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이라면 가장 먼저 실학파를 떠올리고, 이어 당대 최고의 문사이자 저 놀라운 『열하일기』의 저자로 기억하고, 나아가 꽤 알려진 특유의 호방한 기질과 처세와 풍모를 언급한다. 안의 현감으로 4년 2개월을 재직한 사실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고 있지 못하거나, 알고 있더라도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다. 연암의 글이나 그곳에서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제외하면, 오늘날의 함양군 안의면에 실체적 궤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까닭도 있겠다. 『안의, 별사』에서 그 시간과 공간을 구현해보고 싶었다. (…) 이 불의하고 무도한 시대에 한 권의 책이 차돌처럼 단단한 종주먹일 수는 없을진대, 그럼에도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무릅쓴다. 다만, 금권을 극히 미워한 연암의 정신이 이 혼란한 세태에 통렬한 지표가 되기를 소망한다.
_ 작가의 말 | 008페이지
밤사이, 안인 듯 밖인 듯 경계가 흐릿하여 주저앉았다 일어섰다 오락가락하였지요. 묘연히 발돋움하여 관아 주변을 몇 바퀴째 돌다가, 아직 얼음 빠지지 않은 뒷산 대숲에 들어가 내아 기와지붕을 내려다보았어요. 울컥하여 무어라고 무어라고 혀 밑에 감춰둔 말을 외쳐보는데, 대나무 꼭대기에 매복 중이던 살바람이 되다 만 소리를 채가고 말았답니다. 몽중방황이런가요. 온 마을의 길들을 둥둥 떠서 헤매는 헛것이 진짜 저인 것 같았습니다. 아니, 진짜 저였습니다.
_ 서 | 020페이지
가도 가도 흙먼지와 아지랑이뿐인 요동 벌판을 내 눈으로 보았다. 산해관까지 일천이백 리. 하늘 끝과 땅 끝이 마치 아교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했다. 요동에서 나는 갓 태어난 아이마냥 한바탕 목 놓아 울고 싶었다. 경자更子년(1780) 여름의 일이었다. 조선 땅에 돌아온 뒤부터 조랑말 고삐를 잡고 맬 때마다 매양 감질이 났다. 부리는 말은 노쇠해 눈곱이 꼈고, 나서는 길마다 비좁고 굽었다. 말 잔등에 바짝 엎드린 채 비나 구름 사이를 휙휙 지나치던 경자년의 일이, 혹 장님이 꿈속에서 보았던 헛것만 같았다.
_ 전보 | 31페이지
“포흠이 무엇이냐? 백성의 구제를 위해 비축한 관의 재물을 사사로이 축내거나 빼돌리는 짓, 곧 횡령이다. 이는 중대한 범죄다. 너희에게 녹봉이 없는 고로 생활의 방편을 따로 마련해야 하는 고충이 있으리라는 걸 내 모르지 않으나, 그렇다고 하여 공적인 재화를 임의로 유용한 범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느니라. 너희가 작당하여 모르쇠로 일관한들 범죄를 숨길 수 없으며, 숨긴다 하더라도 잠시 감추는 데 불과하다. 게다가 곡식 장부가 허위임을 내가 알게 된 이상 상부에 보고하여 수령의 소임을 다할 수밖에 없느니라.”
위로 보고하겠다는 말이 떨어지자 앞줄에 앉은 형방 최가가 입술을 실룩인다. 일종의 시위다.
_ 초심 | 125페이지
북경을 다녀온 사신이라면 연행기를 쓰는 것이 관행이 된 지 오래다. 김창업이나 홍대용, 박제가 정도를 제외하면 판에 박은 듯 기술하는 내용이 비슷하다. 나는 연경에서 열하로, 다시 연경으로 정신없이 내달리며 보았던 일들을 시시콜콜히 풀어놓았다. 중국의 노래나 풍습도 사실은 나라의 치란에 관련된 것들이니 단순히 넘길 일이 아니다. 성곽과 궁실 구조라든지, 농사짓고 목축하는 일과라든지, 도자기 굽는 가마와 쇠 다루는 대장간의 일상도 하찮다 하여 빠트리지 않았다. 그 일체에서 이용후생의 길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_ 문풍의 죄 | 256페이지
더욱 용감한 과부는 단순히 개가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절개를 인정받기에 부족하다 여겨 마지막 선택을 한다. 왕왕 한낮의 촛불처럼 무의미한 여생을 스스로 끝내버리고 남편을 따라 죽기를 비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하여 물에 빠져 죽거나, 불 속에 뛰어들어 죽거나, 약을 먹고 죽거나, 목매달아 죽기를 마치 극락에 들듯이 한다.
명분은 아름다우나, 목숨을 가벼이 다룸이 너무 지나치다. 나라에서도 붉은 정문을 내려 칭송하니, 방방곡곡에서 비바람에 삭아 빠개질 문짝과 꽃 같은 목숨을 맞바꾸는 결단이 끊이지 않는다. 이는 과부의 죽음을 장려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_ 무명의 풍경 | 325페이지
작은아버지 소리 듣게 된 둘째 종간은 한술 더 떠 ‘골상이 비범하다’고 써놓았더라. 이렇게들 요량이 없어서야.
멀리서 어린놈을 궁금쩍어 하는 할아비를 위해서라도 생김생김을 생긴 대로 구체적으로 일러주면 좀 좋을까.
가령, 이마가 넓다든지, 툭 튀어 나왔다든지, 모가 졌다든지, 정수리가 평평하다든지, 또는 둥글다든지. 천리 밖에 나와 앉아서도 그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말이다.
미덥지 않음이 다른 데서도 드러난다.
지난번 하인 편에 곶감 두 첩, 내가 손수 담근 고추장 작은 단지 하나와 쇠고기 장볶이 한 상자를 함께 보냈다. 두 아이 모두 거기에 대해서도 가타부타 답이 없다. 맛이 어떤지, 입에는 맞는지, 한 놈이라도 자세히 알려주면 나 또한 그에 맞춰 계속 보낼지 말지를 결정하겠건만.
_ 여일 | 520페이지
땅덩어리가 참말 둥글다면 이 강물도 공처럼 굴러 굴러 한곳에 가 모이지 않을까요. 엉터리없는 말인 줄 알지만, 그렇게 믿으면 그런 것이지요.
음양의 인연만 인연이겠는지요. 옷깃 스친 인연이 이 강모래처럼 쌓이고 쌓여 저마다 환희와 슬픔과 회한을 빚었겠지요.
그러니 무연재, 인연 없는 집이란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이 아닐는지요.
저 글씨들처럼 이전의 저를 지우려 합니다. 비웠으니, 비었으니, 다시금 새로이 채우며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지요.
그리하려고요. 모쪼록 그리하려고요.
_ 결 | 559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