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자 : 박지원
1737년에 나서 1805년까지 살았다. 노론 명문가인 반남 박씨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문장이 뛰어나 이름이 높았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를 보지 않았다. 홍국영의 세도 정치를 피해 황해도 금천의 연암골로 들어가 살며, ‘연암’이란 호를 가지게 되었다. 쉰 살 넘어 정조의 부름을 받고 선공감역, 안의현감 들을 지냈다.
홍대용과 깊이 사귀었고,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정철조 들의 스승이자 벗이었다. 사물을 이롭게 써서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주장해 이들을 ‘이용후생 학파’라고 한다. 또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무시할 게 아니라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라면 오랑캐한테라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해 ‘북학파’라고도 불린다.
문학, 철학, 사회 사상, 행정, 과학, 음악에 두루 학식이 깊어 뛰어난 글을 많이 썼다.
마흔넷이던 1780년 청나라 건륭 황제의 칠순 축하 사절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왔다. 넉 달에 걸쳐 청나라의 문물을 꼼꼼하게 살피고 돌아와 3년 동안 《열하일기》를 썼다. 《열하일기》는 청나라의 문물과 함께, 철학과 사상, 과학과 음악, 실용과 논리를 풍부하고 활달한 문체로 담은 작품으로 당대 사람들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농업과 토지 문제를 개혁하려는 뜻을 담은 《과농소초》와, 여러 가지 문학론과 사회 개혁사상들을 담은 《연암집》이 남아 있다.
번역 : 홍기문
1903년에 나서 1992년까지 살았다. 벽초 홍명희의 아들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신간회 운동에 참여했다. 국어학 연구가 깊어 《정음발달사》, 《조선문법연구》를 냈으며, ‘조선학의 본질과 현상’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7년에 북으로 가 국어학 연구를 계속하면서 조선왕조실록 번역사업을 총괄했다.
저자 : 박종오
고등학교 국어 교사다. 2015 교육과정의 《국어》와 《언어와 매체》, 2022 교육과정의 《화법과 언어》 교과서를 만들었다.
우리말에 대한 사랑, 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이 수업의 시작이자 끝이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아이들과 함께 우리말과 우리글에 담긴 지혜와 감성을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