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되었습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피를 나눴지만 서로에 대해서 아는 건 한 가지도 없군요. 알고자 하는 노력도 없이.
태어나서 제가 제일 많이 강요받았던 것은 동정심이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보다 부모를 불쌍히 여기라는 말. 그것은 절대적이었으며. 영영:
끝나지 않을 주기도문 같았습니다.
―「15-71007128」 중에서
지나간 애인에게는 멋진 선물을 주고 싶었다 부끄럽지 않은 선물이고 싶었고, 그게 시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시는 부끄러웠다 여름날 편히 누울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여름날의 기억으로 살다가는 아무 계절에도 살지 못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따져 볼 일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날을 떠올리면 좋은 날은 떠오른다 그 기억으로 평생을 팔아 치울 수도 있다 내가 믿는 천국이란 물구나무선 채 하얀 출발선을 재빠르게 지나가는 것이다
―「프리즘」 중에서
새장을 매달았다
새장 앞에서 넘어졌다 이곳은 세로가 더 길지만 가로가 세로보다 열등하단 말은 아니다 직사각형은 다른 한쪽의 협조가 있기에 태어난 모양일 수 있다
천장엔 녹슬고 빈 새장이 모빌처럼 매달려 있다 새를 들였다 단지 펭귄을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저 새의 이름은 펭귄이다 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펭귄은 펭귄을 본 적 없다 세종기지를 알 수 없다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연쇄」 중에서
오렌지를 손에 쥐고 망설였다 거실은 햇빛으로 가득하다 너는 다롄에 가기 위해 필요한 옷가지들을 챙긴다 언제 돌아와? 네가 죽으면 그럼 영영 돌아오지 않겠군
―「오렌지」 중에서
문장의 한가운데에서
사랑하고
웃고 떠들고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믿음에 한해서 봄날에는 상주복을 입고 조문객과 인사를 나눴다 한때는 진심으로 나의 행복을 빌어 주는 이가 있었다
그가 빌 때마다 불행한 일이 생겼다
―「청사진」 중에서
수는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나보다는 어른 같다. 우리는 자주 합정에 간다. 좋아하는 카페가 합정에 있다. 이 소설의 결구는 이렇게 적어 내고 싶다. “나는 평생 동안 이번 여름을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소설 또한 사랑에 관한 소설이다.
―「여름을 적거나 여름을 적지 않는다」 중에서
이제는 내일에 와 있어요
준과 조제는 내일에 와 있습니다
모레 글피에 있어요
준과 조제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어요
아침에는 아침을 먹을 수 있어서 좋고요°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도 괜찮아요!
3초만 생각하면 돼요
조제를 데려왔던 그날처럼 말이에요
―「반려」 중에서
그래도
태어나서 너랑 노는 게 제일 재밌었다
시간 많이 지났으니까
영원할 시간 속에서
서로를 잘 떠나보내자
그날이 오면 가위바위보
내가 다 져줄게
서울 눈 많이 내린다
―「392314012225」 중에서
료하는 일을 할 줄 모른다 료하는 료하를 고용한 사장에게 이상하고 느리다는 말을 듣고 해고되었다 나는 집으로돌아온 료하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다가 료하의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궁금해졌다 료하는 지나치게 큰 눈망울과 옹졸한 입술을 가졌다
료하는 옹졸한 입술로 하여금 잘도 사랑을 말하곤 한다
―「료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