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는
어떻게 범죄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다루는가
단계별 일상 회복 매뉴얼
압도적인 상처, 영원할 듯한 고통
그리고 그것을 완결짓는 사람들
누군가의 악의가 한바탕 뒤흔들고 갔을 때, 삶은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방편들은 사실 불충분하다. 경찰에 신고하자니 보복이나 2차 가해가 두려워진다. 심지어 집에서 안정을 취하는 것조차 녹록지 않다. 가해자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마련된 국가 기관이 바로 ‘스마일센터’다. 범죄 피해자의 회복 및 치유를 돕기 위해 운영되는 이곳에선 다양한 방법으로 트라우마를 완화하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치료한다. 심리 상태의 진단 및 상담은 물론 범죄 사건을 끝맺기 위한 수사 및 법률 지원, 피해자들과의 자조自助 프로그램 지원 등을 제공한다. 거주지에 돌아가기 어려운 피해자라면 임시 주거지(쉼터)도 주어진다. 그렇게 센터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2024년 한 해에만 2000명가량 되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모두 지역 스마일센터의 센터장으로, 정신적인 치료에서 각자 20년간 경력을 쌓아왔다. 배승민 선생은 정신과 의사로서 오래도록 아동 피해자들을 도와왔다. 아이들의 고통과 회복을 가까이서 지켜봐온 그는 글을 마무리하면서도 한 아이의 말을 인용했다. 백명재 선생은 국군수도병원에서 수많은 PTSD 환자를 진료했다. 그 경험은 군에서의 사망 사고, 총기 상해 등 트라우마를 다루는 사례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한편 유성은 선생은 자살, 트라우마 연구에 정통한 심리학자이자 임상심리전문가다. 그는 직접 연구한 ‘복잡성애도척도’를 이 책에 수록하기도 했다.
책에는 저자들이 센터에서 만난 범죄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친오빠로부터 지속적으로 폭력을 당한 채린씨, 범죄 피해로 딸을 잃은 진배씨, 디지털 성착취물 유포를 겪은 도연까지…… 피해자들의 나이와 성별, 트라우마 사건과 그 이후의 상황은 제각기 다르다.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남의 일’로만 여기는 태도는 금물이다. 누가 트라우마를 겪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판단보단 공감을, 감상보단 이입을 밑에 깔아놓은 채 트라우마 치료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트라우마의 불길은
단번에 진화되지 않는다
트라우마의 영향력은 실로 끈질기며 광범위하다. 급한 불만 끈다고 해서 사라지지도 않고, 정서 반응만 다룬다고 해서 해결되지도 않는다. 저자들이 차용한 ‘화마’의 비유가 꼭 맞는다. 산 전체를 집어삼킨 불은 단번에 진화되지 않는다. 큰 불길을 잡아도 나뭇가지나 낙엽 깔린 바닥에서 계속 타오른다. PTSD 또한 급성 반응 뒤에도 지속적인 후유증을 남기며 마음뿐 아니라 신체, 사고, 대인관계에 이르기까지 온갖 곳에 상처를 입힌다.
책은 PTSD의 진화 과정을 시간순으로 살피고 있다. 1장 ‘불이 났어요’에서는 급성 반응을 다룬다. 과각성과 저각성, 해리, 불면, 우울 등이 포함된다. 이때 과각성보다 저각성 증상을 보이는 환자의 후유증이 더 오래간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저각성은 과각성에 비해 알아보기도 더 어려운 데다 심해지면 ‘해리’를 일으킬 수 있다. ‘해리’라는 단어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로 널리 알려져 극단적인 증상을 연상시킬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극을 차단하는 증상으로, 불안과 초조보다도 눈에 덜 띈다.
가까운 지인의 강도 미수 및 방화를 겪은 보경씨도 해리 증상을 보였다. 대로변에 있는 센터를 찾지 못해 길을 헤맸고,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이 한 박자씩 늦었다. 이외에는 일상생활을 잘했으나 어느 날 가족의 전화를 받고는 폭력적으로 돌변했다. 사실 보경씨의 증상은 범죄 피해보다 더 이전의 가정폭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주 멍해졌고,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무슨 일에든 시간이 더 걸려 불편했지만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니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리는 상처를 회복한 게 아니라 억지로 눌러둔 상태다. 관련된 자극이 주어지면 몇 배는 더 강하게 튀어 오른다. 저자가 강조하듯, ‘영원한 마취는 존재하지 않는다’.
2장 ‘잔불’에서는 급성 반응 이후의 후유증을 다룬다. 트라우마 재경험, 자기혐오, 불면과 악몽 등이다. 급성 반응보다야 약하다지만 그 점이 치료에 방해가 된다. 별것 아니라며 지나치거나 사건과 연관 짓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료를 결심하기만 한다면 도움을 줄 방법은 많다. 예컨대 악몽은 약물로 개선할 수 있다. 원래 전립선비대증으로 인한 배뇨장애에 썼던 ‘프라조신’이 이제는 PTSD 치료 가이드라인에 소개되고 있다.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무력감을 불러일으키는 악몽조차 조절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놀랍다.
약물을 쓰기 전 다른 치료 기법을 활용해볼 수도 있다. 국군 장병 정태씨는 군부대에서 가혹행위를 당한 뒤 밤마다 악몽을 꿨다. 칼을 든 괴한이 막다른 길까지 쫓아오는 꿈이었다. 저자는 이를 다루기 위해 ‘악몽 바꾸기’ 기법을 소개했다. 종이 두 장과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기법이다. 한 장에는 악몽의 장면을 간단하게 그린다. 다른 한 장에는 그 장면과 유사하지만 긍정적인 장면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그린다. 정태씨는 괴한 대신 좋아하는 아이돌이 흉기 대신 꽃다발을 들고 오는 장면을 그렸고, 이후 실제로 악몽을 훨씬 덜 꾸게 됐다. 같은 내용의 악몽이 PTSD 환자들 가운데 흔하다. 센터를 찾는다면 위 기법으로, 또는 약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까지 이어지는 증상도 있다. 3장 ‘화마가 지나간 자리’에서 다루는 기념일 반응, 깊은 비애, 중독과 자해 등이다. 이쯤 되면 사건이 일단락된 건 물론 1장과 2장의 증상들도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은 탓에 더 심각한 증상으로 이어진다. 특히 ‘기념일 반응Anniversay Reaction’은 매년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만 되면 증상이 악화되는 것인데, 사건으로부터 수년, 혹은 수십 년이 지날 때까지 증상이 계속된다는 점에서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사례 중 몇에서도 기념일 반응을 찾아볼 수 있다. 방실 아주머니는 불면증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였다. 워낙 성실한 그는 치료를 거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특정 달만 되면 약이 안 듣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아주머니는 30여 년 전 그 시기에 첫아이를 잃었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고, 평소에는 생각이 나지도 않아 증상과 전혀 연관 짓지 못했지만 치료 과정에서 발견됐다. 진료실에서 저자는 억울해하는 환자의 마음에 공감하며, 힘들더라도 천천히 소화해보자고 권했다. 때로 가장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가장 단순한 마음이다.
트라우마의 발생부터 치료까지
모든 단계를 관통하는 이야기들
PTSD와 그 증상, 치료법까지를 차근히 다룬 이 책은 그러나 그곳에 머물지 않는다. 4장 ‘새순이 돋는 자리’는 후유증보다 회복에 방점을 둔다. 외면해온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 피해자끼리 서로 보듬어주는 것, 긍정적인 기억을 떠올리는 것 모두 치유의 효과를 낸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치료를 받을 결심이다. 늦었다며 자포자기하지 말자. 치유는 언제라도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저자들은 치료 시작을 ‘최대한 빨리’ 하는 게 좋다며, 사건 1개월 내에는 정신건강에 대한 평가를 받아보길 권한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트라우마 사건을 겪은 때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PTSD에서는 정서적 지지의 효용보다 부적절한 반응의 악영향이 훨씬 더 크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러니 위로되는 말을 해주는 것보다 상처 되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우선이다. 그래도 뭔가 말을 해주고 싶다면, 두 가지를 꼭 기억해두자. 초기에는 사건에 대해 자세히 묻지 말고, 당사자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을 때 들어주는 정도로 하자. 또한 과거나 미래보다는 현재에 대해 얘기하는 게 좋다. ‘다 끝났으니 잊어라’라든지 ‘이제 괜찮아질 거다’라는 말은 큰 위로가 되어주지 못한다. 사실 말보다 곁에 있어주는 것, 현실적으로 안전을 확보해주는 것 등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
그러니 이 책은 단지 범죄 피해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범죄 피해자의 주변인을 위한 책이고, 공통의 트라우마를 겪은 세대를 위한 책이고, 크든 작든 트라우마 사건을 겪었을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를 위한 책이다. ‘내 일’이 될지도 모르는 고통으로부터 치유되는 길을 함께 따라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