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외교정책은 더욱 신중하고 겸손해야 한다. 미국이 오만과 일방주의적 편견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국제사회의 존경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1630년, 미국 식민지 당시 매사추세츠만 주지사였던 존 윈스럽은 독립 후 미국의 미래 모습을 개인의 자유와 물질적 풍요가 넘치는 ‘언덕 위의 도성’으로 묘사한 적이 있다. 이는 미국이 세계의 모범이 되고 다른 국가들이 이러한 모범적인 미국을 자발적으로 따르게 한다는 이야기다. 강제하지 않아도 다른 나라들이 미국을 우러러보는 것이 바로 미국형 소프트파워의 핵심이다. 그러나 ‘미국 예외주의’와 ‘미국 최고주의’에 집착하여 신중과 겸양의 미덕을 망각할 때 미국에 대한 다른 나라들의 존경과 자발적 순응은 불가능해진다. ‘우리 편이냐 아니냐’, ‘역사의 바른 편에 서라’라는 고압적 태도는 오히려 반미 정서를 확산하는 기제가 될 것이다.
_45-46쪽, 서론 요동치는 세계와 표류하는 미국의 외교정책 중에서
첫째, 앞으로 더 많은 강경 발언은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필요한 말만을 하고, 우리 동맹의 생명력과 억제력의 견고함에 대해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북한과 협력을 추구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둘째,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다시 협상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의 영구성에 대해서도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북한의 핵무기를 다루는 유일한 현실적인 방법은 그것이 현재의 정치 및 안보 관계를 반영하는 현 상황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은 베이징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 한 북한과 미국 간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있어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은 없다는 것입니다.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_60쪽, 1장 미국의 대북정책 중에서
정부 공식성명에서 ‘억제’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마다 5센트 동전을 받는 내기를 했다면 저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그 단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일까요? 효과가 있을까요? 어쩌면요. 어쩌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핵무기 개량 프로그램을 막는 데는 분명 효과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억제력을 이야기하지만 핵무기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북한이 다시 문을 열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들은 문을 열 거예요. 북한은 우리가 문을 두드리고, 밀고, 문에 부딪히게 만드는 데 전술적으로 매우 능숙합니다. 그들은 문을 계속 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들은 갑자기 문을 엽니다. 우리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며 들어섭니다. 그곳은 우리가 이전에 알았던 것과 다른 공간일 것입니다. 이전과 같은 사람들과 같은 목표를 염두에 두고 테이블에 앉지 않을 겁니다. 만약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대가로 새로운 것들을 기대하고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협상은 순식간에 실패할 것입니다. 협상이 실패하면, 서울과 워싱턴에 있는 사람들은 “봤죠? 말했잖아요. 북한과는 거래할 수 없어요. 불가능해요”라고 말할 겁니다.
_96-97쪽, 2장 신대륙으로 향하는 북한과 한반도 핵재앙을 막는 길 중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여러 측면에서 거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탈냉전 시대의 자유주의적 과잉개입에 따른 미국 중산층의 공동화와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별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중동에서의 계속된 전쟁에 대한 반작용이요. 미국 국민은 이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등에서의 전쟁에 충분히 지쳤다고 생각합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여러 측면에서 미국 유권자들의 원초적인 외침, 즉 ‘바깥 일에 너무 신경 쓰느라고 국내 문제에는 충분히 신경 쓰지 않는다(too much world, not enough America)’라는 성난 외침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해준 게 무엇인가? 캔자스에 학교를 지어야 하는데 왜 칸다하르에 학교를 짓고 있는가? 그런 불만들이 계속 쌓인 거지요.
_148-149쪽, 3장 미국의 외교정책은 실패하고 있는가 중에서
때때로 우리는 터무니없이 이상주의적인 발언을 합니다. 어떤 때는 전세계를 정복하려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전세계에서 멀어지려는 것 같습니다. 과테말라에 진출한 미국 다국적 기업 유나이티드 프룻사를 구하기 위해 CIA를 파견하는가 하면, 인권 문제 등 명확치 않은 이유로 버마(미얀마) 같은 나라와의 관계가 크게 악화된 적도 있지요. 한마디로 엉망진창입니다. 이런저런 일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국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미 합중국의 외교정책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반면에 지난 200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국제정치에서 분명한 추세 중 하나는 미국이 국제 시스템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점진적으로 증가시켜왔다는 것입니다. 1790년에 미국은 매우 약하고 주변부적인 국가였죠. 그러나 1945년 이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지배적인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외교정책이 이렇게 형편없고 정치인들은 절망적인 엉망진창처럼 보이는 나라, 어리석음과 무능이 뒤섞인 국가가 어떻게 지금처럼 강대국이 될 수 있었을까요.
_184쪽, 4장 미국의 보수주의 외교정책 중에서
저는 트럼프 이전에 이미 세 번의 실패가 있었다고 봅니다. 첫 번째는 이라크 전쟁으로 미국의 신뢰도가 크게 떨어졌다는 점입니다. 자유주의 국제 국가로서 말이지요. 제 생각엔 이라크 전쟁은 자유주의적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패권주의적 현실주의 전쟁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위기이자 실패는 2008년 금융위기가 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적 방향으로 밀어붙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유국제주의나 이와 관련된 인물들이 했던, 중국이 자유주의 사회로 나아갈 거라는 예측이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은, 중국이 WTO에 가입하고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편입되면 서서히 개방될 거라고 예상한 것이었습니다. 중국이 민주주의체제가 될 거라고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더 다원적인 사회가 될 거라는 기대는 있었습니다. 시민사회는 자유주의적 세계질서의 운영에 있어 매우 중요한데, 저희는 중국 내부에 자유국제주의자들이 희망하는 바에 따라 중국이 협력할 수 있도록 시민들이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_229-230쪽, 5장 자유국제주의의 미국 외교정책을 위한 변론 중에서
제가 걱정하는 것은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에 계속 집착하면서 미국 본래의 장점을 약화시키는 왜곡된 정책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서로 건강한 동맹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이 동맹국의 이익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중국과의 경쟁 때문에 그들의 이익을 짓밟으면 안 됩니다. 미국은 국제 리더십에서 우위를 유지해야 합니다. 따라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중국과의 경쟁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요. 전세계 사람들에게 어필하려면 다른 누군가와 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일을 해야 합니다. 미국이 긍정적인 의제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중국과의 경쟁에서 아무리 우위를 점한다고 해도, 그 우위를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_273쪽, 6장 미·중 전략적 라이벌 관계 중에서
최근 몇 년간 미국 국내 정치의 분열이 외교정책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미국 정가에는 오래된 속설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 국내 정치나 외교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아무리 심각해도 동서로 각각 대서양과 태평양 연안에 닿으면 끝난다는 거지요. 미국 해안을 벗어나는 순간 그 너머부터는 통일된 입장으로 외교정책을 수행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말이 통하지 않고 있어요. 전세계를 상대로 한 미국의 외교정책 역시 분열된 국내 정치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지표를 살펴보지요. 최근 미국의 여론조사를 보면 55세 이상의 미국인들, 대략 제 나이대의 사람들 중 약 63%가 이스라엘을 지지합니다. 하지만 18세에서 34세 사이의 사람들을 보면 상황이 정반대입니다. 64%가 팔레스타인을 지지한다고 말할 겁니다. 인종적인 차이를 보면, 백인 미국인의 경우 61%가 이스라엘을 지지한다고 말합니다. 유색인종은 30%가 이스라엘을 지지한다고 답할 겁니다.
_306쪽, 7장 우크라이나와 가자 전쟁의 종식? 중에서
기업들이 “우리는 국가안보에 매우 중요하다. 우리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말이 진실인지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예시는 약 6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당시 미국의 양모 담요 산업은 핵전쟁이 일어날 경우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1억 5천만 장에서 2억 장의 양모 담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양모 담요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이나 다른 국가로부터 수입을 제한하면서 미국에서 양모 담요를 생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이것이 방사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것이라면서요. 저는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양모 담요가 방사능으로부터 우릴 구해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핵폭발이 일어났을 때 여러분의 머리를 가릴 수는 있겠지만요. 안타깝게도 살아남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건 일종의 넌센스입니다. 기업들이 자신들을 보호해달라고 로비하는 걸 보면 말이죠. 따라서 국가안보에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주장할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_341쪽, 8장 미국의 신경제책략과 중산층 외교 중에서
아시아 평화의 가장 강력한 원천은 이제 아무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즉 중국과 미국 간의 데탕트였습니다. 1979년에 아시아 평화가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해는 중국과 미국이 외교 관계를 정상화한 해이기도 합니다. 데탕트 이전에 중국은 혁명적인 외교정책을 전개하고 있었고, 여러 곳에서 군사적 모험을 즐겼습니다. 중국은 미국과 미국의 아시아에서의 이익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중국 인민해방군을 개혁하고 민족주의적 보복정책보다 국가 발전을 우선시하기 위해 미국과의 협력 관계가 필요했습니다. 이는 여러 아시아 국가들이 같은 시기에 했던 선택과 유사합니다. 즉, 민족주의보다 발전을 우선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데탕트는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도 자제토록 했습니다. 또한 데탕트는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적 상호의존을 촉진시켰습니다. 강대국들이 지역기구에 참여하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시아가 인도-태평양이 아니라 아시아 태평양으로 불리던 세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강대국 간의 기능적 협력 관계가 아시아 평화를 유지하는 데 다른 어떤 요인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미국 외교정책의 실질적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시아 평화에 가장 큰 위험은 데탕트를 장기적 경쟁으로 대체한 데서 옵니다. 데탕트를 없애고 장기적 경쟁을 도입한 것, 이것이 바로 인도-태평양과 그 함의를 생각하는 맥락입니다. 지역 안정성의 관점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_384-385쪽, 9장 아태 전략에서 인태 전략으로 중에서
1997년, 미국 상원은 95대 0으로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미국은 중국도 의미 있는 행동을 해야 하며 그런 참여가 보장되지 않는 교토의정서 같은 협정에 가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옆의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1990년에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중국의 배출량은 상당히 낮았지만, 교토의정서가 협상될 때쯤부터 중국의 배출량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정치는 “중국은 어떻게 하냐? 중국은 충분히 하고 있나?”라고 중국을 비난하며 그것을 핑계로 책임을 미루는 일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이 기후행동에 아무런 제한이 없는 상태에서 세계의 제조 중심지가 될 것이라는 걱정도 한몫 했습니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는 미국이 에너지 안보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더 많은 화석연료를 의미했지요. 이는 보수적인 미국 기후정치의 지배적인 담론이 되었습니다. 특히 공화당에서 강하게 나타났던 담론이지요.
_422-423쪽, 10장 기후변화, 미국 국내 정치, 글로벌 거버넌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