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속 단 하나의 기록에서 찾은 “조선 최초의 패션쇼!!"
K-스토리 공모전 대상 수상작인 《래빗》의 작가 고혜원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작가의 첫 번째 작품인 《래빗》이 6.25 전쟁이라는 아픈 역사 속에서 희생당했지만, 우리에게 잊혀졌던 소녀 첩보원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면, 이번에 출간하는 《경희: 모던 걸 런웨이》는 대다수 여성이 한복을 입던 시대에 ‘모던 걸’이나 ‘모던 보이’들의 양장을 만드는 명동의 양장점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주인공 경희가 자신의 재능을 훔쳐 성공 가도를 달리던 남성 디자이너에게서 벗어나 조선 최초의 패션쇼를 열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성장 스토리이다.
《경희: 모던 걸 런웨이》는 1934년 6월16일 서울 종로 기독청년회관에서 ‘조선 유행 여자 의복 감상회’가 열렸다는 하나의 ‘사료(신문 기사)’에서 시작된 소설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 최초의 패션쇼”를 작가가 소설로 되살려낸 것이다. 아주 작은 하나의 ‘사료’에서 출발했는 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독일군 소속의 한 동양인 병사가 미국 육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한 장의 사진에서 출발하여 거대한 서사를 구현했던 영화 《마이웨이》와도 비슷하다.
※ ‘조선 유행 여자 의복 감상회’ 《조선일보 | 1934.06.16. 기사》 참고
‘조선 유행 여자 의복 감상회’는 1934년 6월16일 서울 종로 기독청년회관에서 진행되었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은 ‘모던 걸’을 ‘못된 걸’이라고 불렀으며, 신문 등에서도 모던 걸처럼 꾸미는 여성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전파했다. 이에 ‘조선 직업 부인 협회’에서는 유행을 따르는 것에서 벗어나 유행을 만들어가겠다며 ‘조선 유행 여자 의복 감상회’를 기획했다. 조선옷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나들이 갈 때, 연회에 참석할 때, 운동할 때, 가정 내에서 입을 수 있는 옷 등 여러 가지 옷을 선보였다. 이런 모습은 현대의 패션쇼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조선 최초의 패션쇼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930년대 ‘직업을 가진 여성’에 대한 서사
《경희: 모던 걸 런웨이》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 최초의 패션쇼를 다룬다는 점에서 소재의 신선함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더불어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30년대에 직업을 가진 여성들에 대한 서사라는 점에서는 신선함과 흥미로움 이상의 새로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여성 운동의 선각자로 평가받는 나혜석의 동명 소설 〈경희〉가 있다는 것이다. 나혜석은 이 소설에서 결혼이라는 제도와 관련해서 전통적인 가치관을 수용할 것인지 새로운 삶을 선택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신여성을 그리고 있다. 《경희: 모던 걸 런웨이》는 새로운 삶을 선택한 모던걸(신여성)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 《경희: 모던 걸 런웨이》는 ‘러키 라케(Lucky Lake)’라는 양장점에서 남성 디자이너의 재봉사로 일하던 주인공 경희가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 과정에서 경희의 조력자들은 모두 여성이다.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조선 유행 여자 의복 감상회”라는 이름의 ‘패션쇼’를 기획한 사람은 여성 기자이고, 함께 패션쇼를 준비하는 친구들은 ‘명동 양장점’에서 재봉사로 일했으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 재봉사들이다. 또한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감내하며 패션쇼 무대인 ‘런웨이’에 오르는 인물들 역시 모두 여성이며, 주인공 경희의 ‘이웃’이자 패션쇼의 메인을 장식하게 되는 ‘독립운동가’는 남장 여성이고, 패션쇼 행사를 주관하는 곳 역시 ‘조선 직업 부인 협회’라는 여성 운동 단체이다.
이들 여성들은 여러 가지 갈등 속에서도 서로 ‘연대’하면서 각자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애초에 ‘조선 유행 여자 의복 감상회’, 즉 패션쇼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적어도 메시지를 표현할 옷을 제작할 사람과 그 옷들을 입고 무대에 설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선 유행 여자 의복 감상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무대를 통해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여성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통해 소설은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식민지 시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은 여성들, 그리고 전근대적이고 폭압적인 사회 분위기에 맞서 자아실현을 꿈꾸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된다. 그런 의미의 연장선에서 《경희: 모던 걸 런웨이》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논쟁 중인 페미니즘 담론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편견과 차별 때문에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우리 시대의 여성들을 응원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리 하면 제가 가장 아름다울 것을.”
“Runway, 뭔가 활주로 같지 않아?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걷고 나면 저 길의 끝에서 훨훨 날아갈 거야.
더 멀리, 더 밖으로, 더 자유롭게.”
경희는 조선 최초의 패션쇼를 마치고 자신의 꿈이었던 디자이너가 된다. 경희의 꿈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바로 ‘런웨이’이다. ‘런웨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에는 모델들이 걸어가는 무대라는 의미 외에도 ‘활주로’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 ‘런웨이’라는 공간은 경희는 물론 패션쇼를 준비한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꿈을 이륙시키는 공간이기도 하다. 양장점에서 쫓겨나 일자리를 잃은 경희는 조선의 옷을 현대에 맞게 개량한 ‘새로운 옷’들을 선보이겠다는 자신의 꿈을 위해 의복 감상회에 참여했고, ‘채령’은 ‘모던 걸’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바꿔볼 이벤트로 의복 감상회를 기획했다. 그리고 상해로 가는 독립자금을 운반하려 했던 뜻밖의 손님 ‘승효’는 독립의 꿈을 안고 런웨이를 걸었으며, 양장점 러키 라케의 친구였던 점순, 정아 역시 자신만의 꿈을 안고 런웨이 위를 걸었다. 이 모든 장면을 카메라로 기록하는 현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리 하면 제가 가장 아름다울 것을.”이라는 주인공 경희의 말처럼 ‘다른 누구의 옷’이 아니라 ‘나만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지키고 가꾸어 나간다면 그 사람이 누구든 응원받아야 한다. 다만,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좋아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용기’, 그리고 ‘간절히 이루고 싶은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받은 응원은 사실은 모두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만큼은 기억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