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다른 각도에서 로마 황제들(자비롭고 나이 든 정치인이든 어린 폭군이든, 철학자를 지망 하는 사람이든 검투사가 되려는 사람이든, 유명하든 잊혔든)을 조명하려 하고, 왜 그들 가운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엘라가발루스처럼 결국 자객의 칼날이나 독이 든 버섯에 의해 목숨을 잃어야 했는지와 같은 기본적인 문제를 직면하려고 한다. 이런 종류의 탐험에서 고대의 과장, 허구, 거짓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통치자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그들을 판단하고, 전제군주 권력의 성격을 논의하고, ‘그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표시하는 데 사용한 도구함에는 언제나 공상, 한담, 중상, 떠도는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 1. 1인 통치의 기초
마찬가지로 중요했던 것이 로마의 영토가 늘어나면서 공화국 정부의 권력 공유 구조에 가해진 압박이었다. 전통적으로 함께 선출된 관리는 도시의 내부 업무와 외부 문제를 동시에 담당했다. 전방의 전쟁에서 레기오(군단)를 지휘하거나, ‘평화 유지’를 하거나, 분쟁을 해결했다. 로마는 적어도 처음에는 자신들이 정복한 땅에 실제로 간여해서 직접 통치를 하려 하지 않았다. (…) 그렇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역할은 공유되었고 일시적이며 해마다 바뀌는 관리라는 틀 안에 수용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1년 임기의 관리가 로마에서 나라의 끄트머리에 있는 문제 지역으로 가는 데만도 몇 달이 걸렸을 것이다. 로마인들도 이를 알았고, 이에 대응해 여러 가지를 조정했다. (…) 예컨대 지중해의 ‘해적’(고대인들에게는 ‘테러리스트’ 정도의 느낌이 들게 하는 명칭)을 소탕하고자 하면 한 지휘관에게 권한과 자원을 주고 장기간 맡을 수 있게 해야 했는데, 이는 일시적이고 권력을 공유하는 전통적인 로마의 관직 임명 원칙에 위배되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서 큰 땅덩이는 점차 이 나라를 떠받치고 있던 정부 구조를 파괴해 1인 통치로 가는 길을 열어놓았다. 제국이 황제를 만들어낸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2. 다음 차례는? 승계의 기술
입양은 처음부터 1인 통치 체제에 내재되어 있었다. 최초의 로마 황제 가문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누이의 손자 옥타비아누스를 입양함으로써 시작됐고, 아우구스투스는 불운한 여러 조카, 손자, 기타 공자 들을 입양해 자신의 후계자로 삼도록 지정했다. 200여 년 뒤에 엘라가발루스는 분명 조언을 받고 정확하게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가문의 연속성을 확보하고자 사촌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입양했다(그는 ‘새 아버지’보다 겨우 네 살 정도 어렸다). 다시 말해 입양은 통치 황제의 친아들이 아닌 가까운 친척과 친지들을 승계 후보로 점찍어 핵심 집단의 잠재적 경쟁자들보다 우위에 두기 위해 자주 이용한 방법이었다. 이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193년 내전을 통해 권력을 잡은 뒤 이 과정을 완전히 뒤집었을 때 논리적이면서도 터무니없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자신의 제위에 대한 권리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뒤늦게 자신이 10여 년 전에 죽은 전전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양자라고 선언했다. 이 ‘자가 입양’에 대해 어떤 사람은 재치 있는 다음과 같은 반응을 내놓았다. “카이사르여, 아버지를 찾으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3. 실력자들의 식사
비슷한 성격의 다른 이야기들은 황제들이 ‘초대자로서’ 권력을 남용한 것을 야만스럽게 드러냄으로써 권력의 적절한 한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예를 들어 칼리굴라는 어느 공개 연회에서 시중든 노예를 가학적으로 처벌해 비난을 받았다. 이 노예는 어느 소파에서 은 조각을 훔쳤다는 혐의를 받았다. 황제는 처벌로 그의 두 손을 자르고 목에 줄을 매어 손님들 사이에 끌려 다니도록 했다. 그의 목에는 범죄를 설명하는 팻말을 걸었다. 로마 세계에서 잔인성의 경계는 매우 다양했고, 고대의 일부 통상적인 처벌과 응징의 형태는 현대적 기준으로 볼 때 충격적이다. 그러나 거기에 한계가 전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괴기 공상물에 가까운 이런 식사 자리의 이야기들은 황제가 적법하게 정말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한 방법이었다. 절대권력은 제한을 가하거나 적어도 숨겨지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4. 궁궐 안에 있는 것?
궁궐은 또한 황제에게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살해된 것은 거의 이례적인 일이었다. 거의 대다수의 암살된 황제는 궁궐에서 살해됐다. 이곳은 음식에 몰래 독을 탈 수 있고, 단검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칼리굴라는 궁궐 안에서 이동하던 중에 불만을 품고 달려든 근위병 두 명에게 살해되었고, 도미티아누스와 페르티낙스도 궁궐에서 칼에 찔렸다. 콤모두스는 192년 자신의 목욕탕에서(다른 기록에는 침대에서) 그의 개인 훈련사에게 교살당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211년 게타의 피살이었다. 고대의 작가들은 끔찍한 이야기를 전한다. 궁궐을 나누어 차지하는 방식이 결국 무너진 뒤 카라칼라가 병사들을 시켜 동생을 찔러 죽이게 했다는 것이다. 동생은 안전을 위해 팔라티노의 어머니 처소에서 어머니에게 매달려 있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이 사건은 궁궐이 황제에게 화려한 새장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