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에서 하늘 원반에 이르는 수공업의 역사에 대한 ‘기록’을 통해 우리는 훨씬 더 보편적인 결론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한 것을 만들기 위한 모든 조건을 발견하고 창조하고 설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그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과 자신이 만든 도구들을 다른 분야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만큼 정교하게 갈고 닦았다. 그들이 사용했던 수단은 소박했지만, 그들은 그 수단을 최적의 방식으로 활용할 줄 알았다. 그들이 자원이나 도구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폭넓은 사고를 고려한다면 현대인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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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년에는 마침내 폴란드 마이센에 ‘왕립 폴란드 및 선거 색슨 도자기 제조소’가 설립되었다. 도자기 제조법은 국가 기밀로 분류되어 ‘아르카눔Arkanum’이라는 이름으로 밀봉되었다. 그러나 이 비밀은 금세 유출되어 1718년 비엔나에서 자체 도자기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고, 1740년에는 뱅센, 1756년에는 파리 근교 세브르로 이전되었으며, 174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1763년 베를린, 1771년 리모주(세브르에 이어 프랑스에서 두 번째 생산지), 1775년 코펜하겐에서도 생산되었다.
당시 색슨족 도자기 장인들은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자기 생산과 확산, 그리고 유통에 나섰다. 영국에서는 약사 윌리엄 쿡워시(1705~1780)가 도자기 생산의 선구자로 활약했고, 1751년 제조소는 그의 지식을 활용해서 큰 이익을 얻었다. 그는 오늘날 로열 우스터 도자기 회사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급 도자기를 만드는 작업에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 장인들이 투입되었다. 도자기뿐만 아니라 조선소, 제철소, 소금 공장에서도 고도로 훈련된 사람들이 필요했는데 이들은 철저하고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사람들이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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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와 18세기는 시계 제작에 있어서 위대한 시대였다. 시계는 철학을 상징하는 물건이자 높은 수익성을 보장하는 사치품인 동시에 최고 수준의 기계적 정밀도를 보여주는 발명품이기도 했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스스로 돌아가는 시계는 신이 만든 창조물에 비유되었다. 초기 계몽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는 인간의 몸과 영혼이 두 개의 시계 바늘처럼 조화를 이루며 작동한다는 관념을 설파했다.
시계 제작자들은 중세 자물쇠 제작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들만의 독자적인 길드를 결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17세기에서야 유럽 전역에 길드가 형성되었다. 영국 국왕 찰스 1세는 1631년 8월 22일 런던 시내에 그들과 상당한 재정적 이해관계가 있는 ‘고명한 시계 제작자 협회’의 설립을 승인했다. 시계와 부품 제작은 리버리 컴퍼니의 회원만 제작할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 활동하려면 5년의 견습 과정이 필요했다. 이들은 교육시간, 상품의 품질 및 시계 거래를 관리하며 경찰의 도움으로 작업장과 창고, 심지어 선박까지 수색할 수 있었다. 오늘날 리버리 컴퍼니는 여전히 존속할 정도로 전통이 있지만, 이제는 그 영향력이 과거처럼 강력하지 않다.
215쪽
이탈리아의 도시 크레모나는 안드레아 아마티(1525~1577)와 그의 아들 안토니오(1560~1649), 지롤라모 아마티(1555~1630)가 만든 바이올린으로 위대한 명성을 얻었다. 지롤라모 아마티의 아들 니콜라 아마티(1596~1684)는 바이올린 제작자들의 왕조를 세운 안드레아 과르네리(1623~1698)의 스승이었으며, 그의 손자인 바르톨로메오 주세페 과르네리(1698~1744)가 남긴 악기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매우 희귀하다. 바이올린의 거장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는 과르네리에 헌정하는 〈카노네 과르네리우스〉를 연주하기도 했다.
니콜라 아마티의 제자,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악기 제작 장인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1644/48~1737)는 대략 1,100대에 이르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기타, 하프를 제작했다. 이 중 60여 대의 첼로를 포함해 650대의 악기가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220쪽
전기화’는 곧 ‘현대화’를 의미했다. 1907년 베를린의 목공소는 446곳 중 409곳이 전기 모터를 사용해 전체 작업장의 91.7%를 차지했다. 반면 바이에른은 453곳 중 164곳으로 전체의 36%에 불과했다.²⁴ 결국 8년 후 뉘른베르크는 상업적인 전기화에 관한 한 단연코 바이에른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였다. 이로써 독일 일부의 중심지에서 시작한 근대화는 점차 많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전기가 수공업 분야까지 스며들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지만, 전기의 사용은 기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전통 수공업은 주로 도구를 사용하여 작업을 수행하였지만, 현대에 올수록 점점 더 많은 공작 기계를 사용하여 조립, 톱질, 절단, 가공, 드릴링, 회전, 침식, 밀링, 대패질, 파일링, 연마 등의 수많은 작업 공정을 용이하게 하였다. 오늘날에는 적어도 이러한 기계들이 아마도 최소 70개에서 최대 100개까지 존재하며, 다양한 특수 설계가 연구됨에 따라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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