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시대가 위독할 때마다
가장 먼저 일어나 가장 먼저 사람을 지켰다”
탄광 속의 카나리아처럼 시대의 고통과 절규를 먼저 듣는 시인들
권력이 사람을 죽이고, 시궁창 같은 현실로 옭아매어도 거리로 나서는 시인들
시 무용론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게 많고 볼거리도 많은데, 도대체 누가 바쁜 시간 쪼개어 시를 읽느냐는 것이다. 시인들의 어려운 생활도 시 무용론을 거드는 데 한몫했다. 오래전 어느 언론사가 등단작가 100명을 조사한 결과 시인의 연평균 수입액은 고작 30만 원으로 나타났다. 시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하등 쓸모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인들은 시를 썼다. 가난했지만, 가난을 핑계 삼아 펜을 놓지는 않았다. 백인경 시인의 말처럼 처음부터 “시는 산업이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는 자본주의가 득세한 세상에서 돈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게 만드는 버팀목이었고, 검은 욕망으로부터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지키게 해주는 방패였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서 부조리한 것들과 맞서 싸우는, 가지지 못한 자들을 위한 무기였다.
그리하여 시는 불의가 득세하는 모든 곳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 제국주의 세력에 나라가 짓밟힐 때에도, 총칼을 든 군인들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을 때에도, 탱크를 탄 계엄군이 국민을 상대로 살육을 저지를 때에도 시는 그곳에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그들의 만행을 지켜보았으며, 총알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시는 시대가 위독할 때마다 가장 먼저 일어나 가장 먼저 사람을 지켰다”.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무능했지만, 결국 사람을 지켜낸 건 시였다. 이 책은 그렇게 세상과 맞서 싸웠던 대표시 50편을 추려낸 저항시선집이다.
“시의 정신은 본디 저항이다”
제주4.3, 5.18 민주화운동, 전태일 분신 항거,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과 연대하는 시인들의 마음
시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 곁에 있을 때 빛을 발한다. 이 책에 실린 50편의 시는 높은 곳을 바라보지 않는다. 가장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감싸안는다.
변희수 시인의 「맑고 흰죽」은 제주 4.3사건 피해자인 무명천 할머니(故 진아영 할머니)가 평생 죽만 먹고 산 목이 메는 사연을 맑고 흰 언어로 풀어냈다. 김남주 시인의 「학살 1」은 1980년 광주를 짓밟았던 계엄군의 잔혹함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오성인 시인의 「심부름」은 국가 폭력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날것의 언어로 드러냈다.
시인들의 시선은 경제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희생당해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곁에도 머물렀다. 이태정 시인의 「오버로크」와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은 전태일 열사로 대표되는 60~70년대 노동자들의 잘려나간 청춘을, 하린 시인의 「서민생존헌장」은 재벌 대기업 발전을 위해 “새 빈민을 창조”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민낯을 드러냈다.
2000년대 이후로는 국민을 지켜야 할 국가가 오히려 국민을 외딴곳으로 몰아넣는 행태를 비판하고, 슬픔에 연대하려는 시가 주목을 받았다. 박소란 시인의 「용산을 추억함」은 용산 참사의 상처를, 김주대 시인의 「유류품」과 허은실 시인의 「설움이 나를 먹인다」는 세월호 참사의 슬픔을 내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문재 시인의 「이제야 꽃을 든다」는 “애도의 이름으로 애도를 막는” 이태원 참사의 실상을 널리 고발하며, 심은섭 시인의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고독사」는 무관심 속에 죽어가는 소외된 자들을 돌아보게 했다.
“이제 이 시들의 주인은 우리가 되어야 한다”
김남주, 신경림, 최승호, 황지우, 백무산, 김해자, 윤동주, 도종환, 마야 안젤루…
12.3 비상계엄 시대에 다시 읽어야 할 저항시 50선
치열한 투쟁 끝에 군사 정권이 물러나고, 국민이 직접 손으로 뽑은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선 지 30년이 넘었다. 그사이 우리나라는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른 경제 발전을 이루어냈고, K 문화를 수출하는 문화강국이 되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온 것 같았다. 이 책의 저자인 황종권 시인도 그렇게 생각했다. 저항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그러나 2024년 12월 3일 늦은 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했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이다. 이어 군용차에 탄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여러 대의 헬리콥터가 서울 하늘을 낮고 빠르게 가로질렀다.
사태를 보며 시인은 깨달았다. 우리는 “여전히 민주주의를 위협당할 수 있고, 국가적 횡포가 자행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우리가 수호하던 자유와 평등이 단번에 빼앗길 수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칼바람을 뚫고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간 건 군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통행이 막힌 도로를 뚫고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소총을 든 군인들과 맞서 싸우며 스마트폰을 들고 실황을 생중계했다.
이에 시인은 “국가가 폭압적인 권력을 휘두를 때마다 무덤을 뚫고 살아나는” 시들을 떠올렸다. 김남주, 신경림, 최승호, 황지우, 백무산, 김해자, 윤동주, 도종환, 마야 안젤루… 폭력과 야만의 시대를 정면으로 살아낸 국내외 시인들의 목소리를. 그리하여 이 책이 탄생했다. 1부 〈고함의 시〉에는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시들을, 2부 〈연대의 시〉에는 슬픔을 공유하고 서로의 손을 맞잡는 시들을, 3부 〈저항의 시〉에는 불의에 항거하는 시들을, 4부 〈희망의 시〉에는 아픔을 치유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 한 걸음 전진하는 시들을 그러모았다. 그리고 황종권 시인만의 목소리로 한 땀 한 땀 “깊고 아름다운” 해설을 수놓았다. 그렇게 다시 생명을 얻은 시들이 모인 이 책의 이름은 『시가 세상에 맞설 때』이다.
우리의 저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