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무척 좋아했다. 물론 한 해의 마지막 시간을 오두막에서 보내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산에 올라가는 길이 더 좋은지, 아니면 담요로 꽁꽁 싸맨 채 엄마 아빠 품에 안겨 새해 첫날의 희망을 품고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더 좋은지 골라 보라고 하면 쉽게 선택하지 못할 테지만.
그런데 노라가 열 살이 되던 해 겨울에는 낮은 지대뿐 아니라 높은 산에도 눈이 내리지 않았다. 무서운 추위로 대지는 꽁꽁 얼어붙었지만, 이따금 진눈깨비만 조금씩 날릴 뿐 눈다운 눈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아찔해 보이는 협곡조차 뻥 뚫린 하늘 아래 하얀 겨울 외투를 벗고 창피하게 맨살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어른들이 수군거렸다. 간혹 지구 온난화니 기후 변화니 하는 단어가 들렸다. 처음 듣는 단어들인데도 이상하게 노라의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세상이 늘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있지는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떠올린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해 마지막 날에도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하고자 산으로 올라갔다. 눈이 내리지 않아서 썰매 대신 트랙터를 타야 했다. _12~13쪽에서
노바는 자신이 누워 있는 방 안을 둘러본다. 흐릿하다. 벽은 빨간색이다. 처마 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망사르드 지붕 아래 길쭉한 창문으로 빗줄기가 후드득 내려친다.
단말기에서 ‘딸꾹’ 하는 소리가 난다. 눈이 동그랗고 몸체가 자그마한 원숭이 한 마리가 화면에 나타난다. 또 한 종의 영장류가 지구상에 서 영원히 사라진 모양이다. 비단원숭이 무리를 숲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된 지는 벌써 오래되었다.
비단원숭이가 살던 남아메리카의 숲은 오래전에 불에 타 황폐해졌다. 동물원에 갇혀 있던 마지막 한 마리가 죽으면서 이제 사진과 기억으로만 남게 된 셈이다. 슬픈 일이다. 그리고 끔찍한 일이다.
다시 딸꾹 소리가 난다. 이번에는 이구아나다. 과거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녀석도 이제 멸종 대열에 끼게 되었다. _36쪽에서
우마는 진홍빛 루비 반지를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마치 마법사처럼 엄숙한 목소리로 말한다.
“너는 곧 내가 열여섯 살 때 살았던 지구를 건네받게 될 거야. 하지만 분명히 약속해야 해! 지구를 정말 잘 관리하겠다고. 이건 두 번째이자 마지막 기회야. 지금부터는 아주 조심해야 해.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테니까.”
우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목소리가 지하실이나 깊은 굴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웅웅 울린다.
“정확히 칠십일 년 후에 다시 만나자. 그때는 바로 네가 지구의 모습에 책임을 져야 해.”
노바는 갑자기 온몸이 파김치처럼 늘어진다. 이제껏 세상에 없던 마법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일은 이토록 피곤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방 안이 흔들린다. 우마는 노바 앞에서 어린애같이 웃다가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다. 마치 죽음을 앞두고 편안히 눕는 것 같다.
그러나 곧이어 가래 끓는 쉰 목소리가 들려온다. 노바의 귀에는 마녀들의 축제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마법의 주문같이 느껴진다.
“새들이 돌아온다……. 모든 새들이 돌아온다! 검은지빠귀, 개똥지빠귀, 되새, 찌르레기, 모두 돌아온다. 무리 지어 돌아온다. 이제 모두 돌아왔다……, 행운과 축복을 안고!” _55~56쪽에서
“너, 혹시 평행 우주 이론을 믿어?”
“노라, 이제 그만!”
“난 믿어. 내가 평행한 두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거든.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다른 차원과 접촉하고 있는 거겠지. 저기 건너편에 있는 뭔가가 나한테 계속 신호를 보내면서…….”
“그 이야기는 벌써 했잖아!”
“그래.”
“난 네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무서워.”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게 무섭다는 거야, 아니면 저기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서 무섭다는 거야?”
“네 머릿속에 여러 현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게 무섭다는 거야.” “아, 그건 걱정하지 마. 무서워할 필요 없어.”
“조심해서 와! 그리고 노라, 나하고 있을 때는 우리 둘에게만 좀 더 집중할 수 없겠니?”
“노력해 볼게. 이따 봐!”
“그래, 이따 봐!”
노라는 잠시 방 안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또다시 다른 세계가 다가왔다. 아득한 미래 세계에서 전송된 미세한 파편 한 조각이.
_104~105쪽에서
노라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수니바 이모가 늘 말씀하셨대. 그 반지에는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힘이 있다고. 그런데 알라딘이 두 가지 소원을 사용해 버려서 이젠 한 가지 소원밖에 남지 않았지. 이모는 죽는 날까지도 이 반지를 낀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어떤 소원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어. 하지만 이모는 그 소원을 사용하지 않았어. [중략] 마지막 소원은 후손에게 물려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신 거지. 훗날 이 반지의 도움이 필요할 만큼 크고 절실한 소원이 생기면 그때 사용하라고 말이야.”
요나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두막의 나무 바닥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뻗어 노라를 가리켰다.
“그 마지막 소원을 네가 물려받았다는 거야?”
노라가 요나스를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지친 것 같으면서도 약간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 소원을 벌써 사용했어, 요나스. 이젠 남은 건 없어. 그게 마지막 소원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난 그 소원을 지금 이 시대에서 사용한 게 아니라 칠십일 년 후에 사용했어. 열대 우림과 습지대, 북미의 프레리, 아프리카의 사바나에 생명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지구 환경이 위태로워진 미래에 말이야. 나의 가장 간절한 소원은 이 세상에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거였어. [중략] 이게 마지막이야. 이제부터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정확히 알고 행동을 해야만 해. 더 이상 알라딘의 반지에도 마법의 힘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난 그렇다고 확신해.”
처음에는 고개만 흔들던 요나스가 곧 폭소를 터뜨렸다. _183~184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