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대기업 상무지, 큰딸은 그렇게나 합격하기 어렵다는 스튜어디스지. 작은딸도 착하잖아, 성실하고.”
미소 짓던 선경은 입을 다물었다. 좋게 나가다가 갑자기 작은딸 이야기를 꼭 집어넣는 것은 진주 엄마의 심술일 게 분명했다. 작은딸인 민영은 가까스로 ‘인서울’은 했지만 일명 ‘스카이’라 불리는 대학들에는 지원서도 넣어보지 못했다. 매 학기 장학금을 타오긴 하나 선경은 ‘그 정도’ 학교에서 ‘그게’ 자랑스러울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민영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선경은 두 딸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 민영이 ‘좋은’ 학교에 다니고 있진 못해도 취업만은 떳떳한 곳에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_150쪽, 「살煞」
수영은 벌써 한 달째 원인 모를 열병에 시달리고 있다. (…) 병원도 여러 군데를 가봤지만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해열제를 포함한 어떤 약도 도통 듣지 않았다. 수영은 머리도 깨질 듯이 아프다고 했다. 일어나면 너무 어지러워서 부축 없이는 걸을 수 없는 정도가 됐다.
“우울증일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다녀온 신경과에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선경은 얼마나 불쾌했는지 모름다. 수영은 평소 밝은 아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감이 남달랐다. (…) 그랬던 수영에게 우울증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_152쪽, 「살煞」
“정신과 말이야.”
그 소리를 듣자마자 선경이 포크를 탁,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우리 수영이가 정신병이었으면 좋겠어?”
“뭐? 그런 말이 아니잖아.”
옆에서는 민영이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선경은 눈을 꾹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나직이 말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현혹되지 마. 애가 오랫동안 비행하다 보니 지쳐서 그래. 내가 다른 병원 알아볼 테니까 그런 소리 마.”
남편은 긴 한숨을 내쉰 뒤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_157쪽, 「살煞」
“엄마한텐 언니만 최고잖아.”
“…뭐?”
민영이 선경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크게 뜬 눈이 희번덕거렸다. 민영의 눈동자에 분노와 서러움이 섞여 일렁거렸다.
“내 말이 틀려? 우리 수영이, 우리 수영이, 맨날 그러잖아. 언니만큼만 하면 된다고 한 적도 있지? 난 그래서 맨날 언니를 따라 해야 했어. 집에서 TV 한 번 내 맘대로 튼 적이 없어. 언니처럼 책을 봐야 하니까! 언니처럼 나는 웃을 때도 조용히 웃고, 공부도 잘해야 돼. 왜냐하면 엄마한테는 그런 딸만 최고니까!”
선경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체 민영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선경에게 자신의 잘못을 꼬집힌 민영은 지금 선경의 잘못을 꼬집고 있었다. ‘편애하는 엄마’라는 잘못을.
_166쪽, 「살煞」
선경은 수영을 방으로 보내고 남편에게 다가섰다.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느냐고, 대체 언제부터였느냐고, 그년은 어떤 년이냐고, 당장 앞장서라고 조용히 뇌까렸다. 가슴은 터질 것 같았지만 소리 지를 수는 없었다. 너무 늦은 밤이었고, 이 말들은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됐다. 남들이 보기에 선경의 집은 완벽한 가정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수영이나 민영이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었다. 선경은 자신을 부러워하던 여자들의 눈빛이 어떻게 바뀔지 상상조차 하기 두려웠다.
_176쪽, 「살煞」
그녀는 다시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밖으로 나갔다. 선경을 뱉어 낸 집의 불이 훅, 꺼졌다. 선경이 디딘 골목에는 어둠이 가득했다. 선경은 어둠 속을 걷기 시작했다. 가슴이 균열되는 것이 느껴졌다. (…)
‘아니다.’
선경은 생각했다. 완벽한 가정에 균열이 생긴 지는 이미 오래됐다. 다만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덮어놓은 것뿐이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_196~197쪽, 「살煞」
바로 택시가 출발했지. 그 순간, 나는 아차 싶었어.
전화번호! 전화번호를 안 받은 거야. (…)
기사님을 부르려는 순간이었어. 택시 옆으로 휙 뛰어오는 형체가 보이더니 열린 창문을 통해서 뭔가가 날아왔어. 그건 정확히 내 허벅지 위에 안착했지. 휴대폰이야. 본인도 연락처를 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야. 아직 속도를 완전히 높이기 전인 택시를 따라잡아서 창문 안으로 자기 휴대폰을 투척한 거지.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다봐. 남자가 헉헉거리며 택시를 보고 있어. 여전히 옆구리에서는 강아지가 덜렁거려.
나는 결국 소리 내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지.
_21쪽, 「반려, 너」
나는 호두의 목에 내 얼굴을 파묻고 마구 문질러. 호두의 털은 살짝 따갑지만 호두의 몸은 아주 따뜻해. 살짝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나. 역시 호두라는 이름을 아주 잘 지은 것 같아. 여기까지는 평소와 똑같지만 내 머릿속에 금세 다른 생각이 끼어들어.
내일 그녀를 볼 수 있어.
내일도 오늘처럼 음악을 듣고 있을까?
내일은 그녀의 귓가에 흐르는 음악이 뭔지 꼭 묻고 싶어.
그녀를 떠올리자 왠지 모르게 심장이 뛰어.
_27쪽, 「반려, 너」
내 손에 든 꽃다발을 본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져. 왜 안 그러겠어. 꽃집에서도 창업 이래 이렇게 큰 꽃다발을 만들어 본 적은 없다고 함박웃음을 지었을 정도인데 말이야. 뭐? 곤란해? 무슨 소리야? 내가 그녀를 위해 이렇게 준비했는데? 이게 얼마짜리인지는 알아? 곤란한 게 아니라 놀라고 쑥스러워서 저런 얼굴인 거지. 잘해주는 걸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 있어? 이 모임이 끝나면 갈 식당도 이미 다 준비해 놓았다고.
기분이 안 좋은 건 내 쪽이야.
_37쪽, 「반려, 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내가 오늘 그녀를 위해 대체 얼마를 쓴 줄 알아?
_45쪽, 「반려, 너」
화면을 켜자마자 기겁했어. 나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막아. 그 사이로 신음이 흘러. 부재중 전화 148통. 문자 47개.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 온 신경이 빳빳하게 서는 기분이야. 순식간에 입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
공원에서 만났던 친절하면서도 위트 있던 모습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면모야.
나를 공포로 몰아넣은 그의 마지막 문자를 읽어줄래?
내 눈에 한 번만 띄어. 온 몸을 태워줄 테니까.
_46~47쪽, 「반려, 너」
꽃을 보낸 것에는 다른 이유가 없어. 거기 적힌 그대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 잠시 그녀는 화가 난 것뿐이야. 사소한 일 때문에 헤어질 수는 없어. 그건 그녀도 분명 후회할 일이니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지금부터 우리는 사귀는 거야, 하고 고지를 해야 꼭 연인인 건 아니라고. 정인 씨는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어.
_54~55쪽, 「반려, 너」
깜박거리는 시야에 아까 만났던 형사의 모습이 떠올라. 흥미롭게 흘깃거리는 주민들의 시선과 너의 얼굴까지.
그 눈빛은 하나같이 말하고 있었어. ‘그러게 왜 그런 놈을 만났어?’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함부로 여지를 줬어?’
_67쪽, 「반려, 너」
흰 가루. 분명 지하철을 탈 때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다시 꺼낸 표에는 묻어 있었다. 그렇다면 지하철 안에서 누군가가 준구의 주머니에 흰 가루가 든 봉투를 넣었다는 계산이 나왔다. (…)
왜 나인가? 왜 지혜인가? 그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준구는 테이블에 올려진 흰 가루 봉투를 응시했다. 이것 때문이었다.
“이, 이거 뭡니까?”
_90쪽, 「준구」
준구가 주저하는 순간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등줄기의 신경이 꼿꼿이 곤두섰다. 지혜의 목소리였다.
“뭐 하는 겁니까!”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말이야.”
“합니다. 하겠습니다. 제발 우리 지혜만큼은….”
“이제야 말귀가 통하는군.”
남자가 다시 웃었다. 준구는 심장이 죄는 듯 고통스러웠다. 문득 옆을 봤다. 아내의 얼굴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지혜를 무사히 돌려받아야 한다. 아내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남자가 준구에게 지시를 내렸다.
_95쪽, 「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