는 기독교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환자다.” ― 키르케고르
“우리는 루터와 종교개혁에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 괴테
중세 로마 가톨릭의 권위에 맞서 16세기 종교개혁을 이끈 ‘종교개혁의 아버지’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유럽 정신사의 지형을 뒤흔들어 근대 문명의 시작을 알린 위대한 혁명가이자 사상가다. 동시에 루터는 농민과 유대인을 향한 잔혹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앞장선 반혁명가이며, 종교적 권위에 저항하면서도 세속적 권위에 복종하는 모순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루터를 둘러싼 평가는 첨예하게 엇갈려 왔다. “자유로운 근대 세계의 개척자”(헤겔), “로마의 폭정을 무너뜨린 헤라클레스”(울리히 츠빙글리), “자본주의 정신을 낳은 혁신가”(막스 베버)로 추앙받는가 하면, “악마의 제자”(토머스 모어), “르네상스를 망친 자”(니체), “나치의 반유대주의의 원조”(카를 야스퍼스)라는 날선 비난을 받기도 했다. 혁명가이자 반혁명가, 종교의 개혁자이자 권위의 수호자였던 ‘문제적 인간’ 루터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에릭 에릭슨은 《청년 루터》에서 자신의 정체성 발달 이론을 역사적 인물에 접목하는 대담한 시도를 펼쳐 보이며 역사심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에릭슨은 루터를 과거에 박제된 화석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근대의 심연을 비추는 거울이자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정신의 창으로 바라본다. 에릭슨은 루터의 삶을 통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 정신이 어떻게 시대적 갈등을 드러내는지, 그리고 그 갈등이 어떻게 역사적 전환을 이끄는지 날카롭게 통찰한다. 개인의 정체성 위기와 시대적 모순이 교차하는 지점에 주목한 이 책은 오늘날 우리가 겪는 혼란을 되돌아보게 하는 깊이 있는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심리학의 고전
에릭 에릭슨의 《청년 루터》는 1958년 출간 직후부터 학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섰다. 정신의학자 로버트 콜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와 도널드 캡스는 이 책을 “역사와 정신분석적 통찰을 가장 성공적으로 접목한 작품”, “깊은 만족감을 주는 심오한 연구”, “심리학적 종교 연구 분야의 고전”으로 높이 평가했으나, 주류 신학계와 역사학계에서는 “루터를 정신분석가의 상담 의자에 눕혔다”고 반발하며 에릭슨의 독창적인 시도를 격렬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가장 신랄한 비판자들조차 “어떻게 이토록 문제 많은 책이 이렇게 훌륭할 수 있는가?”(조지 린드벡), “결함이 있으나 선구적인 작품”(피터 게이)이라는 찬사를 보낼 만큼 에릭슨의 통찰력을 인정했다. 한 인물의 내면과 시대정신을 심리학적으로 통합한 에릭슨의 분석 작업은 이후 역사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로 자리 잡았으며, 피터 게이(역사학자), 앤서니 스토(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정신분석가)을 비롯한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현대의 전기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