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 닿아야 아이슬란드는 보여줄 것이다. 당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을!
그런 쓸데없는 것들은 여행 중에는 대부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여행이라는 시간, 주어진 하루하루의 시간은 느리고 또 빠르게 흘러갔다. 아침에 눈을 떠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는 순간부터 일상은 이내 여행이 된다. 몸이 조금 무겁고, 머리가 조금 아픈 것 같아도, 창밖을 바라보며 낯선 곳에 있다는 걸 체감한 순간 괜찮아, 나는 지금 여행 중이니까. 하고 생각한다. 나지막이 소리 내어 말해본다. “나는 여행 중이야.”
조용히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흥이 채 가지 않은 채로 잠에 들고, 미세한 숙취와 함께 다음날 여정을 이어가는 일은 이제 원치 않았다. 작은 수첩을 꺼내어 그날의 기분을 적어보기도 하고, 구글 지도를 열어 우리가 지나온 자리를 되짚어보기도 했다. 제이와 나란히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서로의 마음을 들어보기도 하면서.
한국에 가면 분명 이 별거 아닌 것 같은 핫도그가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그때를 대비하여 아이슬란드 특제 핫도그 소스를 사 오는 것도 방법이다. 보너스마트에서 ‘pylsusinnep’라고 쓰인 핫도그 머스타드와 아이슬란드식 레물라드와 케첩, 크리스피 어니언까지 구매 가능하다. 여행 첫날 핫도그 재료들을 미리 사두고, 숙소에서 틈틈이 만들어 먹는 것도 하나의 팁이다.
링로드를 한 바퀴 돌며 차창 밖 풍경만 감상해도 좋은 게 아이슬란드라지만, 한편으로는 특별한 경험을 사서 고생해 봐도 좋은 곳이 아이슬란드이다. 불과 얼음의 땅이라는 이름을 온전히 느껴보자. 하루쯤은 빙하를 오르며 세상을 내려다보자.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작고 연약한 나를 품어주는 세상은 얼마나 크고 또 아름다운지, 십분 느낀 하루였다. 그렇게 아이슬란드는 나를 품어 안았고, 나는 불과 얼음의 땅 아이슬란드를 끌어안았다.
하이킹은 순조로웠다. 몇 걸음에 한 번씩 휙휙 바뀌는 신비한 풍경에 자꾸 멈춰 섰을 뿐. 뾰족하게 내리꽂는 햇살과 적당한 온도로 불어오는 바람이 더없이 포근했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익숙해지기는커녕 매번 새롭고 낯설게 다가오는 이 작은 행복감을, 오래오래 간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드넓은 들판의 끝은 절벽이었고, 그 절벽 아래에는 짙푸른 바다가 철썩이고 있었으며, 하얀 북극 제비갈매기들은 깍깍거리며 영역표시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아래 띄엄띄엄 박힌 작은 오두막집 중 하나가 오늘의 집이었다.
바스락거리는 발걸음 소리 외에는 숨죽인 사람들의 기쁨과 놀라움 섞인 탄성만 들릴 뿐이었다. 오로라 사진을 수도 없이 접했지만,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한 광경은 감동이었다. 황홀했다. 찬란했다. 우리는 서로 포옹했다. 차가운 아이슬란드 공기에서 자작나무 향이 났다.
아이슬란드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살아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엔 한 달쯤 고립되어도 괜찮겠다고. 울 스웨터를 입고, 세계 각지에서 오는 여행자를 맞는 일이 내게도 와준다면, 바로 여기 웨스트피오르드의 작은 어촌마을, 듀파빅일 거라고.
나에게 여행은 휴양지에서 누리는 휴식이나 맛있는 걸 먹으러 떠나는 탐방이 아니다. 생각 과잉을 잠시 멈추기 위해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일상을 살아보는 것이다.
이래서 아이슬란드를 우주 같다고 하는구나. 드넓은 땅, 사막같이 펼쳐진 땅 곳곳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하늘은 파랗고, 황무지 같은 땅은 회갈색을 띠고 있다. 허연 연기가 여기저기서 솟아오르는 모습은 흡사 거대한 지구 생명체가 숨을 쉬는 듯한 모습이다.
여행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연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나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 겸손해지는 마음, 언제 어디서 자연으로 돌아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마음을 단단하게 하는 일이겠다.
유독 걱정이 많은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행지에서는 걱정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24시간 내내 행복하기만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걱정을 하고야 마는 멍청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어떤 일에 푹 빠진 순간만큼은 그냥 걱정도, 행복도, 아무것도 모르겠고, 그냥 빨리 오로라야 나와줘, 하는 마음으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니까, 이런 게 바로 내가 바란 여행일까, 모험일까, 노동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잠시 웃다가 하늘을 보다가, 다시 오들오들 떨다가 발견해 버리는 것이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오로라를!
아름다운 걸 보다가, 그에 대해 나중에 생각하다가, 나중에 나중에 눈물이 날 만큼 벅찬 감동을 다시 느끼기도 하는 걸 보면, 여행하다 만나는 장면 장면을 통해 나를 만나는 것 같다. 인생을 배운다. 머릿속에, 가슴속에 남은 뜨거운 걸 안고 계속 살아가는 거다.
아이슬란드에 챙겨간 것 중 하나가 필름카메라였다. 나와 조금 닮았다고 여겼다. 고장 난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사진 절반이 흐리멍덩하게 나왔지만 괜찮았다. 뜨뜻미지근한 결과물을 보며 그 시간을 추억했다. 더 좋은 카메라로 찍은 더 좋은 사진들보다 마음이 기울었다.
겨울 아이슬란드 여행이라고 해서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간 추위가 무섭다는 이유로 겨울 여행을 이제야 해본 것을 후회할 정도였다. 겨울이 이렇게 아름다웠다니,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뭐냐고 물으면, 당분간 겨울이겠다. 역시 인생은 모험이다. 일단 떠나보자. 걱정은 용기로 변해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