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자들, 마침내
『“자본”을 읽자』를 읽을 수 있게 되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정초자 알튀세르
그가 제자들과 불러일으킨 지적 사건, 『“자본”을 읽자』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현대 프랑스 철학을 구성하는 중심 조류다. 그러나 1989~1991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상은 전 세계에서 힘을 잃었고, 프랑스에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도 힘을 잃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현대 프랑스 철학 전체와 프랑스 인문사회과학에 강한 효과를 생산하고 있다. 루이 알튀세르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정초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장-폴 사르트르가 언급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이론적 기여에도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적 현상학을 주창했고, 그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하려 시도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알튀세르와 갈라선다.
알튀세르가 단독으로 쓴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제자들과 함께 쓴 『“자본”을 읽자』는 현대 프랑스 철학 내에서, 그리고 당대 서방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정초한 책이다. 두 권의 저서는 1965년에 몇 주 간격으로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다. 이후 이 두 책은 현대 프랑스 철학, 더 넓게는 프랑스 지성계, 심지어는 전 세계 지성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50~1960년대는 현대 프랑스 철학계 내에서 구조주의가 유행하던 때였는데, 이와 평행하게 프랑스 지성계 내 마르크스주의에서도 구조적 마르크스주의가 지적 헤게모니를 잡았다. 그렇게 알튀세르와 그 제자들은 프랑스 지성계 내에서 구조적 마르크스주의를 정초했고, 현대 프랑스 철학 내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구조적인 견지에서 구축했다. 『“자본”을 읽자』 덕에 알튀세르는 물론 그의 제자들 모두 젊은 나이에 굉장히 유명해졌다. 이후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시키거나 비판한다. 이들 중에는 알튀세르를 떠난 이도 있고, 알튀세르에게 충실히 남은 이도 있다.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를 떠난 인물로는 자크 랑시에르가 대표적이다. 여하튼 지식인 개인에게든 당대 프랑스 지성계 전체에든 1965년 출간된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는 말 그대로 하나의 ‘지적 사건’이었다.
여전히 『“자본”을 읽자』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마르크스주의가 가진 현재성 때문이다!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은 그러나 새로운 사조들이 등장하면서 퇴조했다. 각국의 지성계에서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지적 헤게모니를 잃으면서 알튀세르의 철학도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렇다면 오늘날 굳이 왜 이 질릴 정도로 두꺼운 책을 읽어야 하는 걸까? 그 가장 큰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성 때문이다. 최근 출간된 사이토 고헤이의 ‘자본론’ 입문서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에서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늘날에도 마르크스가 붙잡고 씨름했던 노동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더는 노동 문제를 진지하게 사유하는 이론, 특히 철학이 거의 없다. 그리고 당연히 마르크스주의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이도 거의 없다. 경제학에서든 철학에서든 사정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노동 문제는 AI를 비롯한 기술 발전으로 인해 더욱더 우리의 사유를 요청하고 있다. 고헤이도 지적하듯 이 문제를 정면으로 성찰한 마르크스주의만큼 적절한 사유의 도구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날 마르크스를 다시 읽어야 한다.
구조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결합
다종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한 마르크스주의
그렇다면 마르크스를 어떻게 다시 읽어야 할까? 일본에서 사이토 고헤이가 수행했듯, 독일에서 미하엘 하인리히가 수행했듯, 미국에서 낸시 프레이저가 수행했듯 마르크스를 ‘다시’ 읽어야 한다. 지금 여기 우리가 놓여 있는 오늘날의 이 현실에 적합한 마르크스를 빚어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알튀세르가 이미 그러한 작업을 매우 깊이 있게 수행했던 것이다. 현대 프랑스 철학이 생산한 작업뿐 아니라 한국, 독일, 일본, 미국 등 각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작업 중에서 여전히 알튀세르가 정초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그중에서도 특히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강한 현재성을 느낄 수 있다. 각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를 다시 읽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그중에서도 알튀세르의 작업은 마르크스가 오늘날에도 유효한 사상가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대표 역자 진태원의 해제를 참조할 것을 권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알튀세르의 작업은 마르크스주의의 교조화를 비판하면서 마르크스주의가 비마르크스주의적인 사상들과 혼종적으로 결합될 수 있게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 차원에서 개방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마르크스주의가 다른 사상들과 교차할 수 있도록 마르크스주의의 굳게 닫힌 문을 활짝 연 것이다. 구체적으로 알튀세르는 1960년대 당시에 현대 프랑스 철학, 그중에서도 특히 구조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결합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 번 열린 문은 쉽게 닫히지 않기에,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다양한 사상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마주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1989~1991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에도 1993년 자크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지나 미하엘 하인리히와 낸시 프레이저의 작업을 거쳐 오늘날의 사이토 고헤이의 생태사회주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주의가 다종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알게 모르게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알튀세르가 개방한 이 문으로 들어갔다 나온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올바르게 독해되지 못했던 『“자본”을 읽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 책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언급해 보면, 전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과학과 철학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과학이란 오늘날의 분과 학문으로는 경제학을 말한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는 우리가 정치경제학이라고도 부르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 그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 과학, 즉 경제학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결국 『자본』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하게 많이 논의해 왔지만 정작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대해서는 제대로 논의해 오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 두 저서를 통해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재구성하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버려 두고 마르크스주의 과학만을, 즉 경제학만을 재구성하고자 시도함으로써 오히려 이러한 작업에도 실패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자본』 또한 올바른 방식으로 독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연과학과 과학철학 간 관계를 떠올려 봐도 좋다. 물론 이는 알튀세르가 이후에는 멀리하게 되는 관념이지만, 자연과학의 성과를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이 자연과학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이라는 과학적인 경제학 저서를 집필했지만 이를 올바르게 향유하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은 철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러한 철학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 이외의 철학사 내 사상가들의 도움으로 그 철학을 재구성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였다. 다행히 『마르크스를 위하여』는 알튀세르 연구자 서관모의 번역으로 2017년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번역이 되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을 읽자』에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벼려 낸 철학적 개념들을 배경 삼아 ‘철학자’로서 제자들과 함께 『자본』을 본격적으로 읽는다. 서문에서 그는 『자본』을 올바르게 읽어 내기 위한 여러 철학적 개념을 제시한다. 가령 ‘증상적 독서’, ‘문제 설정’, ‘읽기와 보기’, ‘지식 효과와 사회 효과’ 등이 그것이다. 이후 자신의 논문 「“자본”의 대상」에서는 『자본』을 어떠한 인식론적 관점에서, 결국 어떠한 철학의 견지에서 읽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렇다면 공저자인 그의 제자들은 어떠한 논의를 전개했을까?
자크 랑시에르는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자본”까지의 비판 개념과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1844년의 『경제학-철학 수고』와 『자본』에서의 비판 개념을 비교하고, 이에 기반해 『자본』의 기획인 ‘정치경제학 비판’이 무엇인지 다룬다. 피에르 마슈레는 「“자본”의 서술 방식에 대하여(개념의 노동)」에서 『자본』이 어떤 방식으로 쓰였는지를 다룬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역사유물론의 기본 개념들에 대하여」에서 ‘생산양식’, ‘구조의 요소들’, ‘재생산’, ‘이행’이라는 역사유물론의 기본 개념들을 하나하나 해설한다. 『자본』이라는 과학적 저서는 하나의 경제학을 구성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의 과학적 사유를 형성하는데 이를 역사유물론이라고 부른다. 이 역사유물론을 구성하는 네 가지 기본 개념을 『자본』을 기초로 해서 철학적인 방식으로 벼려 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로제 에스타블레는 이렇게 완성된 『자본』이 어떤 구도를 취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즉 『자본』이라는 광대한 저서를 탐험할 때 필요한 일종의 지도를 그린 것이다.
『자본』을 올바르게 읽으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자본”을 읽자』!
오늘날 노동의 문제가 더욱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라는 진단에 동의한다면, 이 문제를 가지고 마르크스가 씨름해 써낸 저작 『자본』을 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알튀세르가 지적하듯 『자본』을 『자본』 그 자체로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이는 『자본』을 잘못 이해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자본』을 『자본』 그 자체로 읽는 작업은 필요불가결하지만 『자본』만을 읽는다면, 그러니까 알튀세르식으로 말해 마르크스주의 철학 없이 『자본』을 읽는다면, 과거의 독자들처럼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 교조화라는 잘못된 길 말이다. 자연과학이 과학철학의 도움을 통해 이해되듯, 마르크스의 『자본』 또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통해 더욱 적합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이 책은 그래서 필요하다. 물론 일반 독자들은 앞서 언급한 고헤이의 책들을 포함한 여러 좋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입문서를 통해 『자본』에 접근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런 입문서가 『자본』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통로를 구성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본』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이로써 우리가 노동자로서 처한 현실을 더 입체적으로 보고 싶다면, 입문서에서 멈추지 말고 이후 반드시 『자본』을, 그리고 이와 나란히 『자본』에 관한 철학서를 읽어야 한다. 『“자본”을 읽자』가 일반 독자가 읽기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책처럼 보이더라도 『자본』을 제대로 읽고 우리가 노동자로서 처해 있는 현실을 입체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자본』과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는 것은 필요불가결하다.
결론적으로, 독자들은 『“자본”을 읽자』를 읽음으로써 『자본』을 올바르게 읽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효용이다. 『자본』에 관한 여러 입문서가 존재하지만, 입문서만으로는 『자본』의 진정한 가치를 향유할 수 없다. 그렇다고 『자본』 그 자체를 읽는다고 해서 『자본』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자본』을 해석하는 다른 책들, 그중에서도 철학책들이 필요한 것이다. 『“자본”을 읽자』는 『자본』이라는 과학책 또는 경제학책과 하나의 쌍을 이루어 『자본』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철학책이다. 노동의 문제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심각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라면 『자본』을 읽기 위해 이 책의 독서에 도전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