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사람들이 힘없이 죽어가는 한편 극한의 상황에서도 놀라운 정신력과 의지를 바탕으로 기적처럼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다. 이 책은 이렇게 ‘기적같이 생존한 사람들’의 놀랍고도 전율할 만한 생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각자 살아남은 배경이나 상황은 전부 다르지만 이들의 생존은 하나하나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배경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하나의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했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했다는 점이다. 유감스럽지만 이것은 전범이나 악인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수단을 사용하여 끝까지 살아남은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 우리는 이들의 극한 생존기를 통해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흉포해질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동시에 인간이란 존재가 자신에 대한 도전과 핍박에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또한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역시 알 수 있을 것이다. _4~5쪽
일가족이 모두 죽는 경우도 다반사였는데, 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당시 불과 11살의 소녀였던 타티야나 사비체바의 사례였다. 레닌그라드 출생으로 불과 6살 때 아버지를 잃었던 타티야나는, 안네 프랑크가 암스테르담의 은신처에서 일기를 쓴 것처럼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상황을 노트에 남겼다. 이 어린 소녀는 자신의 공책 한쪽에 가족 6명의 죽음을 분 단위까지 나눠 순서대로 기록했다. 처음에는 언니가, 이후 할머니, 오빠, 삼촌들이 죽었고 마지막으로 1942년 5월 13일에 타티야나의 엄마가 죽었다. 이후 그녀는 다행히도 레닌그라드 밖으로 대피할 수 있었지만 오랜 영양실조에 따른 결핵으로 1944년 7월에 사망하게 된다. 타티야나의 일기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되었다. 그녀의 일기의 마지막엔 “타냐(타티야나의 애칭) 혼자 남았다”라는 짧은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_20쪽
독일인들에게 최상의 편의와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배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은 승객들과 함께 바닷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엄청난 비극이 벌어진 가운데에서도 신생아 한 명을 포함한 1,252명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생존자들 상당수가 동부 출신 피난민들(한국으로 치면 이북 출신 피난민)이었는데, 훗날 독일 사회에서 귀환 전쟁포로, 생존 여성들(원래 의미는 폐허를 치우는 여인들) 및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1950년대 경제 부흥을 이룬 한 축이 되었다. _41쪽
해상 루트와 더불어 난민들이 이용했던 루트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탈출하는 육상 루트였다. 사실 이 루트를 자신만의 노하우로 개척한 사람은 골드의 지원을 받아 탈출했던 독일계 유대인 알베르트 허슈만이었다. 독일 출신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던 허슈만은 스페인 국경 근처의 바이율쉬르메르까지 이동한 후 누이와 함께 험준한 피레네의 산길을 걸으며 밤새 이동한다. 언제 프랑스 경찰이나 국경수비대가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지역의 포도밭 농사꾼이나 양치기 몰이꾼으로 위장해 여정을 이어갔고 결국 국경을 넘어 스페인에 도달했다. 이후 허슈만은 누이를 먼저 미국으로 보내고 자신은 다시 마르세유로 돌아와 골드 일행과 합류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이 ‘피레네 루트’를 지속적으로 왕복하며 다른 이들이 안전하게 탈출하도록 도왔다. 무척이나 힘든 여정이었지만 허슈만 덕분에 많은 이들이 국경을 넘었고 나치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는 훗날 뉘르베르크 전범 재판에 독일어 통역으로 참여하며 나치의 단죄에 힘을 보탠다). _49쪽
이곳으로 난민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유럽, 아니 세계 최고의 지성을 갖춘 사람들로, 작가이자 예술가였고 다수가 유대인이었다. 식당에서는 독일 출신의 유대계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가 그녀의 글을 독일어에서 영어로 번역하고 있었고, 야외 수영장에서는 독일인 화가 막스 에른스트가 나체로 수영을 즐기곤 했다. 초현실주의의 창시자 격인 프랑스 시인 앙 드레 브르통은 2층 서재에서 사색과 독서를 즐겼다. 역시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을 주도했던 화가이자 조각가 마르셀 뒤샹이나 스페인 화가 오스카 도밍게스의 모습도 보였고, 쿠바 출신의 중국계 화가인 위프레도 람도 사람들과 정원을 거닐기를 좋아했다. 더불어 훗날 『슬픈 열대』로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는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나 베스트셀러 작가 하인리히 만과 프란츠 베르펠이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강렬한 색채로 유명했던 러시아 출신 유대인 화가 마르크 샤갈은 인근 자택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부인과 함께 종종 이곳을 방문하곤 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예술가가 모두 한자리에 모였던 것이다. 이들은 비록 난민 신세였지만 자신들의 존엄을 잃지 않았고 신세를 비관하지도 않았다. _52쪽
1943년 4월에 웨인라이트와 다른 117명의 고위 포로들은 일본 남쪽 가고시마 인근의 수용소로 옮겨진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이곳에 도착한 후 얼마간은 구타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식량 배급은 큰 변화가 없었고 포로들은 여전히 굶주렸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본국에 편지 쓰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점이다. 웨인라이트는 그의 부인 아델에게 자신의 체중 감소를 우회적으로 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었다. “여보! 나는 잘 지내고 있소. 내 몸무게는 우리가 결혼했을 때 수준으로 양호하오.” 하지만 답장은 도착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외부 소식이 알려지는 것을 우려하여 의도적으로 숨겼던 것이다. _71쪽
아우슈비츠는 문자 그대로 인간이 만든 ‘현세의 지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지옥 같은 곳을 자발적으로 들어갔다가 탈출한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용감하다 못해 무모했던 인물은 폴란드 출신의 군인으로, 그의 믿기지 않는 체험을 통해 베일에 쌓여 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상이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고 전후 나치 관련자들의 범죄를 처단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의 놀라운 이야기만큼 그 삶에도 굴곡이 많았는데, 마치 폴란드라는 나라의 뒤틀린 현대사를 압축해 놓은 것과 같았다. 지금부터 이 ‘굴곡진 운명을 가졌던 사나이’의 인생 행로를 함께 걸어보자. _78쪽
하르트만은 전쟁 중 총 16번 비상 착륙했다. 다시 임무에 복귀한 하르트만은 9월 20일 마침내 100번째 적기를 격추하며 같은 기록을 달성한 54번째 독일군 조종사가 되었다. 10월 29일에 그간의 공적으로 기사 철십자훈장을 받았고, 1943년 말까지 그의 킬마크는 159대에 달했다. 이즈음부터 그의 기수에는 검은색의 튤립 문양 마크가 그려진다. ‘검은 튤립’의 전설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동시에 소련군은 그를 ‘검은 악마’로 부르며 두려워했고 만 루블의 현상금까지 걸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아직 오기도 전이었다. _103쪽
페체르스키는 전혀 주눅들지 않았고 오히려 나치 감독관을 압도했다. 자리를 떠난 프란첼이 잠시 후 다시 돌아오며 빵과 버터를 가져다주었다. 이때 페체르스키는 목숨이 두 개가 아니라면 감히 할 수 없는 발언을 했으니, 자신은 “배가 고프지 않다”며 당당하게 그 제안도 거절했던 것이다. 잠시 후 프란첼은 말없이 사라졌다. 이 소설 같은 영웅담은 수용소에 빠르게 전파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면서도 쉽게 믿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목격자가 많았기에 페체르스키는 순식간에 ‘수용자들의 영웅’으로 부상한다. 그날 밤 군인 출신의 유능한 리더를 애타게 찾고 있던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그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난 것이다. _122쪽
결국 두 사람은 탈출, 아니 봉기의 방식에 합의를 보았고 날짜까지 점검하기 시작했다. 대략적인 계획은 이러했다. 우선 점호 전에 친위대 감독관들을 유인하여 대거 살해한다. 이후 오후 5시 점호 때 야외 작업이 있다는 거짓 명령을 내려 가스실 작업 인원은 빼고(물리적으로 거리가 멀었다) 모든 인원들이 다같이 수용소 밖으로 걸어서 나간다. 페체르스키는 친위대 감독관들만 없다면 경비병들이 지휘관 없이 우왕좌왕하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일견 말도 안 되는 미친 계획처럼 보였지만 앉아서 가만히 죽는 것보다는 나았고, 사실 더 좋은 대안도 없었다. 거사의 시기는 대략 10월 중순으로 잡았고 얼마 후 10월 14일로 결정되었다. _124쪽
1940년 7월 베를린은 프랑스와 서유럽에서 승리한 자국군의 승전 퍼레이드로 온 도시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시의 중심가인 운터 덴 린덴에는 환희에 넘친 군중들로 가득했고 인생의 정점을 맞은 히틀러가 보무도 당당한 그의 군대를 사열했다. 하지만 불과 5년 후인 1945년 4월 베를린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과 활기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시내는 포연이 가득한 회색빛의 폐허였다. 사방을 둘러싼 붉은 군대의 포위망에 갇힌 채 도시는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_135쪽
전후 베를린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성폭행 피해로 상처를 받거나 성병에 걸려 치료를 받아야 했던 시민들의 숫자만 10만 명이었다. 영국 역사가 엔터니 비버에 따르면 독일 전체로는 200만 명이 전쟁 전후에 벌어진 집단 성폭행의 피해자였다고 한다. 전후 1946년에서 1947년 사이 독일 신생아의 3~4% 정도가 소련군의 성폭행으로 태어난 사생아였다. _142쪽
여성 포로들은 여러 형태의 모욕을 강요받았는데, 수용소에서 일본군과 마주칠 때는 무조건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해야 했다. 또한 맨손으로 화장실 배설물 처리 등에 동원되었고 매일 벌어지는 ‘텡코’(일본어로 점호라는 뜻)에서 천황이 있는 도쿄 쪽을 향해 인사했고 “일본은 일등이며 영국과 미국은 꼴등”이라는 식의 유치한 구호를 반복적으로 외쳐야 했다. 포로들은 자조 섞인 농담으로 “일본군은 죄수와 여자를 가장 싫어한다”라고 말했다. 자신들이야말로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최악의 존재였던 것이다. _161쪽
고통을 참지 못한 병사들은 소금기 강한 바닷물을 마시기 시작했지만 이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으로, 이들은 곧 입에 거품을 물고 부풀어 오른 입술로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2~3미터 정도 크기의 작은 구명정에 여러 명이 타다 보니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일부는 가라앉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허기에 지친 병사들은 탈수와 태양열 탓에 이미 반쯤 정신착란 상태가 되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바다에서는 부상자들의 피 냄새를 맡은 살인자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상어였다. _179쪽
일본군의 기준에서 본다면 사카마키는 살아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황국의 군인’으로서 목숨을 바쳐 임무를 수행하고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자결로라도 끝까지 충성을 다해야 했다. 포로가 된다는 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가문과 국가에 대한 배반이자 지독한 수치로 여겨졌다. 그를 감시하는 미군 관계자들이나 경비병들은 딱히 구타나 가혹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사카마키에게는 살아 있는 하루하루가 고통이었고, 결국 견디다 못한 그는 정식으로 자살하게 해달라고 미군에 요청한다. 미군 담당자는 사카마키가 정신이 나갔다 생각하며 그저 웃을 뿐이었고 당연히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_193쪽
세상에는 선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선인보다 더 많은 악인들이 전쟁에 참여했고 그들은 온갖 악행에도 불구하고 끝내 살아남았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잘 읽었고 자신들의 악마적 장점을 승자에게 최대한 어필했다. 어떤 이들은 육체와 정신에 문제가 있는 척하며 심판 을 피하려 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의 조합으로 이들은 당시 상황에서 최적의 생존 방정식을 완성한다. _2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