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일제강점기 제주도로 온 일제의 수탈도 조선과 다르지 않았다. 1932년 1월 7일 일제의 횡포를 참다못한 세화리 해녀 300여 명이 시작한 시위는 이후 1만 7000여 명이 합세해 제주도 최대 항일 운동으로 기록됐다. 이를 ‘제주 해녀 항일 운동’이라고 한다. 1945년이 되어 일제에서 해방되었지만, 제주도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21쪽
1947년 1월 서귀포 법환리 출신 재일동포들이 전기 가설을 위한 자재를 고향에 기증했다. 그런데 자재를 싣고 제주도에 입항한 배를 경찰이 밀수선으로 적발해 자재를 압수했다. 이 사건에 제주 경찰 총책임자인 제주경찰감찰청장이 연루돼 파면됐고 미군정 장교 등도 의심을 받았다. 제주도 사람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모리간상배에게 자기 재산 빼앗기는 걸 견딜 수 없었고, 경찰도 미군정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 32쪽
3·1 사건과 총파업을 겪은 후 제주도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전북 출신 극우파 유해진이 제주도지사로 임명되었고, 서울 출신 김영배가 제주경찰감찰청장으로 부임했다. 도청과 감찰청 간부도 제주도 출신을 배제하고 육지 출신으로 바뀌었다. 특히 유해진은 부임 당시 ‘서북청년단’ 7명을 경호원으로 데려왔다. 서북청년단은 서북지방, 즉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만든 극우 반공 단체다. 이들이 나중에 제주도를 혼란의 도가니로 빠트리는 역할을 한다. -42~43쪽
제주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초토 작전은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펼쳐졌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서는 가혹한 방법을 써서라도 제주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진압군은 산간마을에 사는 주민에게 해안마을로 내려와 경찰 조사를 받으라고 명령했다. 순진하게 해안마을로 내려온 주민들은 무장대 근거지를 대라며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64쪽
이승만은 미군정청에서 일하던 관리들을 정부 관리로 등용했는데 대부분 일본 총독부 관리 출신들이었다. 오랜 해외 생활로 국내 정치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해방 후부터 친일파와 손을 잡았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다. -79쪽
전쟁 중에도 이승만은 종신 대통령을 굼꿨고, 자신이 다음 대통령이 될 길을 찾고 있었다. 이때는 국민이 대통령을 뽑는 ‘직접 선거’가 아닌,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접 선거’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국회와 사이가 단단히 틀어져 간접 선거로는 당선 가능성이 없었다. 방법을 찾던 이승만 정권은 국회에 직선제 개헌안을 냈다. -84쪽
대구 지역 고등학생의 시위는 전국에서 최초로 독재 정권에 맞선 학생 시위였다. 이를 ‘대구 2·28 민주 운동’이라고 부른다. 이에 자극을 받아 3월 1일에는 서울에서 “공명선거 실시하라!”라는 유인물이 ‘전국대학생투쟁위원회’ 명의로 뿌려졌다. 3월 5일 서울, 3월 7일 부산, 3월 8일 대전, 3월 10일 수원 등 시위는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외친 ‘학원의 자유’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이승만 정권을 상대로 ‘공명 선거’를 외치는 민주화 운동으로 발전했다. 어른도 하지 못한 민주주의 씨앗을 고등학생들이 뿌렸다. -96~97쪽
3월 15일의 부정 선거, 폭력 선거를 보다 못한 경남 마산 시민과 학생이 가장 먼저 시위를 벌였다. 민주당 마산시당도 한창 선거 중인 오전 10시 30분, 부정 선거를 폭로하며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거리로 나왔다. 오후 7시 30분에는 1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개표 중인 시청으로 몰려갔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소총을 쏘고 최루탄을 터트렸다. 결국 경찰이 쏜 총에 8명이 죽었고 수백 명이 잡혀갔다. 행방불명된 사람도 있었다. -102쪽
4·19 혁명은 2월 28일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이 시작해 3·15 마산 의거를 거쳐 서울에서
대학생이 응답했고 시민과 교수단이 합류해 완성됐다. 그러나 야당을 비롯한 정치권은 뒷짐 지고 구경만 하다가 거저 정권을 인수했다. 정치인들은 아무런 준비도 돼 있지 않았다. 그 못난 정치인들 때문에 민족의 비극은 다시 싹텄다. -119쪽
민주공화당은 부정 선거로 얻은 표로 박정희가 대통령을 한 번 더 할 수 있는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대학생 시위를 막기 위해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하지만 휴교 조치되었던 학교들이 개학하면서 다시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노동 환경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이다. -142쪽
5·18 민주화 운동 기간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열흘간이다. 그러나 그 기간은 군인들이 총칼로 선량한 민주시민을 제압한 기간일 뿐이다. 박정희와 똑같은 방식으로 정권을 차지하려는 전두환과 신군부의 등장이, ‘김대중이 광주사태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라는 뉴스를 도배한 신군부의 거짓말이 광주 시민의 자존심에 상처를 줬고, 시민항쟁을 만들었다. -174쪽
1980년 10월 22일 국민투표에서 전두환 정권의 ‘헌법개정안’은 95.5퍼센트의 투표율과 91.6퍼센트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압도적인 찬성률에 민주화 운동 세력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지만, 계엄령 아래에서 군대와 경찰, 통반장의 선거 개입은 예상된 일이었다. ‘개정헌법’에 따라 전두환은 국회와 정당을 해산했고,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어이없는 입법기구를 만들어 156일 동안 국회를 대신해 입법부 기능을 하게 했다. -185쪽
아무리 포악한 전두환 정권도 한국 천주교의 본산인 명동성당과 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경찰은 물러났다. 명동성당 농성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1000여 명의 대학생은 남대문시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성당 안에서 천막생활 하는 상계동 철거민들은 농성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6월 10일 하루로 예정되었던 국민대회는 국본 지도부가 감당하기 어려운 ‘6·10 민주항쟁’으로 진화했다. -2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