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줄
딸이 죽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고, 아내가 일찍 죽고 나서 유일한 희망이자 버팀목이었던 딸이 죽었다.
56p
그 후, 기태에게는 죽음보다 깊은 지옥이 펼쳐졌다. 이번 사건의 기사들이 퍼지면서 인터넷 여론을 중심으로 기태는 성매매한 딸의 죽음을 이용해서 돈을 뜯어내려는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혔다. 게다가 죽은 딸 윤지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성매매를 한 것도 모자라서 마약까지 한 불량 학생이 되어 버렸다.
71p
“딸의 복수를 해 줘.”
남자는 잠시 생각했다.
[나는 비즈니스를 하지 복수 같은 건 하지 않아.]
83p
“『핏빛 자오선』에는 홀든 판사라는 악당이 등장해. 진짜 판사는 아니고, 엄청난 거구에 말도 못 하게 악랄한 악당이지. 여러모로 신비한 존재라 악 그 자체로 보기도 하고, 초인 같은 존재로도 해석돼.”
103p
“전문가의 냄새가 좀 나.”
“어떤 전문가요?”
“그림자.”
상대방의 대답을 들은 권성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자가 다시 움직인다는 얘깁니까?”
“그놈은 항상 움직였을 거야. 우리가 눈치를 못 채서 그렇지.”
141p
“세상 모든 부모에게 자기 자식은 착한 놈이지. 문제는 나쁜 친구를 사귄 건데 말이야. 그런데 알고 보면 그놈이 바로 나쁜 친구였다 이거지. 어쨌든 걔네 부모는 진짜 빡쳐 있어.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었으니 말이야. 누구든 걸리면 작살내겠다고 벼르고 있는 중이야.”
203p
홍대의 밤은 낮보다 더 환했다. 오히려 네온사인이 켜지지 않은 낮이 더 어두워 보인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홍대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2층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는 읽던 책을 덮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운 우드 독서링도 뺐다. 이제 일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그만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 남자는 읽던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이 있는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그리고 그 구절을 소리 내어 읽었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253p
“시소의 핵심은 균형이지. 한쪽이 무거워지면 다른 한쪽은 올라가게 마련이야. 두려움은 시소가 한쪽으로 기울어질 듯할 때 나타나지. 균형을 잘 잡으면 문제는 없어. 서로 두려워하지만 그게 오히려 균형을 맞추지. 나는 지방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 고시에 턱걸이로 합격했어. 서른 살의 나이로 말이야. 하지만 25년이 지난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로펌의 대표지.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