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표를 잃어버린 시대,
혼돈 속에서 희망을 묻는
김기석 목사의 깊은 성찰 『최소한의 품격』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 회복해야 할 것들에 대한 이야기
『최소한의 품격』은 지난 2021년부터 2025년 1월까지 《경향신문》, 《국민일보》, 《월간에세이》에 실린 칼럼 63꼭지를 주제별로 재구성해 역은 칼럼집이다. 이 책의 저자인 김기석 목사는 현대 사회가 직면한 다층적 위기를 깊이 성찰하며, 그 안에서 인간다움과 희망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경제적 불안, 기후 위기, 사회적 갈등이 겹겹이 쌓이며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위협하는 오늘날, 그로 인해 사회적 경계선은 더욱 공고해지고 사회적 약자들은 소외와 배제를 극단으로 겪게 된다. 김기석 목사는 이러한 배제와 적대감이 만연한 사회에서,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더 많은 벽이 아니라 ‘환대의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더불어 역사 속에서 희망을 만들었던 순간들을 돌아보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용기를 북돋운다. 또한 정치와 종교가 어떻게 인간의 삶과 공동체를 형성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특히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를 경계하며, 다양한 가치와 차이를 포용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신앙의 본질임을 강조한다. 경제적, 환경적, 사회적 위기와 인간의 욕망과 무책임 그리고 언어의 타락과 갈등, 인간의 유한성 및 인간적 가치의 쇠퇴를 철학적, 사회적, 실천적 관점에서 유기적으로 풀어낸 김기석 목사의 글에서는 종교인이지만 인문학자에 가까운 깊이 있는 통찰이 번뜩인다. 시와 문학을 비롯한 동서고전과 다양한 인문학적 지식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수많은 책을 탐독한 흔적이 글 곳곳에 고스란히 드러나 읽는 이로 하여금 지적충만감을 더해준다. 더불어 추상적인 이상세계가 아닌 질펀한 삶의 현실에 단단하게 발을 딛고서 응시하는 김기석 목사의 날카로운 통찰은 시대의 어른이자 학자로서 본보기가 되며, 그의 글을 읽는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인간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그의 설득력 있는 말들을 통해 우리가 가져야 할 윤리적 책임과 연대의 중요성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맹목적인 증오와 혐오,
타자화와 분열의 언어가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
삶의 지표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질문들
■ 유한한 존재의 무한한 착각
– 생존, 경쟁, 그리고 우리가 잊은 책임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다가오고, 역사상 위기가 없었던 적은 없지만 지금의 상황은 한층 급박하게 느껴진다. 글로벌 경기 둔화와 공급망 불안으로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고금리 시대가 도래하면서 서민들의 삶의 토대가 속절없이 흔들린다. 게다가 세월호 참사, 후쿠시마 원전 폭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지진과 쓰나미, 여객기 추락 등 인간이 무력 앞에서 처참히 스러지는 참상을 우리는 너무 많이 목도하며 살아간다. 국내에서는 거대 양당의 대립, 의무를 망각한 지도자의 상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외침이 뒤엉켜 사회 곳곳이 몸살을 앓는다. 정치는 혼란스러운데, 기후 위기는 더 이상 징후가 아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20세기 말부터 불편한 진실로 떠오른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를 집어삼키는 태풍이 되었다. 온실효과로 축적된 에너지가 특정 지역에 재해를 일으키고, 홍수, 가뭄, 혹한, 혹서, 허리케인, 폭풍, 산불 등 그 규모는 해마다 커져만 간다.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징조는 오래전부터 나타났지만, 사람들은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신의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이런 무관심 뒤에는 인류가 수많은 위기를 극복해왔다는 낙관론이 자리 잡고 있지만, 그 낙관론에 기댄 무관심이 지구를 빠르게 망가뜨리고 있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외침이 도처에서 터져 나오지만, 정치인들은 실익 계산에 여념이 없고, 일반인들은 일상을 뒤흔들 소식에 귀를 닫는다. 자연재해의 규모는 날로 커지고, 기후 재앙이 삶의 토대를 흔들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욕망에 충실할 뿐이다.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알지만, 자신이 해결의 주체라는 책임감은 느끼지 않는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이 땅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양가적 감정에 시달린다. 한정된 공간에 뿌리내리고 싶으면서도 삶의 지평을 끝없이 넓히려는 열망이 우리를 몰아간다. 이 균형을 찾는 것이 삶의 핵심이지만, 도시에 사는 이들은 장소로부터의 소외를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안온한 삶의 공간을 갈망하지만, 현실은 우리를 밀어내고 집과 땅은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부유함에 집착하는 이들은 욕망의 불길에 사로잡혀 결핍만을 보며, 이를 채우려 타인을 경쟁자로 여기고 함께 살아갈 공간을 훼손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조지 스타이너는 우리가 “훼손된 행성의 손님”임을 무겁게 의식해야 한다고 했다. 손님은 떠날 때 머물던 자리를 더 아름답게 남겨야 하지만, 우리는 미래 세대의 몫까지 가불해 쓰며 욕망의 벌판을 질주한다. 누군가의 설 자리를 빼앗는 것은 그들을 절망의 벼랑으로 내모는 두려운 일이다.
■ ‘기다리라’는 말의 폭력성
– 유예된 정의, 침묵을 강요당한 이들
어느 시대나 사회 변화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악한 이들의 몰이해보다 선량한 이들의 천박한 인식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아침마다 시위를 벌였을 때, 공당의 대표는 이를 서울 시민을 볼모로 한 반문명적 행위라 규정했다. 장애인들은 우리 사회에서 비존재로 취급받아왔지만,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많은 이가 불편함을 드러냈다. 세월호 때도, 전장연 시위 때도, 어지러운 지금의 정국에서도 힘 있는 이들은 기다리라 반복한다. 누릴 것을 다 누리는 이들은 현상 질서를 교란하는 이들을 불온한 존재로 낙인찍고, 때가 되면 저절로 이루어질 일을 서두른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루터는 정의 실현을 지연하는 것이 정의를 방해하는 것이라 단언한다. 루터는 “‘기다려라!’라는 말은 대부분 ‘안 돼!’라는 의미”이며, “흑인의 지위 향상을 가로막는 중대한 장애물은 ‘백인시민평의회’나 ‘KKK단’이 아니라, 정의보다는 ‘질서’ 유지에 더 관심 있는 온건한 백인들”이라고 결론짓는다.
시위란 안온한 일상을 흔들어 틈을 만들고, 투명 인간 취급받던 이들을 불투명하게 드러내는 행위다. 억울하게 떠난 이들과 그 가족들을 침묵시키려는 세상에서, 담장을 만드는 이들은 담장 너머 사람들을 비존재로 간주하거나 안락한 삶을 위협할 위험으로 여긴다. 난민, 이주노동자, 장애인, 탈북민, 정서적 고립 속에 사는 이들, 반복되는 대형 참사와 산업재해로 고향을 잃은 이들까지. 그들의 존재를 불편해하는 사회의 무정함이 그들을 더 가파른 벼랑으로 내몬다. 낯선 타자에게 적대적 시선을 보내며 정신적 고향을 박탈할 때, 세상은 위험한 곳으로 변한다. 끊임없이 경계선을 만들고 소통을 차단하는 세상에는 과시와 자극, 혐오의 언어만 가득하다. 인문적 품격과 교양은 사라지고, 사람을 향한 존중 대신 자기 과시적 언어만이 넘실댄다. 욕망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 틈을 선망과 원망이 파고들며 냉소와 적대감이 거리 곳곳을 장악한다. 정치의 장에서는 자극적이고 서슬 퍼런 언어가 난무하며, 품격과 역사의식을 잃은 이들이 눈과 귀를 어지럽힌다. 흉기가 된 말들이 세상을 떠돌며 무심히 지나가는 이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 상처가 누적될수록 마음의 여백과 회복탄력성이 줄어들어, 사람들은 조그마한 차이도 용납하지 못한다.
■ 지금, 삶의 무늬를 다시 짜야 할 때
- 퇴행의 시대에 회복해야 할 존중의 언어와 인간에 대한 믿음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은 것은 딱딱하다. 살아 있는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만, 고사목은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림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낯선 세계와의 만남이 주는 당혹감은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대립되는 세계와의 긴장 속에 머물 때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고 정신의 탄력이 커진다. 익숙한 세계에만 머무르려 하면 우리는 퇴행한다. 경계선 위에 서서 변화를 수용할 때 자기 갱신이 일어난다. 인생은 저절로 살아지지 않는다. 우울감에 침윤되지 않고 삶의 기쁨에 눈 뜨기 위해서는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삶의 자리가 장터로 변하고 신비에 대한 감각이 스러진 자리에 경외심, 연민, 자비, 성찰, 환대… 이 낯설어진 가치를 다시 채우고 회복할 필요가 있다.
말이 타락하면 세상은 혼돈으로 돌아간다. 이 혼란의 시대에 인간의 실상을 통찰하고, 주변화된 이들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역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입장을 가진 인문적 교양을 갖춘 이가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수 있어야 한다. 시대의 위기를 직시하고, 실천적 지혜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며, 사고는 유연하고 인간에 대한 존중이 깊이 뿌리내린 지도자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타인을 깎아내리거나 소리를 질러 입을 막는 이들이 무대에 오르면 역사는 퇴행한다. 머리를 맞대도 풀기 어려운 현실의 실타래를, 오만하고 무지하며 무정한 이들에게 맡기는 것은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일과 같다. 지금은 전환의 시대다. 그 어느 때보다, 삶의 무늬를 다시 짜야 할 때다.
자기 삶을 살아내는 이들은 거룩하다
세상에 희망이 있냐고
음울한 목소리로 묻는 이들이 있다.
욕망의 문법에 따라 도태되지 않으려고
질주하다 보니 숨은 가빠지고,
어느 순간 외로움과 상실감에 확고히 사로잡혔지만,
그렇다고 하여 멈추어 설 수도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터져 나오는 일종의 비명이다.
희망을 자기 외부 어딘가에서 찾으려는 이들은
낙심할 수밖에 없다.
희망은 스스로 빚는 것이다.
인간은 새로운 시작이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은 세월이지만
비애에 침윤되지 않고
듬쑥하게 자기 삶을 살아내는 이들은 거룩하다.
_김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