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속에 켜켜이 녹아 있는 생명 존중의 마음,
그리고 그 이면에 감춰져 있는 우리의 민낯을 들추다!
이 책은 네 편의 단편 동화로 이루어져 있다. 숲속 깊은 곳에 자리한 음식점에서 매일매일 생사를 걸고 죽음의 게임을 벌이는 닭의 운명을 그린 〈숲속 가든〉, 자신에게 남아 있는 생명의 기한이 적힌 시계를 찾아 시간의 동굴로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야기의 동굴〉, 무시로 어린 시절과 현재를 넘나드는 혼란스런 상황에 빠져 있지만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못하는 이의 서글픔을 담은 〈잠에서 깨면〉, 인간들 못지않은 지능으로 사리분별을 능히 할 만큼 뛰어난데도 무자비한 힘에 맥없이 떠밀리고 마는 물고기 이야기 〈비단잉어 준오 씨〉 등.
작가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심코 맞닥뜨리게 되는 삶의 여러 갈피에서 이야기의 소재를 끌어와 생명력을 부여한 뒤 ‘진실’을 좇으며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숲속 가든〉은 내가 할아버지와 함께 숲속에 있는 식당을 찾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식당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음식을 주문하지 않고, 곧장 식당 뒤쪽에 있는 닭장으로 향한다. 그러고는 닭장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내게 이렇게 묻는다.
“넌 혹시 길에서 뭔가를 주워 본 적 있니?”
이윽고 할아버지는 도로에서 우연히 줍게 된 병아리 상자 이야기를 꺼낸다. 양계장으로 가던 트럭에서 쏟아져 내린 병아리 상자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동차 트렁크에 옮겨 실은 뒤, 친척 아저씨가 운영하는 식당에 가져다주었다는 것. 그곳에서 삼백오십여 마리의 병아리들은 무럭무럭 자라 닭이 된다.
원래 돼지갈비를 팔던 그 식당은 언젠가부터 손님들에게 닭 요리를 조금씩 선보이기 시작하다, 급기야 얼마 안 가 토종닭 전문 요리점으로 간판을 바꿔 버린다. 할아버지는 그 식당에 갈 때마다 주인아저씨와 죽음의 게임을 벌이는 닭들을 보면서 복잡한 심경에 휩싸인다. 매일매일 사투를 벌이는 닭들에게 과연 삶과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이야기의 동굴〉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언덕 위에 있는 이야기 신의 집을 찾는 걸로 말문을 연다. 이야기 신은 사람들이 주문한 단어로 이야기를 지은 다음 만족할 만큼 익힌 후에 꺼내 놓는다. 이번에 주문받은 단어는 ‘동굴’과 ‘시간’!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 히말라야, 너무 추워 모든 봉우리가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다. 그 많은 봉우리 중 어느 하나에 거대한 얼음으로 만들어진 ‘시간의 동굴’이 있고, 그 얼음 동굴 안에는 수많은 시계가 들어 있다. 각각의 시계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곗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시계를 찾아 바늘을 되돌리고 싶은 욕심에 너나없이 시간의 동굴을 찾아가는데……. 과연 자신의 시계를 찾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이 꼭지에는 이야기가 하나 더 들어 있다. 책으로 직접 확인하시길.^^)
〈잠에서 깨면〉은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정아는 문득 엄마가 걱정되어서 우산을 챙겨 현관을 나선다. 엄마는 벌써 몇 달째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엄마가 오기를 기다린다. 몇 대의 버스가 지나갔지만 엄마는 끝내 내리지 않는다.
그때 길 건너편에 있는 사진관이 눈에 들어온다. 정아는 갑자기 사진이 찍고 싶어진다. 퇴근 준비를 하던 사진사는 기꺼이 정아의 사진을 찍어 준다. 그 후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깨었을 때, 인기척이 느껴져 현관문 쪽으로 나가 본다.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가 미소를 지으며 정아를 바라본다. 할아버지에게 문을 열어 주려다 정아는 고개를 갸웃한다.
“할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셨잖아요. 할아버지, 이거 꿈인가요?”
정아가 묻자 할아버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정아는 지금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 걸까?
〈비단잉어 준오 씨〉는 ‘그린 트리’라는 공원의 연못에 사는 비단잉어 얘기다. 공원관리부에서 일하는 나는, 말 그대로 공원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린 트리는 갈수록 운영이 어려워져 직원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린 트리를 그만두기 전날 밤, 나는 연못의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러 갔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이봐!”
비단잉어가 낸 소리라는 걸 알아채고는 하도 놀라 말문이 턱 막힌다. 그 비단잉어는 사람의 말을 할 줄 알 뿐 아니라 공원의 사정까지 빤히 꿰뚫고는 관객을 끌어모으기 위해 비단잉어 쇼를 제안한다. 마음 깊은 속에서 존경심이 우러나온 나머지, 나는 비단잉어에게 예의를 갖추며 존댓말을 한다. 그러고는 비단잉어 쇼를 성공리에 마치고 연못의 책임자가 될 꿈을 꾸며 잠자리에 드는데…….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다음 날, 상상치도 못한 광경을 마주하고 만다. 불가항력적인 힘 앞에서는 제아무리 똑똑해도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걸까?
다시, 이야기의 시대가 시작된다!
재미난 이야기 사이로 생각의 고리를 이어 가는 한윤섭표 철학 동화
이렇듯 《숲속 가든》에서는 네 편의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 책장을 넘기면서 이야기의 고개를 넘어가다 보면, 이야기의 재미에 푹 빠져서 자신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된다. 이야기 끝에는 계주 경기의 마지막 주자가 뜻밖의 우승을 이끌어 내듯 놀라운 반전이 기다린다. 급기야 두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신도 모르게 다음 이야기가 듣고 싶어 숨을 꼴딱 삼킨다. 이것이 바로 한윤섭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힘이다.
김지은 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해리엇》에서 동물의 자유를 간절히 염원했던 작가는 〈숲속 가든〉에서 그 자유의 현실적 가능성을 되묻는다. 《서찰을 전하는 아이》에서 우리가 원하는 결말만이 우리를 기다리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 주었던 그는 〈비단잉어 준오 씨〉에서 비인간을 향한 인간들의 행동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든다. 〈잠에서 깨면〉을 읽다 보면 이야기 안에서 이야기가 뒤집히는, 서로 다른 시간이 하나의 공간에서 맞닿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야기의 동굴〉은 제목처럼 이야기 그 자체의 매력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이야기의 자기소개서 같은 동화다.
《숲속 가든》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나는 ‘생명’들과 그 존엄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것들에 스며 있는 ‘생명’을 일깨워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뚝 멈추고 돌아보게 만든다. 동시에 더없이 나약한 생명 앞에서 이기적이고 잔인하게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를 반추하게 한다.
아울러 이 책을 통해서 이야기의 아릿한 맛을 본 독자는 그동안 무심하게 보던 것을 새롭게 들여다보며 그다음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 나갈지 상상을 펼치게 된다. 이것이 한윤섭 동화의 미덕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 쉽사리 희망을 허락하지는 않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단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내어 딛게 해 준다. 이른바 스스로 상상하게 하면서 생각하는 힘을 돋우고 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