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희태가 죽는다면, 민아는 아비를 살해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였다. 딸을 살인자로 만들지 않으려면, 희태를 살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볼펜을 움직여 내 이름을 적고, 글씨체를 조금 흘려 서명했다. 의사는 수술동의서와 볼펜을 빼앗듯 품에 안고, 다시 환자들 틈으로 사라졌다. (68쪽)
어느 동화에 나오는 소년처럼, 지완이 머뭇거리듯 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 계산대에 올렸다. 그의 손에서 나온 건 여섯 알의 버찌 씨가 아닌 분홍 색지로 포장된 핸드폰만 한 상자였다.
“밸런타인데이 때 과자 값 안 받았잖아요. 갚으러 왔어요.”
벗겨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게 아까울 만큼 포장지는 도톰하고 고급스러웠다. 분홍색 바탕에 그보다 짙은 체리색 라넌큘러스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내가 포장 벗기는 법을 몰라 허
둥대자 지완이 손을 뻗어 가장 작은 면에 빨갛게 솟아난 마감용 실을 당겨주었다. 포장지와 같은 디자인의 틴케이스가 드러났다. 그걸 열어보니 잘 세공한 루비처럼 빨간 사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진한 복숭아향이 퍼져 나갔다. (88쪽)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그가 앞가슴 호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나는 조용히 그를 비켜 화장실 문을 열고 슬리퍼를 신었다. 타일에서 뿜어내는 선뜩한 기운에 소름이 돋았다. 라디에이터 아래 빨랫비누와 빨래판이 보였다. 세면대에 물을 받아 걸레를 헹구고 비누칠을 했다. 찰박찰박 물소리 사이로, 고요한 숨소리가 섞여들었다. 잿빛이 나던 땟물을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헹궈내고 걸레를 비트는데, 화장실 문이 빼꼼 열렸다. 문지방 위에 직사각형의 흰 종이가 놓이고 다시 문이 닫혔다. 지완의 명함이었다. 나는 그것이 불온선전물이라도 되는 양,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호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고 문짝에 기대어 불규칙하게 들랑거리는 숨을 골랐다. 등 뒤로, 누군가의 거친 심장 박동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102~103쪽)
옛날 애인일까, 하지만 어젯밤 들은 지완의 첫사랑은 교회에서 만난 한 살 연상의 키가 작고 통통한 성악도였다. 파리한 낯빛의 여자는 지완에게 목례를 하곤 오른쪽 어깨를 조금 내려 숄더백에서 기차표를 꺼내 지완에게 건넸다. 그걸 받아 드는 지완의 뒷모습이 간신히 형태만 유지한 유적지의 석탑처럼 아스라해 보였다.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와 지완의 눈빛이 한곳에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단 걸 느낄 수 있었다. (116쪽)
주먹을 날리는 대신 쇠젓가락을 라이터 불에 달궈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허벅지나 등허리, 팔뚝 같은 곳을 지졌다.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바로 옆방엔 민아가 있고, 욕실을 쓰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일층을 들락거리는 지완이 신경 쓰였다. 뭣보다 더는 이런 방식으로 희태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고통에 몸부림치는 어린 소녀였다. 십여 년 전 그날처럼 그렁그렁한 눈으로 목숨을 애원하길 바라는 거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의 뒤틀린 욕망을 외면했다. (119~120쪽)
시커먼 물속을 잠영하다 숨이 가빠서야 자신이 포유류란 사실을 깨닫고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고래처럼, 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야 내가 여자란 사실을 실감했다. 지금껏 지완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아 있는 힘껏 밀어냈다. 그의 일생이 지금처럼 단조롭고 안온하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지완은 자신에게 보장된 평화를 깨고 스스로 전장에 뛰어들었다. 내겐 사선을 함께 넘을 전우가 생긴 거였다. 둘 중 하나라도 빗발치는 총알 세례를 피하려면 절대로 서로의 손을 잡아선 안 되었다. 혹여 잡는다 하더라도 걸음이 더딘 쪽이 먼저 놓는 게 마땅했다. 그런데 지완이라면 끝내 내 손을 놓지 않고 성큼성큼 사선을 넘어 아무도 찾지 않는 세상 끝으로 데려다 놓을 것만 같았다. 그를 생각하자 생목 같은 그리움이 가슴을 벅벅 긁었다. (195쪽)
“가요, 천 길 낭떠러지든 해변 오두막이든 세상 끝이든.” (198쪽)
나는 보일러실 공구함에서 청테이프 한 토막을 앞니로 잘라내 희태에게 돌아왔다. 희태가 필사적으로 성한 팔과 다리를 움직여 이층으로 향한 계단을 올랐다.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다가가 그의 바지 뒤춤을 잡아당기자, 중심을 잃은 몸이 뒤로 발랑 나자빠지며 사지를 허우적거렸다. 나는 희태의 가슴에 올라앉아 발뒤꿈치로 팔뚝을 찍어 누르고 그의 입에 청테이프를 붙였다. 그러고는 숨을 고르며 몸을 일으켜 주방 한구석에 앞치마를 걸고 서 있는 원목 옷걸이를 끌고 왔다. 희태가 막힌 입으로 ‘읍, 읍’ 하며 두 눈을 홉떴다. 그의 성한 왼팔을 향해 옷걸이를 휘둘렀다. 첫 방은 어깨를 맞았고, 두 번째는 손목, 겨우 세 번 만에 그의 팔뚝이 각도를 흩뜨리며 풀썩 꺾였다. (227~228쪽)
“민아보다는 민아네 엄마가 분위기 있었죠.”
연향역 광장에서 본 여자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가느다란 몸매에 가무잡잡한 피부, 앙상한 어깨 위를 찰랑거리는 단발머리, 팔을 하늘로 뻗고 발장구를 치면 포르르 날아올라 하늘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것 같던 묘한 분위기의 여자. 뜨거운 감자에 입천장이 데었는데, 이상하게 아무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237쪽)
사랑은 차창에 흐르는 풍경과도 같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 볼 수 없지만, 길이 끝나지 않는 한 비슷한 풍경은 쉬지 않고 이어진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절, 지완의 차창엔 성에가 끼고 김이 서리고 빗물이 튀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그는 손톱을 세워 성에를 긁고, 소매를 당겨 김을 닦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빗물을 피하느라 그 아름다운 풍경을 모두 놓쳤을 터였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을 때, 비로소 지완은 서두르거나 당황하지 않고 지켜보는 게 즐거운 여행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리라. (275쪽)
레일 꼭대기에 올라서자 연향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모래알 같은 사람들이 운명과 운명을 부딪치며 서서히 마모되어가는 한 줌의 세상, 그 안에 우주신이 있고, 죽은 연인의 무덤이 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과 시들어가는 청춘이 서로의 모난 자리를 쓰다듬고 매만지며 와글거렸다. 정상에 올라 잠시 머뭇거렸던 열차가 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기묘한 화음을 이룬 세 가닥의 비명이 레일을 달린다. 울음이라 해도 좋고, 웃음이라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소리였다. 거의 황홀한 순간이다. (2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