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선포’ 방송을 보자마자 차를 돌려 여의도로 향했다. 짧은 시간 헌법과 계엄법을 샅샅이 훑었다. 수십 년간 법률가로, 또 법무부장관으로 살아왔지만 계엄법은 이번에 처음 읽어봤다. 대한민국은 율사들조차 평생 계엄법을 읽어볼 필요가 없는 나라였던 것이다.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벌어진 때일수록, 법과 규정이 중요하다. 거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계엄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물리력이 아니라, 법에 정해진 절차대로 계엄을 막아야 한다. 그래야 유혈사태를 막을 수 있다.
- 26~27쪽, Part 1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로 가다’ 중에서
나는 “이 계엄을 해제하는 장면에 우리 국민의힘이 반드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살고, 보수가 살고, 국민의힘이 산다”고 전화로 의원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본회의장에 남은 의원들 중에선 오히려 당사로 모이라는 원내 대표 공지를 보고 본회의장을 떠나 당사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고민하는 의원들이 있었다. 나는 불법계엄을 해제하는 표결에 우리 국민의힘이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 당과 보수정치는 절멸할 것이라고 만류했다. 나를 믿어달라고, 여기 남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 55쪽, Part 1 ‘국회 본회의장 상황’ 중에서
계엄 사태 후 당의 첫 번째 공식회의였으니, 계엄 사태에 대한 당 대표의 의미 있는 메시지가 필요했다. 그 시간까지 남아 있던 의원들, 당직자들의 의견을 들었다. 구체적 내용은 없이 뜬구름 잡듯 계엄 사태를 비판하는 평론가 식의 메시지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수 의견이었다. 내 생각도 같았다.
나는 박정하 당 대표 비서실장, 서범수 사무총장 등을 비롯한 의원들과 당직자들에게 내 생각을 말했다. 첫째, 이 계엄은 반헌법적이다. 둘째, 대통령이 직무수행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셋째, 대통령과 김용현 국방부장관 등 계엄을 주도한 사람들은 반드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넷째,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안보나 질서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이 생각은 이때부터 12월 14일 국회의 탄핵안이 가결되기까지 한결같았다.
- 92~93쪽, Part 2 ‘12월 4일 오전 7시 비상최고위원회의’ 중에서
CNN은 무엇보다 대통령이 2차 계엄을 또 시도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대한민국 상황의 안정성이 가장 큰 관심사인 외국 입장에서는 2차 계엄 가능성을 국내 언론보다 더욱 진지하게 접근했다. 대한민국이 예측 가능한 상황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듯했다. 나는 “걱정하는 점도 알고 있지만 단언컨대 2차 계엄은 막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이 인터뷰에서 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성숙함을 강조하려 했다. 계엄 당일과 현재의 수습 상황에 대해 객관적으로 설명하되, 짧은 시간에 여당이 나서 헌법 절차를 통해서 유혈사태 없이 계엄을 막아냈고 그것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성숙함과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란 점을 부각했다.
- 125쪽, Part 2 ‘CNN 인터뷰’ 중에서
정오 무렵 용산 대통령실에서 대통령과 배석 없이 마주 앉았다. 처음엔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참석했지만, 내가 자리를 비켜달라고 요청했다. 대통령과 단둘이 마주 앉은 것은 비상대책위원장, 당 대표가 된 후 처음이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결국 이런 자리에서 마주 앉게 되니 만감이 교차했다. 대통령은 내게 홍장원 국정원 1차장의 정치인과 법조인, 민간인 등 체포 관련 제보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정치인들을 체포하려 한 사실 자체가 없다. 홍 차장의 말은 거짓말이다. 그는 민주당과 관련 있는 사람이고 좌파와 가까운 사람이고, 그러니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 140쪽, Part 2 ‘12월 6일 대통령 독대와 방첩사령관 등 직무배제’ 중에서
직간접적으로 대통령실 관계자에게 대통령의 진의를 물었다. 그 관계자가 전한 대통령의 진의는 ‘마지막 기회를 갖고 싶다, 자진사퇴할 생각 없다, 결국 탄핵으로 가겠지만 당이 도저히 막을 수 없을 때까지 몇 번이고 탄핵을 계속 부결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는 동안 보수정치가 죽고, 국민의힘이 죽는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이 망가질 것이다. (중략)
대통령이 약속했던 것과 달리 조기퇴진할 의사가 없는 것이 확인된 이상, 2월 퇴진이든 3월 퇴진이든 질서 있는 조기퇴진 방안은 의미가 없어졌다. 결국 지난 토요일 오전의 대국민 약속은 그날 오후 탄핵안이 가결되지 않게 하기 위해 당과 국민을 속인 것 아니냐고들 했다. 대통령의 조기사퇴 약속 번복으로 그 약속을 전제로 활동한 정국안정화 TF도 흐지부지되었다. 논의 끝에 나는 대통령의 조기사퇴 거부 의사로 인해 질서 있는 조기퇴진 방안이 무산됐고, 결국 직무정지를 위해 탄핵 표결로 갈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발표하기로 했다.
-167~168쪽, Part 2 ‘대통령의 조기퇴진 방안 거부’ 중에서
부정선거 음모론으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정부와 집권 여당의 주류를 차지하거나 큰 영향력을 갖게 되면 그 해악이 너무나 크다. 역사 속에서 극단주의자들은 언제나 존재해 왔고 그 존재 자체가 위험은 아니다. 주류 정치인들이 극단주의자들을 용인하고 굴복하는 순간부터 공동체에 심각한 위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국민의힘의 일부 정치인들은 그런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나 극단적 유튜버 세력을 당권을 잡는 데 유용한 도구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그런 세력들은 도구에 그치지 않고 거꾸로 주인이자 조종자로 행세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보수정치는 망한다.
-215~216쪽, Part 3 '국민의 힘 당대표직을 사퇴하다' 중에서
윤석만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입니다. 국민과 함께 막겠습니다”라고 했죠.
한동훈 회고록에도 썼지만 비상계엄 선포를 보는 순간 ‘지금 이 순간이 나중에 되돌아볼 때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적 장면이 될 수도 있겠구나’ 직감했어요. 그렇다면 여당 대표로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당면 목표는 단 하나였습니다.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비상계엄을 끝내야 한다.’ 이를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국회 본회의를 열어 계엄 해제안을 의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계엄 해제 전후 혹시 모를 유혈사태 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위기를 잘 넘기는 거였습니다. 만약 다음 날까지 계엄이 해제되지 않았다면 수백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거예요. 당면 목표를 위해 현실적으로 해야 할 조치들이 뭔가 고민을 했어요. 비상계엄을 성공시키려는 측의 약한 고리는 무엇이고,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 평생 가장 많은 고민을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 240쪽, 한동훈의 생각, ‘역사가 말을 걸다’ 중에서
윤석만 윤 대통령과의 갈등이 시작된 건 언제부터였죠? 2024년 1월 21일 채널A가 “윤석열 대통령이 한동훈 비대위원장에게 사퇴 요구를 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유는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사건 때문이라고 했는데요.
한동훈 사실 사퇴 요구는 그전에도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사퇴 요구를 받은 건 12월 말이었어요.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으로 결정되고,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된 상태에서 형식적 절차만 남겨둔 시점이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법무부장관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실의 비서관을 통해 전화가 왔습니다. 비대위원장직을 포기하고 장관직도 사퇴하라는 요구였죠.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고요. 하지만 비서관도 설명 못 했어요. 단지 대통령은 “이유는 본인이 잘 알 거다”라고만 했다는 거예요.
한동훈 그 전화를 받고 무슨 일인지 알아봤더니 그날 조선일보 보도 때문이었어요. 여당 관계자의 멘트로 ‘김건희 여사 특검을 총선 이후에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 겁니다. 대통령이 그 멘트를 제가 한 것으로 잘못 안 것이었죠. 그런데 그 말은 제가 한 게 아니었습니다.
- 248쪽, 한동훈의 생각, ‘미움받을 용기’ 중에서
윤석만 불출마 부분이 잘 이해가질 않습니다. 비대위원장을 맡더라도 비례대표나 거주지인 서울 강남 지역구 공천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았나요?
한동훈 당시 여당의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총 80~90석 가능하다는 여론조사가 나올 때였으니까요. 저는 그런 상황에서 맡은 비대위원장이었기 때문에 희생과 쇄신이 필요하다고 봤어요. 그러려면 저부터 내려놓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윤석만 총선 불출마는 오롯이 본인 의지였다는 이야기인가요?
한동훈 제 결정이었던 것은 맞아요. 그러나 온전히 저만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윤석만 다른 누군가의 영향도 있었다는 의미군요. 혹시 대통령입니까?
한동훈 대통령이 저에게 지역구든 비례든 불출마할 것을 직접 요구했어요.
- 283쪽, 한동훈의 생각, ‘법무부장관에서 비대위원장으로’ 중에서
윤석만 어느새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정치인으로서 다음 목표가 궁금합니다.
한동훈 저는 한 번도 무엇이 되겠다, 어떤 자리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다만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꼭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들을 해왔습니다.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대한민국이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하며, 품격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기여하는 것입니다. (중략) 민주주의가 성숙하려면 중산층이 두터워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겪고 있어요.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극단적 포퓰리즘이 좌우 양쪽에서 독버섯처럼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선 상식과 합리를 갖춘 중간층이 설 자리가 없어요. 불평등의 대가는 극좌, 극우가 판치는 가짜 민주주의 사회로 추락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지정책을 더욱 촘촘하게 만들어 국민 한 명 한 명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경제는 계속 성장해야 하고요.
- 380~381쪽, 한동훈의 생각, ‘한동훈이 꿈꾸는 행복한 나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