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나와 쓰는 나 사이 슬픔에도 시차가 있다는 이야기로 들었어. 어떤 중요한 장면에 우리는 늦는다. 띄엄띄엄 돌아가서 기록한다. 사월이 만드는 음악도 비슷할까? 조금은 위태로운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사랑이, 무대에서 가능해지는 용기가 있다고 믿게 됐다. 16p
나는 훤이 네가 우는 남자라서 좋다. 남성 해방은 눈물로부터의 자유에서 시작될 수 있을지도 몰라. 좀 짓궂은 것 같지만, 둑이 무너지듯 울 수 있는 네가 좋다. 결국은 무너졌으면 해서 부드럽게 경계를 쌓아 둔 거 아니야? 넘쳐흐른 눈물이 너의 글과 사진과 생의 기쁨으로 흘러갈 걸 생각하니 눈물이 단비 같다. 19p
무대에서 말을 많이 한 날은 집에 와서 유독 조용해져. 사월이도 말하거나 소리 내지 않고 발화하고 싶은 기분이 가끔 드니? 31p
사랑하는 사람이 잠들어 있는 그 가련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나는 강해질 수 있을까. 강해지는 게 두려워서 매번 도망치는 건지, 강해질 마음도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역시 혼자가 되었고 그게 좋더라. 나 하나만 책임져도 되는 삶의 편리함과 고독이 좋은 거겠지. 지금 사랑을 하는 너를 보면 경외감마저 든다. 55p
사진이 우릴 어디로 데려갈지는 사진가도 모른다. 읽는 사람도 모른다. 확실한 건 어떤 사진을 만나고 나면 우리는 조금 달라져 있다. 만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계속 미지와 우연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만든다. 60p
공연은 휘발되기에 정말 중요한 말을 해버리고 싶어진다. 증발할 것을 알고 진짜 마음을 말하는 기분. 남겨질 만한 순간에는 오히려 숨고 싶어지는 마음을 너는 알겠지. 네가 나를 기록해 주어서 나의 어떤 부분이 죽지 않게 된다. 글로 사람을 살린다는 게 별거일까. 남겨 주어서 고맙고 살려 줘서 고마워. 88p
너도 노래 듣다 그럴 때 있니, 사월아. 살고 싶다고 느낄 때. 살고 있는데, 살고 있는데, 사무치도록 살고 싶을 때. 모든 것으로부터 구제된다고 느낄 때. 책상 밑에 깊숙이 숨겨 둔 결함들이 잠시 부끄럽지 않다고 느낄 때. 101p
너는 정말 이미지를 찾는 사람이구나. 얘기를 들으니까 너는 이미지적인 것을 재밌어하고 나는 이야기적인 걸 재밌어한다는 생각이 들어. 141p
스스로에게 좋은 걸 많이 먹이고 나를 거의 죽음으로 내모는 풍경 앞에도 나아가며 살자 친구야. 라디오도 가끔 듣고. 두려워하면서.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어떤 날은 눈물이 질질 나는 대로 흘러내리게 두면서. 173p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천천히, 네 눈으로, 너를 지나간 사람의 눈으로, 그리고 다시 날 통과하는 눈으로 이제껏 본 것들을 다시 봤다. 편지는 세계를 다시 읽는 지침서 같은 거니까. 이 책은 둘이서 쓴 세계에 대한 일지이자 서로에 대한 목격담이고 자신에 대해 쓴 보고서다. 더 많은 타인에게로 향하는 광야의 우정이기도 하다. 그런 우정을 오래 원했다. 218p
그때 네가 나를 찾았다는 게 난 너무 기뻤어. 그래서 두고두고 슬프다. 감히 네 아픔을 조금 알 것 같아서. 비슷한 통증을 겪었던 나의 냄새를 맡고 너는 몇 번이고 나를 찾았던 거지. 네가 나만큼, 아니면 나보다 더 아팠을 거라 생각하면 난 네가 너무 불쌍하다. 22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