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2~33
물에 젖은 손을 휙휙 뿌리면서 복도로 나가자, 히노는 그제 야 마음이 놓이는지 한결 편해진 얼굴로 손수건을 내밀었다.
“자. 써도 돼.”
“괜찮아 괜찮아, 금방 말라.”
손사래 치고는 엉덩이에 손을 닦으면서 걸어가는데, 히노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화장실 쪽을 돌아보았다.
“봤지? 마치다 쟤네도 화장실에 같이 가잖아.”
하긴…… 히노 말 대로 마치다 무리는 항상 붙어 다닌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때도, 하고 싶은 것까지도 죄다 같을 리는 없는데.
저렇게 몰려다니며 뭐든지 같이 하면 불편하지 않을까. 나는 벌써 숨이 막히는 것 같다. 물론 뭐든지 나에게 맞추는 히노가 훨씬 불편할 테지만.
p.52
“그런데 있지, 나는 히노의 기분, 조금 알 거 같아.”
“안다고?”
쿵, 하고 철봉에서 내려와 다카미네를 보았다.
“응. 히노 걔, 혹시 자신이 없는 거 아닐까.”
놀랐다. 늘 억지만 부리는데다 뭐든지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하는 히노가?
“그건 아닐 거야, 얼마나 당당하게 절친이니 어쩌니 말하는데.”
“절친이라면 굳이 그런 말은 할 필요 없잖아.”
하긴……. 어쩌면 그렇게 말하는 거, 엄청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 나는 히노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다.
다시 철봉에 펄쩍 뛰어올라 앞돌기를 했다.
“나, 히노랑 진지하게 이야기해 볼게!”
p.88~89
“메구 짱, 겉으로만 친한 친구는 진짜 친구가 아냐.”
엄마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내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엄마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중요한 건, 특별한 친구야. 서로에게 뭐든 다 이야기할 수 있고,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 주고 싶다고 생각되는 소중한 친구 말이야. 그런 친구만이 진정한 친구야.”
앗…….
“너는 친구가 생겨도 헤어지면 그걸로 끝인 것 같더구나? 그건 진짜 친구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하지만, 하지만 엄마……, 나는 진짜가 아니라 그냥 친구조차 잘 안 생겨.
차마 그 말까지는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는데, 별안간 엄마가 손을 잡았다.
“서두르지 않아도 돼. 너는 잘못한 거 없으니까.”
“진짜? 진짜 내 탓이 아닌 거야?”
엄마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계속 전학 다녔잖아. 우정이란 것도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서 키워 나가야 하거든.”
p.121~122
“맹수가 있어. 그런데 맹수 조련사가 없으면 큰일이잖아.”
무슨 소리야.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난 호소카와의 말에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그거야, 바로 그거!” 하고 바보같이 큰 소리로 웃는다.
“있지, 사카마키랑 가가 말이야.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엔 네가 있어서 다른 애들이랑 별 탈 없이 지내는 거 같거든. 그런데 네가 없다고 생각해 봐, 성가신 일이 잔뜩 생길 게 뻔하잖아?”
“뭐라고?”
“너 없으면 일단 사카마키는 우물쭈물하면서 우울한 티를 팍팍 내겠지. 다른 애들이 즐거워하는 걸 보면 짜증도 날 거고. 사카마키가 그런 상황에서 얌전히 있을 성격은 아니잖아? 막 불평하면서 다른 때보다 욕도 훨씬 많이 할 거야. 난 즐거워야 할 수학여행에서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거든.”
p.125~128
“수학여행 안 가도 돼?”
“네?”
놀라서 작게 되묻자, 마리코 선생님이 미소 지었다.
“날짜가 겹친다지? 수학여행 말이야.”
“아, 네에…….”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웬일이야, 네가 망설이기도 하고? 아, 오해는 하지 마. 나는 망설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으음, 네가 어느 쪽을 선택할까 고민했다는 거잖아. 그거 나는 멋지다고 생각해.”
“멋지다고요?”
“그럼, 멋지지.”
마리코 선생님은 환하게 웃었다.
“망설이고 고민했다는 건, 그만큼 네게 소중한 것이 있다는 말이겠지?
p.153
숨기려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
비밀 사랑.
바로 나잖아! 라고.
카드를 손에 꼭 쥔 채,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올리비아가 읊은 ‘숨기려는데…….’와, 그때 마쓰이 가오리에게 들은 말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살아났다.
“그게, 사카마키한테는 마치다가 있잖아.”
“그렇게 좋아하는 거랑 사카마키가 좋아하는 건 달라.” 내가 사랑을 하는 거라고? 마치다 료코를?
“으악!” 하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p.182
“발레리나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렇게 대답하자 마치다는 내 눈을 빤히 보았다.
“아무나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도 될 수 없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될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본인이야. 남이 이러쿵저러쿵할 건 아니지. 아무리 자매라도 그렇게 단정 지을 권리는 없어.”
마치다의 말이 가슴을 콕콕 찔렀다. 나는 한 번도 스스로 뭔가를 결정한 적이 없다. 아니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그쪽이 안전하고 마음이 편하니까. 결과가 좋지 않다 해도 스스로 결정한 일이 아니라면 책임질 필요도 없다. 누군가의 탓으로 돌려 버리면 비참해질 일도 없다. 나는 언제나 불평만 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돌멩이를 던지고 있다.
p.219
“바보 자식.”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내 것이 아닌 듯한 나직한 목소리가 고막을 흔들었다.
“어?”
“다시 말해 줘? 바보 자식이라고 했다!”
가시 돋친 목소리에 나 자신도 놀랐지만 이미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네 뭐. 맨날 성가시다고 불만이면서 학원에 다니잖아? 그 잘난 엄마가 붙여 준 선생한테 과외도 받고? 헉, 부모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한다고? 그런 개소리는 집어치워!”
마게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제야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거지. 이런 말을 할 생각은 결코 아니었다.
p.241~242
깔깔거리며 웃는 엄마. 언제고 바라던 모습이다.
그런데 왜일까. 문득 불안해진다. 그건 지금의 엄마가, 지금의 생활이 어딘지 가짜인 것만 같아서……. 엄마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숨기는 것도 없다. 다만 지나치게 아등바등하고 있다. 그건 한눈에 알 수 있다.
우리 엄마는 참 연기를 못 한다.
p.254
생각해 보면 우리 마음은 잠시도 편할 틈이 없다. 사소한 것에 서운해 하고, 원망하고, 싸우고. 우물쭈물 고민하고, 넘 어지고 주저앉고, 누군가를 탓하고, 도망을 친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한다.
우리는 의외로 강하다. 의외로 터프하고, 그리고 의외로 뻔 뻔하다.
중학생이 되면, 어떤 나날이 시작될까.
앞으로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좋은 일만 있는 건 분명 아닐 거다.
하지만 나는 지금 가슴이 설렌다. 엄청. 터질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