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세상의 모양을 점점 선명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
비전공자 일러스트레이터 반지수의 일과 삶
수많은 베스트셀러의 표지화를 그리며 “흥행 보증수표”라는 수식어가 붙은 일러스트레이터 반지수의 산문집 『울면서 그린 그림』이 출간되었다. 일상의 풍경을 애니메이션 속 한 장면처럼 묘사한 표지들은 빛과 공기까지 눈에 보일 듯한 생기로움으로 출판계와 독자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반지수 작가는 책 표지화를 비롯해 브로콜리너마저, 이루마, 폴킴 등 다양한 아티스트와의 협업, 단편 애니메이션 연출, 그림 강사, 에세이스트까지 다방면에서 활약해왔다. 이 책에서 그는 비전공자로 시작해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자리 잡기까지의 고투와 자기 삶의 곡선을 여실히 보여준다.
『울면서 그린 그림』은 저자가 자신과 “비슷한 일을 하는 프리랜서들을 생각하며” 쓴 책이다. 주로 혼자 하는 일이기에 겪는 어려움과 고단함, 작업을 하며 느낀 업계의 모순, 일러스트레이터 지망생들을 향해 아낌없이 건네는 실질적인 조언, 행복을 말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대체로 행복하다’고 되뇌는 일상의 모습이 빼곡하다.
책을 쓸 때마다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기나긴 편지를 쓰는 기분이다. 이번 책은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에 관심이 있거나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프리랜서들을 생각하며 썼다. 늘 혼자 일하기 때문에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이 많지 않다.
─「책머리에」(11쪽)에서
외주와 창작의 경계에서 골몰하며
꼿꼿하게 닦아나간 자기만의 길
마땅히 도움을 받거나 의지할 데 없이 홀로 부딪혀야 하는 프리랜서의 특성상, 먼저 그 길을 닦아온 저자의 노하우는 새겨들을 만하다. 그는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다양한 경험담을 통해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 창작과 의뢰받은 일의 적정한 줄타기, 계약과 비용 등에 관한 구체적인 조언을 들려준다.
풍경을 세밀하게 구현해내는 그는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어딘가 허술한 그림을 보면 참을 수가 없다”라고 말할 만큼 자료 수집에 공을 들인다. 나뭇잎의 모양과 대나무가 뻗은 모습을 몇날 며칠 관찰하고, 온라인 지도의 ‘로드뷰’ 기능을 활용하여 외국 동네를 둘러보거나 십수 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과거 풍경을 채집하기도 한다. “모르는 부분을 얼버무리지 않고, 정확한 근거를 토대로” 그리되, “회화 작업으로서의 매력을 배가시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작업물의 단가를 산정하는 일과 저작권 양도에 관한 문제처럼 프리랜서 창작자들이 실제 계약에서 주의해야 하는 지점들도 톺아본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낮은 금액으로 단가를 책정했다가 선배 작가에게 “반 작가님은 노동운동도 했다면서 왜 자기 일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거”냐며 혼이 난 후 정신을 차렸고, 여전히 “저작권은 출판사에 귀속되며……”라는 대목을 심심치 않게 만나는 계약서에 한탄하며 저작권은 당연히 작가에게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계약서를 읽다가 한숨 쉬는 일은 언제쯤 사라질까. 그림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이마에 써 붙이고 다녀야 더 이상 문제가 안 생기려나. 작가가 구구절절 수정을 요청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창작자의 저작권이 당연하게 존중받고 인정받는 날이 오길 바란다.
─「저작권은 작가에게」(174쪽)에서
“내 말을 지키기 위해서, 나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대체로 행복하게, 그럼에도 더 잘될 미래를 꿈꾸며 살아가기
그리기 이전에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의 면모도 마음껏 펼쳐 보인다. 순수한 아이의 재능을 마주한 후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아이처럼은 될 수 없을 것 같”다며 울기도 하고, 국내외 미술관과 화집에서 매번 새로운 화가들을 발견하며 즐거움을 찾아내기도 한다. 나아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 자신의 말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겠다고 씩씩하게 다짐한다.
소박한 일상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삶에 관해서도 전한다. 사주나 점을 맹신하지 않지만 응원의 말을 듣고자 종종 사주 카페에 들르고, 결혼식과 결혼반지를 생략한 남편과 고양이들과의 생활에 큰 만족감을 느끼며, 평화롭게 천변을 산책하면서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만끽한다. 그러면서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림을 그리기로 선택한 것이 자랑스럽고 마음에 든다고, 나는 ‘대체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이런 삶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