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특별한 여정
"수학자는 화가나 시인처럼 패턴을 만드는 사람이다"라는 영국 수학자 G. H. 하디의 말로 시작하는 《지우지 마시오》는 사진작가 제시카 윈이 전 세계 수학자들의 칠판을 통해 수학의 시각적 아름다움과 창의적 과정을 담아낸 작품집이다. 100여 명의 저명한 수학자들의 칠판을 촬영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 수학과 예술, 수학자들의 삶을 조명한다.
이 책은 단순한 사진집을 넘어 수학이라는 추상적 세계를 시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여정이다. 윈은 칠판을 통해 우리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수학자들의 내밀한 사고 과정과 창조적 순간을 포착했다. "칠판은 수학자의 집이자 실험실이고, 생각에 몰두를 허락하는 개인 공간이다"라고 윈은 설명하며, 수학과 예술 사이의 근본적 유사성을 강조한다.
이 책은 수학에 관심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창조적 사고 과정과 인간 지성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분필 가루 자욱한 먼지투성이 방 안에 감춰진 발견과 진리, 미스터리와 아름다움"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할 것이다.
"지우지 마시오!"의 의미와 철학
책 제목 "지우지 마시오"는 수학자들이 중요한 연구 내용을 칠판에 남겨두거나 잠시 자리를 비울 때 자주 쓰는 팻말에서 따온 말이다. 마루굴리스가 말한 "나는 이 부분을 몇 년째 지우지 않고 두고 있다. 워낙 공식이 복잡하기도 하거니와 매번 그 계산을 다시 쓰기가 번거롭기 때문이다"(p.110)의 경우처럼, 이 문구는 책 곳곳에 의미 있게 등장한다. 특히 중요한 발견의 순간에도 이 문구는 의미를 갖는다.
수학이 창조되는 곳이면 어디나 칠판이 등장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수학자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아마 대부분 칠판을 둘러싸고 있을 것이다. 그 앞에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훑고 토의한다. 하지만 칠판은 이내 지워지고 곧 다음 단계의 아이디어를 위한 공간이 마련된다. 이런 과정은 몇 시간씩 지속되고 결국엔 결론을 내지 못한 사람들이 이 팻말을 걸어놓고 나간다. (p.130)
수학자들이 칠판에 적어둔, 지울 수 없는 문제들은 아직 미완성일 수도, 이미 성공한 발견일 수도 있지만 모두 '기록해 둘 가치가 있는' 생각들이다. 제시카 윈은 이 평범한 문구에 의미를 더해 "수학자가 하는 일은 모든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처럼 보존되고 명예와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제목에 담았다.
칠판 위에 새겨진 발견의 순간들
수학자들에게 칠판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탐구의 흔적이며, 아이디어가 형상화되는 공간이다. 공동연구를 많이 하는 수학자들은 칠판 위에서 사고하고, 협력하며, 때로는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한다.
매튜 에머턴은 연구에서 칠판이 가지는 중심적 역할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연구를 즐기고, 실제로도 지금 내가 하는 거의 모든 연구가 공동으로 진행된다. 공동 연구자와는 다양한 방식으로 일한다. 인터넷을 통해 원격으로, 카페에서 만나 공책이나 노트북에 쓰면서. 하지만 아마 연구실 칠판 앞에 가장 많이 서 있을 것이다."(p.36)
칠판 앞에서 펼쳐지는 논의는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연구자들이 한 공간에서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실수를 수정해 나가는 과정은 마치 즉흥적인 공연과도 같다. 수학의 발견은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칠판 위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며, 연구자들의 끊임없는 토론과 협업 속에서 빛을 발한다.
현대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수학자들이 여전히 칠판과 분필을 고수하는 이유에 대해 이 책은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프랑스의 수학자 클레르 부아쟁은 "수학적 소통은 아주 강렬한 과정이다. 칠판에 쓰는 일은 수학의 언어적 소통을 확장하는 데 필수적"(p.138)이라고 설명한다. UCLA의 테런스 타오는 수학을 "운무에 둘러싸인 풍경"에 비유하며,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안개가 흩어지면서 서로 떨어진 봉우리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p.8)고 말한다. 이러한 발견의 과정이 칠판 위에서 펼쳐진다.
다양성과 열정이 공존하는 수학자들의 세계
《지우지 마시오》는 다양한 배경의 수학자들을 소개하며, 특히 여성 수학자들의 목소리에도 주목한다. 두사 맥더프, 로라 발자노, 엘렌 에스노, 크리스티나 소르마니, 앨리스 창 등 자신의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여성 수학자들의 이야기는 수학계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한국인 수학자인 오희 예일대 교수도 등장하여 "수학은 겸손을 가르친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알려주고 다양한 관점의 중요성과 그 속에 숨겨진 신비를 보여준다"(p.40)라고 수학의 본질을 설명한다.
이 책은 수학자들 특유의 유머와 열정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프랑스 수학자 에티엔 지스는 "어느날 아내를 설득해 침대 머리맡에 칠판을 걸어놓았다. 하지만 6개월 뒤, 칠판은 제 쓸모를 보여주지 못했고 침대에 분필 가루만 쌓였다. 칠판을 치우자고 하자 아내가 몹시 기뻐했다"(p.204)고 회상한다.
노스웨스턴 대학교의 니콜라스 블라미스는 "내가 성인이 되어 알게 된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모두 칠판 앞에서 공동 연구를 하며 수학 퍼즐을 함께 풀던 사람들이었다"(p.90)고 말한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벤슨 파브는 수학적 발견의 순간에 대해 "알고보니 항상 그곳에 있었던 것을 새롭게 발견했을 때의 도취감을 갈구하는 중독자가 된 기분이랄까. 수학의 진리는 우주가 존재하기 전부터 진리였으며, 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p.XI)라고 표현한다.
《지우지 마시오》는 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공감을, 수학을 낯설게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시각을 선사할 것이다. 수학의 세계는 차갑고 딱딱한 공식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호기심과 열정, 그리고 창조적 사고가 어우러진 공간이다. 분필 가루가 가득한 칠판 앞에서, 수학자들은 새로운 세계를 탐험한다. 그리고 그 순간, 수학은 예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