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삶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들을 포착하며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는 강지영 작가의 장편소설 『하품은 맛있다』가 ON 시리즈 서른두 번째 이야기로 출간되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두 여자의 일상이 꿈속에서 얽히며, 상처와 욕망으로 얼룩진 비밀을 향해가는 이 소설은 속도감 있는 전개와 멈출 수 없는 몰입감으로 독자 여러분의 시간을 빼앗을 예정이다.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소설의 세계 속에서 하나하나 실타래를 풀어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살해 현장을 청소하는 가난한 여대생 ‘이경’
여대생 이경은 평범하다. 작은 키, 못생긴 축에 속하는 얼굴, 넉넉지 않은 가정환경, 쓰러져 입원한 아버지, 병간호로 집에 잘 오지 않는 어머니……. 이경이 가졌거나 그녀 주위의 것들은 조금도 눈에 띄지 않는, 오히려 쿰쿰하고 어둑어둑한 것뿐이다. 아, 특별한 게 하나 있다. 그녀의 아르바이트. 이경은 특수청소 업체에서 일한다. 자살했거나 살해당한 사람들의 집에서 핏자국을 지우고 시체를 거두며 돈을 번다. 이십대 초반의 청춘을 누구보다 피폐하게 그려나가는 중이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욕조에서 죽은 여자의 집을 청소했고, 피가 온 천지에 튄 욕실과 다르게 환하고 단정하게 꾸며진 집 안을 살펴보며 약간의 기묘함을 느꼈을 뿐이다.
원룸에 어울리지 않게 가구와 침구 모두 견고하고 고급스러웠다. 침대 앞에 얌전히 벗어놓은 양털 슬리퍼, 순백의 이불, 책장에서 쏟아져 나온 기욤 뮈소와 알랭 드 보통의 컬렉션들, 헤벌어진 샤넬 퀼팅백, 구둣발에 뭉개진 코랄 컬러 립스틱이 여자의 취향을 설명했다. 남 사장이 방바닥에 구겨놓은 아이보리색 러그를 들어 올렸다. 한가운데에 검게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12쪽)
여자의 침대 아래에는 수십 개의 스노볼이 있었고, 이상하게 하나의 스노볼에 끌림을 느낀 이경은 야구공만 한 스노볼 하나를 챙긴다. 그 속에는 두 소녀가 하나의 목도리를 두른 채 잠들어 있었고, 흔들면 눈이 내리듯 새하얀 입자가 날렸다.
그 집 청소를 마치고 돌아온 날, 이경은 이상한 꿈을 꾼다. 꿈속의 이경은 고급스러운 집에 살았고, 늘씬하고 빼어난 외모를 갖췄으며, 세련되고 우아한 엄마를 가졌다. 깨고 싶지 않은 달콤한 꿈이었다.
학벌 미모 재력 모두 갖춘 연예인 지망생 ‘다운’
여대생 다운은 화려하다. 큰 키와 마른 몸매, 손바닥만 한 얼굴과 도자기처럼 희고 매끈한 피부를 가졌다. 명문대에 재학 중이며, 그녀의 장래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 재력가 부모도 있다. 인기가 많아 이성의 연락이 끊이지 않고, 연예인이 되고 싶은 자신의 미래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친구도 있다. 모자랄 것 하나 없이 완벽한, 밝고 상쾌한 기운만을 가진 듯하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피부 관리와 쇼핑을 위해 집을 나서던 그녀는 자신의 엄마에게 이상한 꿈을 꿨다고 말한다.
“내가 키 작고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가 되는 꿈. 웬 아저씨들이랑 어딘가 몰려가서 억세게 청소를 했어. 왜 예전에 우리 잠원동 살 때 사거리 행운아파트 기억나? 베란다에서 그 아파트 103동이 보이는 집이었어. 방 안엔 죽은 개가 있고, 더러운 이불에 핏자국도 보였어. 설거지거리도 산더미 같았는데, 고무장갑에 구멍이 나서 맨손으로 다 했다니까.” (27~28쪽)
달콤한 꿈을 꾸던 이경은 꿈속에서 별안간 정신을 차렸다. 다운이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하는 악몽은 자신의 일상이었다. 억척스러운 이경의 현실은 다운에게 있어 끔찍한 악몽이 되고, 윤이 나게 빛나는 다운의 현실은 이경이 잠들면 펼쳐지는 깨고 싶지 않은 꿈인 것이다. 이경은 꿈을 통해 다운의 과거를, 다운은 이경의 미래를 체험하고 있었다.
오직 꿈속에서 이뤄지는 전혀 다른 두 여자의 수상한 동거
며칠 뒤 출근한 이경은 사무실에서 누군가의 주민등록증을 발견한다. 볼록한 이마, 크고 청신한 이목구비, 윤기 흐르는 긴 생머리……. 낯익은 그 얼굴은 다운이었다. 캐비닛에는 다운의 일기가 적힌 스프링 노트가 있었고, 그것은 매일매일 새로 적히는 내용이 존재했다. 다운의 꿈에 등장한 이경의 이야기도 있었다. 문제는, 이것들이 모두 얼마 전 청소를 다녀온 여자의 유품이라는 것. 그러니까 죽은 여자가 이경의 꿈에 나온 거였고, 놀랍게도 그녀의 일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새로 적히고 있는 것이었다.
여자의 집 청소 의뢰를 받은 건 임 대리라는 남자였는데, 그는 이경의 꿈에, 그러니까 다운의 현실에 존재하던 사람이었다. 다운의 친구의 애인이자 다운이 몸담았던 연예기획사 직원이었다. 그리고 이경은 청소 업체 사장으로부터 임 대리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은 적도 있다.
과연 다운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고, 임 대리는 이 일에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그리고 이경의 꿈에 다운이 계속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다운의 꿈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경은 무의식을 넘어 의식마저 통제되는 상황에 이르고, 이 꿈결 같은 현실이 사실은 모두 설계된 것임을 알게 된다. 두 여자의 얽힘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 이 판의 설계자는 누구일지, 그는 결국 무엇을 얻고자 이 일을 벌인 것인지 알고 싶다면 이 고요한 듯 보이는 스펙터클 속으로 진입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