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기억과 경험, 무엇을 보존하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산업유산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모색과 제안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뛰어난 산업시설을 유산으로 인식해 보존·활용하는 일은 이미 세계적인 흐름이 되었다. 하지만 산업유산의 보존·활용에 관한 논의와 움직임이 활발해질수록 이를 둘러싼 이해 당사자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그렇다 보니 그곳에 담긴 당사자의 기억과 목소리를 보존하는 것보다 경제적 효과를 우선시해 관광객의 발길을 붙잡을 수 있는 볼거리로 꾸미는 데 치중하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폐산업시설을 새로운 ‘볼거리’가 아닌 ‘유산’으로 인식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그곳에 담긴 수많은 기억 가운데 ‘무엇’을 보존하고 지역 재생의 자원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놓고 다양한 이해 당사자가 모여 논의하고 고민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단순히 유휴산업시설의 건축적 가치나 지역 재생 사업의 이해관계를 넘어 그 장소에 결부된 개인과 지역, 국가 사이의 다층적인 기억을 포괄하는 ‘민주적인’ 유산 활동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산업유산은 ‘정치성’과 ‘역사성’을 갖게 된다. 뒤집어 말하면 그 과정이 민주적이지 못한 유산 운동은 국가주의나 권위주의를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권력과 자본에 의해 획일화된 유산 보존과 활용은 민주주의에 대한 또 다른 공격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각국의 산업유산에 담겨 있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의 특수성을 파악하고 이해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만들어갈 산업유산의 가치와 의의를 탐색하는 데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산업고고학과 산업유산 보존 운동이 시작된 곳
―영국, 독일, 미국
1부에서는 산업고고학과 산업유산 보존 운동의 발상지인 영국, 산업유산의 재활용에서 모범사례로 여겨지는 독일, 폐산업시설을 생태박물관으로 활용하는 프랑스, 탈산업화와 함께 수많은 ‘유령도시’를 양산한 미국의 경우를 살펴보았다.
1장에서는 아이언브리지 세계유산 가운데 주철교 아이언브리지와 블리스츠힐 빅토리안 타운(Blists Hill Victorian Town)을 중심으로 산업혁명 시기의 오랜 용광로, 탄광, 주철소, 철공장, 주택이 산업유산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산업유산에 접합된 새로운 의미와 진본성(authenticity)에 대해 고찰했다. 2장은 산업유산 보존·활용의 성공 사례로 이야기되는 독일 루르 지역의 산업유산이 광공업 쇠퇴에 대처하기 위한 경제적 사회적 구조조정의 파생 산물이자 사민주의에 기초한 특수한 정치문화 기획의 결과임을 지적했다. 3장에서는 1970년대에 본격화한 프랑스의 산업유산 연구와 조사 작업이 문화부의 주도 아래 1980년대 1차 총조사 사업과 2000년대 2차 총조사 사업을 통해 마무리되는 과정을 정리했다. 4장은 2010년대 이후 본격화한 미국 뉴욕 브루클린 수변 지역의 산업시설을 소재로 재개발 사업의 향배를 살펴보았다.
산업유산 보존·활용에 관한 거버넌스 비교분석
―북한, 중국, 타이완, 일본
식민지 시기의 불편한 기억을 담고 있는 산업시설을 국유화해 활용하는 북한, 국가 차원에서 ‘공업유산’의 집단기억을 만들어가는 중국, 일제의 식민 지배와 산업화의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면서도 산업유산의 보존·활용에 적극적인 타이완, 국가 주도의 선택적인 기억화로 주변국과 역사분쟁의 불씨를 제공하고 있는 일본의 사례를 비교 검토했다.
5장에서는 평양 일대의 산업시설을 주된 소재로 산업유산에 대한 북한의 사회적 인식과 미래의 유산 정책을 조명하고자 했다. 6장에서는 중국에서 공업유산의 법제화가 실은 국가 차원에서 집단기억을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드러내 보이려 했다. 7장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중화민국 정부가 일본 통치 시기의 산업시설과 건축물을 국유화해 산업유산으로 보존·활용하게 된 역사적인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8장은 ‘일본’이라는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집단 구성원의 연대 의식을 육성’하기 위해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국가 공인의 유산 담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본 글이다.
국내 산업유산 정책과 연구동향, 실제 사례
―한국의 지역재생사업
2000년대 이후 에너지 정책 및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폐광, 폐산업 시설의 등장을 계기로 본격화한 국내 산업유산 정책과 연구 동향을 정리하는 한편, 폐광을 활용한 지역 재생 사업의 실제 사례를 검토했다. 9장에서는 폐산업시설이 도시와 산업의 역사, 노동과 일상의 기억을 조명하는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날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산업유산에 관한 국내 연구 동향을 정리했다. 10장은 2000년대 이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산업유산이 공공 영역의 각종 제도를 통해 보존·활용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전국 각지에 산재한 산업유산의 보존·활용에 관한 사례를 정리한 글이다. 11장은 단일 석탄 광산으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문경 은성광업소의 폐쇄 이후 지역 활성화를 위한 관광도시 전략에 따라 문경시가 탄광업 관련 산업시설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문화재에서 국가유산으로?
―유산의 가치를 국가적·민족적 범위로 제한해선 안 된다
이 책의 출간이 준비되는 동안 한국의 유산 정책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지난해 5월 ‘국가유산기본법’의 시행과 함께 한국에서 ‘문화재’는 ‘국가유산’으로, ‘문화재청’은 ‘국가유산청’으로 새로 거듭난 것이다. 유산 보호와 문화 향유를 위해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을 강조하는 법률 제정의 취지와 제도 개편의 필요성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유산의 가치를 ‘국가적·민족적’ 범위로 제한하는 것에는 우려의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유산의 가치를 ‘국가적·민족적’ 범주로 제한하는 것은 국민국가의 틀을 유지하고 구성원의 ‘연대 의식’을 육성하기 위해 아주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에서 드러났듯이, 국가에 의한 ‘공인된 유산의 신화화’는 서로 다른 기억을 갖는 인접국 사이에 기억 전쟁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보다 문제인 것은 유산에 담긴 다양한 기억과 다채로운 목소리를 은폐하거나 감추는 역효과를 부를 수 있다는 점이다. 유산의 가치를 ‘국가적·민족적’ 범주로 제한한다면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주체 사이의 대립을 중재하기는커녕 기름을 끼얹어 더욱 격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유산의 가치는 ‘국가적, 민족적’ 범위로 제한되거나 수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노동과 재해, 환경, 젠더 등과 같이 다양한 주체와 집단이 요구하는 가치와 이슈를 포함할 수 있는 범주로 확대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여러 세대에 걸쳐 유산의 가치 역시 창조적으로 계승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빛과 어둠을 함께 갖는 산업화의 양가적인 측면을 고려하는 가운데 국민국가 사이의 ‘특수’한 관계를 넘어, 여러 당사자와 주체가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다양’하고 ‘보편’적인 유산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산업유산의 가치를 미래에까지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