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도 있었습니다. 처음과 달리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한 학생들의 변화를 보았을 때 특히 그랬습니다. 학기 초에 “페미니스트는 똥”이라면서 수업시간 내내 다리를 달달 떨며 노려보기만 했던 학생, “페미는 사회악”이라던 학생, “이건 내가 알 필요 없는 얘기”라며 딴짓만 하던 학생, “내 힘으로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으니 이런 얘기는 무능력자들이나 듣는 거”라고 외면하던 학생이 학기 말이 되면 곁눈질로라도 수업에 ‘참여’했습니다. -7, 8쪽
필수 교과목은 저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선택권이 없음을 말하죠. 서로 도무지 마주칠 일이 없는 사람과 만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온라인상에 떠도는 실체 없는 ‘상상 페미’를 맹신하는 학생,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퍼지는 커뮤니티에서 페미니즘을 접한 ‘반페미니스트’ 학생들과 대면하게 되었죠. -20쪽
“여성가족부가 ‘남성 피해자’인 자신을 대변하지 못하니 폐지하라” 혹은 “페미니즘은 쓸모가 없고, 오히려 자신들을 괴롭힌다”는 식의 항변은 성폭력 피해자의 위치, 구체적 피해를 인식하는 위치에 자신을 놓음으로써 나온 말이 아닙니다. 여성가족부 때문에 입은 피해나 불이익을 ‘상상’한 것에 그친 말들이죠. -27, 28쪽
혐오를 표현하지 말라는 규제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될까요? 동일한 범죄를 저질러도 더 무거운 형을 선고받는 여성 혹은 이주민 등의 사례를 떠올려 봅시다. 규제는 유독 사회적 소수자에게 더 가혹하게 적용될 때가 많습니다. 혐오 표현 여부를 판단하고 위반의 대가를 집행하는 이들 역시 사회적으로 유리한 권력을 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37쪽
저는 심호흡을 한 후 말문을 열었습니다. 나 역시 그 문장을 보았다고 말했죠. 그리고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 이유를 찬찬히 설명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법적으로 승인받기까지 아주 많은 증거를 제시해야 하거든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지를 이해한다면, 저 말이 현실을 얼마나 왜곡하는지 보인다는 조언도 덧붙였습니다. -43쪽
저는 그들이 겪었을 군대 내 위계 폭력을 떠올렸고, 그런 문화가 사라질 수 있는 방법, 징병과 여군에 관해 얘기해 보고 싶었는데, 그들은 그 문제들에는 관심이 별로 없어 보이더군요. 자신들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음을 과시하며 즐기고 있을 뿐, 여성들을 같은 병역 의무를 지는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 듯했습니다. 여성의 열등함을 증명하고 싶어 군대를 반복해서 소환한 것뿐이죠. -57쪽
모든 것이 처음부터 생리 중인 여성의 몸에 맞춰 세팅되었다면 어땠을까요. 지금의 생리 관련 제도는 애초에 사회의 기본 값이 여성의 몸을 간과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에 불과합니다. 저라면 ‘생리 공결’을 여성들이 누리는 특혜라고 말하는 대신에, 제도와 기구가 여성들을 필요로 하면서도 제도와 기구를 다 변화시키기 곤란해 내놓은 계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생리 공결 제도를 계기로 사회가 변하기 시작한다면, 그 혜택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누리게 될 것입니다. -66쪽
그러니까 역차별로 공격받는 여성 전용 주차장은 여성들이 양육을 주로 책임지지 않거나, 주차장에서 벌어지는 범죄의 표적이 되지 않는 세계에서는 필요 없는 정책입니다. 차별을 인지하는 그 민감성이 이제 그 방향으로도 발휘되길 바랍니다. -71쪽
할당제는 오히려 남성을 구제하는 도구로 활용될 때가 더 많습니다. 무엇이 역차별이라는 건가요. 만약 모든 조직과 인사권자가 각자의 역량을 제대로 평가할 능력을 갖춘다면, 여성 할당제는 굳이 필요하지 않을 거예요. -72쪽
공학의 강의실 풍경은 좀 다릅니다. 여학생이 수십 명이고 남성은 단 한 명인데도 발언권이 아주 쉽게 남성에게 넘어갑니다. 강단에 서면 학생들 표정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미묘한 표정 변화까지 감지할 수 있죠. 남학생 의견이 자신과 다르면 발언을 준비하던 많은 여학생이 발언을 포기하는 걸 자주 포착합니다. -75, 76쪽
성별 이분법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고통만을 강조했던 ‘랟펨’들은 트랜스젠더의 고통에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트랜스젠더를 손쉽게 일반화한 걸 반성했죠. 탈코르셋 운동에 동참한 트랜스젠더의 사례도 알게 되었고요. 아무튼 토론 막바지에 이르러선 쓰까였던 이는 “사실 나는 랟펨이었나?” 하고 반문했고, 자신은 랟펨이라고 선언했던 학생은 “알고 보니 난 쓰까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104쪽
안도하는 동시에 당혹감도 이어집니다. “가장 억압받는 여성조차도 나름의 권력을 행사한다”는 벨 훅스 말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차별받는 이들이 특정한 ‘타인’ 집단을 차별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니까요.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106쪽
나는 당신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지 않습니다. 직장 내 성폭력이 공론화되었을 때 당신은 피해자를 지지하고 싶은 마음에 피해자의 신상을 묻고 싶었지만, 바로 그 마음을 중단했지요. 나는 당신을 잠재적 가해자로 봅니다. 직장 내 성폭력이 공론화되었을 때 당신은 피해자를 지지하고 싶은 마음에 피해자의 신상을 물었습니다. -116쪽
요즘 온라인상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퐁퐁남’과 ‘설거지’, ‘스윗 한남’ 등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이 말들의 어원과 속뜻을 설명하자니 입이 쉬 떨어지지 않네요. 혹시 이 말들을 가사 노동을 분담하는 남성, 가정 내 주도권을 잃은 남성 정도의 의미로 알고 쓰신 분들이 있다면, 우선 당장 사용을 멈춰 주세요. -124쪽
그런데 젠더 갈등, 실체가 있는 말인가요? 어디에 쓰이는지 살펴보니 안 갖다 붙이는 곳이 없더군요. 스토킹도 젠더 갈등이고, 별거 시 남편이 아내를 폭행해도 젠더 갈등이고, 가정 폭력이 일어나도 젠더 갈등이고, 성폭력·온라인 괴롭힘 등이 일어나도 젠더 갈등이고, 고용 불평등도 젠더 갈등, 직장 내 괴롭힘도, 성희롱도 젠더 갈등이랍니다. 청년 세대 문제, 경제 불평등 문제에까지 갖다 붙이네요. 심지어 저출생 문제 원인도 “페미니스트들이 유발한 젠더 갈등”이랍니다. 이런 만능어가 세상에 또 있을까요? -130쪽
그런데 이분들,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이 평등해지는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여성의 권리 신장을 얘기한다는 걸 이해하긴 한 걸까요? 도대체 무엇이 불만이기에 페미니즘 대신 이퀄리즘을 하자고 주장하는 걸까요? 아무리 살펴봐도 무엇을, 어떻게 동등하게 하자는 구체적인 얘기가 이퀄리즘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상이 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자격을 갖추지는 못한 걸로 보입니다. -148쪽
이퀄리즘, 성평화 같은 말들은 모두 소수자의 언어를 빼앗으려는 현상이죠. 사회적 소수자들은 현실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자신들만의 언어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이퀄리즘, 성평화 같은 말들은 이런 언어를 훼손함으로써, 사회적 소수자들이 고군분투해 이룬 것들을 손상시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역사도 없는 생뚱맞은 빈말인데 말이죠. -150쪽
네, 한국의 페미니즘은 변질되었습니다. 자기 의견을 말할 때마다 “죄송하지만”, “이런 말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등을 덧붙입니다. 상대에게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재차 확인시킨 후에야 자기 의사를 밝힙니다. ‘쿠션어’를 충분히 깔았으면서도 집에 돌아와서는 혹시 자신이 너무 공격적이고 까칠한 표정을 짓거나 그런 태도로 말을 한 것은 아닌지 계속 돌아봅니다. 상대의 말을 받아쳤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사회성을 의심하고 자책하며 더 나은, 더 평화로운 대응법은 없었는지 반성합니다. -159쪽
저는 왜 당신이 자신의 ‘여성 혐오’를 인식하지 못하는지 늘 의아합니다. ‘좋아서 그랬다’는 말이, ‘혐오’를 없는 사실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혐오는 단순한 ‘싫어하는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으니까요. -165쪽
저도 아직, 여성을 혐오합니다. 무심코 쓰는 표현에, 무엇을 바라보는 시선에, 무엇을 평가하는 마음에, 무엇을 선택하는 과정에, 제가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에 ‘여성 혐오’가 깃들어 있습니다. 여성 혐오가 없는 평등한 세상을 저도, 당신도 아직 오롯이 살아 보지 못했거든요. 그러므로 우리는 평생, 남아 있는 혐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겁니다. -1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