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처음에는 컴퍼스로 했어요. 5학년 때였죠. 팔에 선을 그렸어요. 친구와 경쟁을 했거든요. 피가 나게 하려고요. 그리고 서로 피를 섞자고 했죠. 피를 나눈 의자매 말이에요.”
마르고는 마치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 친구는 지금도 만나니?”
“아니요, 죽었어요.”
소뵈르의 표정을 본 마르고가 다시 이죽거렸다.
“아, 농담이에요. 이사 갔어요.” (p.17)
“뭐가 불가능하지?”
“여자아이가 아니게 되는 거요.”
“여자아이가 아니었으면 한다는 거로구나.”
“남자아이가 되는 게 낫지 않아요?”
엘라는 확인을 기다리듯이 소뵈르를 바라보았다.
“남자아이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해?”
“상상 속에서 전 남자아이가 돼요.” (p. 37)
“세상에, 바깥 날씨가 정말 춥구나. 아프리카 너희 집이 훨씬 낫겠어.”
니콜이 주방에 들어서며 말했다.
“전 아프리카 사람이 아니에요.”
폴에게 줄 그림을 그리던 라자르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나? 넌 흑인이잖아.”
“맞아요. 그런데 전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거긴 태양이 없어?”
니콜은 항상 남의 말을 꺾어 누르는 버릇이 있었다. (p. 45)
라자르는 아빠가 서류 작업을 위해 진료실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검색창에 ‘캥드부아’라고 입력했다. 구글은 친절하게도 ‘캥부아’라고 검색할 것을 권했고, 그 결과 아이는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누군가를 저주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 꾸러미를 캥부아라고 부른다. 꾸러미는 관 모형, 죽은 개구리, 다리를 묶은 검은 닭 등 다양한 요소로 구성된다. 집 문 앞 등 저주의 대상이 지나갈 장소에 배치하며, 만일 그 사람이 캥부아 위로 걸으면 저주에 걸리게 된다.” (p. 53)
일요일 저녁, 소뵈르는 가뱅이 노트북을 껐는지 확인하고 돌아와 협탁 서랍을 열어 크라프트 봉투에서 결혼식 사진을 꺼냈다. 가끔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언젠가 라자르가 엄마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 할 거라는 생각에 그럴 수가 없었다. 라자르가 사진을 보고도 에블린에 대한 질문 말고는 통 말이 없어 놀라긴 했다. 뒤틀린 몸으로 전동 휠체어에 앉은 불행한 젊은 여성, 술 때문에 망가진 신부 아버지의 얼굴, 다운증후군 화동, 사진에서 사라지고 싶어 하는 알비노 청년을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 (p.200)
“복잡하네요.”
“삶이?”
“사람들이요.”
“너는 복잡하지 않고, 엘라-엘리오트?”
“복잡하지요. 하지만 도와주실 거잖아요.”
“네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한.”
엘라가 다시 책을 꼭 안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오면 정말 편해요. 정말 제가 될 수 있어요.” (p. 214)
카페 테라스에 앉아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앞에 두고, 소뵈르는 아들에게 베케가 누구인지 설명해 주었다. 베케는 본토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으로, 그중에는 17세기부터 정착한 투르빌 같은 가문도 있었다. 베케는 수백 년 동안 자기들끼리 결혼을 했다. 이제 노예 무역이라는 까다로운 이야기를 꺼낼 차례였다.
“엄마한테 노예가 있었구나!”
라자르가 소리쳤다. 할아버지가 나폴레옹과 아는 사이였는지 궁금해할 나이이긴 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노예 제도는 천팔백사십팔 년에 폐지됐다고.”
“휴, 다행이야!”
주인과 노예 사이의 이야기가 한두 세대 만에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아이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p.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