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10
오래 걸렸다. 그리고 나는 이제 진짜 제주를 조금 알 것 같다. 제주는 맛집과 카페와 관광지들이 점점이 모여 있는 섬이 아닌 사람과 자연과 이야기, 아름다움과 아픔이 얽혀 어우러진 섬이다. 삼춘들과 함께 마을을 걷는 동안 점과 점 사이에 진한 선이 생겼고, 선이 면이 되었다. 제주의 점선면을 담은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삼춘들과 함께 썼다.
P. 37
부석희 삼춘을 만나고, 함께 평대리를 걸으며 처음 걷는 골목을 만났고, 처음 듣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삼춘과 평대리를 걸은 후, 다시 혼자 평대리를 걸으니 내가 알던 작은 마을 평대리가 엄청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친해진 것 같냐 하면, 사실은 좀 낯설다.
나는 이게 사랑의 시작인 것 같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을 다 알 것 같고, 알게 된 것 같고, 나랑 비슷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러다 정말 가까운 사이가 되면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고, 나와 아주 다른 부분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상대가 낯설어진다. 그 낯섦을 다시 친숙함으로 바꾸는 과정이 사랑이고, 낯섦을 극복해야 사랑은 오래간다.
P. 64
처음 어르신을 만나 들은 이야기가 너무 강렬했던 거야. 그래서 큰일 났다 했지. 빨리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하고 만나기 시작했어. 나는 동네 어른들하고 편하게 지내니까 이불 속에 같이 누워서 듣기도 하고, 커피 한잔 먹으면서 하염없이 앉아 있기도 하고, 어르신들이랑 한 공간에서 편하게 있다 보면 그동안 내놓지 못했던 아픈 것도 내놔. 내가 마을을 안내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풍경과 이야기가 겹쳐져 있어. 그래서 그걸 들려주는 거야. 그분들 입을 통해 나온 이야기를 나하고 만나는 많은 여행자들에게 전달해서 뭔가를 느끼게 만들고 싶어. ‘머무르고 있는 곳이 진짜 소중한 곳이다’라는 사실.
P. 88
학교 뒤편엔 무엇이 있을까? 육지 사람들은 짐작하기 어렵지만, 제주 사람이라면 쉽게 맞힐 수 있다. 정답은 귤밭. 그 시절 학생들은 다 같이 귤나무를 가꾸었단다. 귵밭에 잡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겨울이면 땅 위에 짚을 덮었는데 학생들이 각자 집에서 필요한 짚을 챙겨오도록 숙제를 내주었다. 부모님이 짚을 모아 어깨에 단단히 메주면 학생들은 그걸 등에 지고 등교를 했다.
P. 117
낯설던 거리가 익숙해질 때 비로소 시작되는 여행이 있다. 숙소가 집이 되고 단골 식당이 생길 때 긴장이 풀리고 그때 비로소 새로운 결의 여행이 시작된다. 나는 그 여행을 좋아한다. 그러니 한번 머물러 보기로 했다. 이 섬과 친해지고 나면 어떤 일이 생길까?
P. 176
제주에 사는 일은 매일 푸른 바다를 만나고, 장엄한 한라산과 눈을 마주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상 속에서 끝없이 4·3사건을 비롯한 근현대사를 마주하는 일이다. 도민들이
숨기지는 않지만, 굳이 드러내지도 않는 상처를 제주에 살며 조금씩 만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귀에 들리고 눈에 보였다. 그러다 보니 관심이 갔고, 살피기 시작했다. 애틋한 마음으로 그 상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제주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P. 270
우리는 제주를 여행할 때, ‘제주에서 뭐하지?’에 골몰한다. 어디에 가고, 무엇을 먹을지만 생각한다. 잠깐 그 생각을 뒤로 하고, 관광지로만 바라보지 말고, 상상력을 가지고 제주도를 마주하면 어떨까. ‘제주를 어떻게 여행하지?’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 책이 그 생각의 곁을 지킬 수 있다면 기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