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책을 통해 인간은 실수, 실패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려 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무수히 갖게 되었습니다. 무작위적인 불행.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에게만 닥친 것 같은 비극에 허덕였지만 독서가 상황을 바꿨습니다. 비극들을 연결시키고,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인간사에 당신이 보편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비극이 당신을 성숙시키면서 당신은 드디어 자기 존재의 외투를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_12쪽
대통령이 되려면 이제 5,000만 개개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각자가 다 다르거든요. 불가능하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과 평화》만 읽어도 599명, 자기의 얼굴을 가진 사람들의, 각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효율적이지 않다고요? 대표적인 이야기만 들으면 된다고요?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다수의 이야기를 들을 뜻이 없는데 어떻게 국민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개인의 뜻 전부를 국가 정책에 반영할 수 있겠느냐고요? 당연히 안 됩니다. 어떻게 모두의 요구를 다 수용하고 집행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건, 권위주의 시대의 발상입니다. 대통령의 역할은 이제 명령하고 따라오라고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개인들의 생각을 조정하고, 서로의 대화를 이끌고, 차이가 있으면 중재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리더십입니다. 그러려고 대통령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러면 목표를 수정하고 골목대장에 만족해야 합니다. 누구의 이야기가 진실이라거나, 옳다거나, 그런 것을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각각의 이야기가 어떻게 다른지, 또 어떻게 가끔은 ‘콜라주’를 이룰 수 있는지 체득하게 될 것입니다. _12~13쪽
청와대 연설비서관으로 일하면서 ‘내가 이 일을 하려고 그토록 책을 떠나보낼 수 없었나 보다’ 하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대통령과 호흡을 맞추려다 보니 수시로 청와대 여민1관 지하의 도서관을 들락거려야 했습니다. 서너 권의 책을 탐독한 끝에 연설문 한 줄을 쓴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국민 전체가 아닌 개인, 포괄적 현장이 아닌 바로 그 자리,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오늘의 역사에 맞춤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읽었던 책을 다시 뒤적이며 단지 대통령만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역사, 개인들의 분투를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의 독서는 비단 대통령 한 사람의 독서가 아니라 이 나라의 독서입니다. 또한 당신의 독서가 대통령의 독서입니다. 타인과 공존하는 사회를 그리는 마음으로 정의와 민주주의, 경제와 과학, 외교와 통상, 역사와 인물에 대한 책을 읽어 본다면, 당신은 그저 직함만 다를 뿐 대통령과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어 보는 가장 알찬 방법이기도 합니다. 대통령 역시 그런 당신을 함부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존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탄소 배출을 줄이자는 구체적인 목표 안에는 분명 당신들의 목소리가 조화롭게 담겨 있을 것입니다. _14~15쪽
2020년 6·25전쟁 70주년을 앞둔 두어 달 전, 문재인 대통령이 내게 생각을 물었다. 두어 달 전은 이례적으로 이른 시간이었다. 6.25를 국민 의식이 싹트고 국민 전체의 정체성이 형성된 과정으로 설명하면 국민통합에 기여할 것이라 말씀드렸다. 대통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새해 들어 고민의 상당 부분을 6·25전쟁 70주년에 할애하고 있었다. 수복지구에서 자란 소년에게 6·25전쟁은 아버지 삼 형제의 인생 전부이기도 했고, 6·25전쟁의 제대로 된 기억과 평가 없이 한반도 평화 또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라 일찍부터 생각해 온 터였다. 그날의 연설문을 많은 시간 공들여 손보고, 대통령과 여러 번 성의껏 검토했다. 평범한 국민의 시각에서 역사를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역사로 전진하려는 대통령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태극기와 촛불이 한마음으로 물결치면 좋겠다는 소망도 커졌다. _107쪽
애국은 언제나 거창하지 않은 것에서 시작한다. 가족과 이웃, 된장독과 텃밭, 일터와 반복되는 일상, 사투리와 모국어, 평범한 삶이 나누는 소박한 애정이 비상 시기에 애국으로 드러난다. 하찮아 보이는 몽당연필에 한 사람의 삶이 녹아 있고 낡은 구두와 녹슨 연장에도 삶이 이뤄 놓은 존엄함이 담겨 있다. 누구도 뺏을 수 없고 함부로 폄훼할 수 없는 것이다. 애국은 영토와 재산, 생명을 지키는 일이지만 무엇보다 한 개인의 존엄한 삶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에 소중하다.
위정자들이 팔아먹은 나라를 국민이 되찾은 것은 늘 자기 삶의 존엄을 지켜 왔기에 가능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 선생은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강압으로 합병조약이 체결됐을 때 이렇게 말했다. “일반 백성의 뜻을 말하자면, 표면으로는 본래부터 침착하여 아무 일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저 꼬불꼬불한 좁은 거리의 노래에도 어두운 방 안의 울음에도 어느 하나 조국의 사상 아닌 것이 없다.” 매국노들의 설레발과 자화자찬, 일황이 내린 은사금을 나눌 때 선생은 비분강개를 감췄다. 저 도도한 백성들의 삶을 믿었다. _169쪽
통합은 언제나 막연하고 조금은 거창하게 들린다. 정치 지도자라면 누구나 ‘국민통합’을 외치지만 진정으로 사회를 개선하려는 것인지, 진전을 위한 열망인지 잘 모를 때가 많다. 통합 뒤에서 이념으로 편을 가르고, 지역주의를 조장하고, 경제적 격차를 더욱 심화한다면 그것은 한낱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은 동서 화합을 위해 노력했고, 용서를 실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균형발전으로 격차를 줄이려 했고, 상식이 통하는 정치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 했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기득권과 싸운 노무현 정신을 배우겠다” 했고, 국민통합을 강조했다. 그런데 궁금하다. 대통령들이 저토록 통합을 외치는데, 왜 양극화는 깊어지고 갈등은 점점 커질까. 왜 자꾸 뒤돌아 갈까.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을까. 고민과 후회가 깊어진다.
통합은 새 떼의 비상 같다. 흩어졌다 모이고 한곳으로 향하다가 다시 흩어진다. 삶이 그렇듯 한결같을 수 없다. 제각기 원하는 대로 흘러가다가 때때로 경이롭게 뭉친다. 그렇다. 통합은 정치적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정치에서 통합은 흔히 전제주의로 빠지기 쉽다. 통합은 개인의 ‘도덕적 투쟁’(빅토르 위고, 〈세 아이〉, 《93년》)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우리 사회에 보수든 진보든, 20대든 70대든,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모두 나름의 생각과 삶이 있다. 보수에는 인간에 대한 끝없는 믿음이 있고, 전통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있다. 진보에는 변화에 대한 유연성이 있고, 역사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 있다. 통합은 저마다의 정직한 삶을 기반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일에 달렸다. _205~206쪽
광흥창역에서 내려 매일 아침 서강대교를 걷고 달려 여의도로 갔다. 가장 먼저 도착해 커피를 타고 자료를 읽는 경험은 아주 색다른 자신감을 주었는데, 그때 어렴풋이 발견한 건 달리기가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글쓰기 능력이 도약할 수는 없는 법, 단지 그동안 읽은 것, 그동안 생각한 것을 자신 있게 담아낼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났다. 물어 볼 수 있는 힘, 다른 의견을 담아낼 수 있는 여유, 고치고 또 고칠 수 있는 집중력이 자라났다. 자신이 쓴 것에 대한 책임감은 덤이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일찍부터 달리기에 빠져들었다면, 부끄러운 결과물이 조금이나마 줄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끔 몸을 부르르 떨었다. _220~221쪽
연설이나 강연은 구체적인 청중을 대상으로 한다. 가령 사관학교 졸업식 같은 경우 신임 장교로 그 대상이 명확하다. 그렇지만 그 연설을 듣는 것은 그들뿐이 아니다. 넓게는 국민 모두를 향한 안보와 국방 연설이기도 하다. 외교 무대에서는 조금 복잡해져서 그 나라의 국민과 우리 국민을 동시에 청자로서 염두에 두지만, 좀 더 세분하면 그 나라의 정부와 국민을 구분하기도 한다. (…) 사람은 누구나 지금 자신이 도달한 자리에서 세상을 해석한다. 여전히 주종 관계에 머물러 있는 이들에게는 연설 곳곳에서 문 대통령이 중국에 예를 다하는 소국의 대통령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중국과 가까워질수록 혈맹과의 관계가 걱정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성숙이 바탕이 된 자존감, 주도해 보겠다는 자신감을 가진 이들이라면 문장마다 존중과 겸손을 읽고, 이를 통해 중국 인민을 한편으로 만들어 실익을 얻으려는 실용적인 태도를 봤을 것임이 분명하다._253~254쪽
어느 날 연설문 수정본에서 ‘반칙과 특권’이라는 두 단어를 만났다. 문재인 대통령이 연필로 꼭꼭 눌러쓴 것이다. 왜 전직 대통령의 특허 상품을 가져다 쓰실까, 생각하다가 2018년 삼일절 연설문을 작성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대통령은 나를 불러 독도 이야기를 넣자 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받아 적었다. 사무실로 내려와 살펴보니 노무현 대통령의 널리 알려진 독도 연설과 매우 유사했다. 연설비서관이 전임 대통령 연설을 베꼈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옹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퇴근길 버스 안에서 무릎을 쳤다. 일부러 외우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럴 리 없다, 직접 관여했거나 함께 작성한 것이 아니라면 저리 똑같이 불러 줄 수 없다, 적어도 두 사람의 공통된 철학이었음이 분명했다.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도 그렇다. 두 사람이 오랜 시간 수시로 공유한 언어였으리라. 물론 두 사람과 함께했던 김 전 지사에게도 굳은살처럼 심장에 박였을 언어였다._274~275쪽
여름 휴가철에 대통령들이 읽은 책들에 주목해 본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혜를 키운다. 과거의 스승과 만나고(《맹자》 《배는 그만 두고 뗏목을 타지》), 미래를 구상한다(《지식자본주의 혁명》 《미래와의 대화》). 노무현 대통령은 공격적이다. 과학으로 갔다가(《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위기 돌파의 지도력으로 옮겨 갔다가(《코끼리를 춤추게 하라》), 현실 정치로 돌아온다(《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것 자체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요구였다. 호남의 지지로 영남의 대통령이 탄생했다. 무명의 시민들이 선두에 섰다. 정치권, 권력 기구들이 크게 요동쳤다. 노 대통령 역시 가 보지 못한 길이었다. 선명한 개혁의 추진으로 지역감정을 해소해 보려 했을 것이다. 센 역풍을 맞았지만 국토 균형 발전으로 돌파했다. 적어도 새로운 세계의 청사진은 남겨 놓았다. 정치 지형 변화에 대한 고민과 열린우리당 창당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을지 책 속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_275~276쪽
짧은 여의도 생활에서 느낀 게 있다. 우리 정치에는 ‘오늘’만 있다. ‘어제’가 없다. 어제 무엇을 했는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무감각하다. 어제를 떠올리자고 하면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는, 한가한 사람이 된다.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밀려난다. 역사의 교훈은 말해서 무엇하랴, 정치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내일’도 없다. 일단 오늘 권력을 갖는 게 중요하다. 내일은 그 뒤의 일이다. ‘오늘’, 오늘만 반복된다. 필요한 이야기, 적절한 인물을 오늘 모두 써 버린다. 마치 내일 자신들만 남을 것처럼 오늘 죽자 살자 거친 언행을 불사한다. 이슈가 이슈를 밀어내고, 뉴스가 뉴스를 덮는다. 백년대계는 말해서 무엇하랴, 정치에 필요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정치인 한 사람을 보면, 한 집안이나 나라의 기둥이 될 만한 동량지재(棟梁之材)다. 처음부터 오늘에 안달복달했을 리 없다. 나라의 어제에서 뜻을 찾아 국민의 내일을 걱정했을 사람들이다. 다만 기회를 보다가 뜻을 묵혀 버리거나 권력이 주는 이익에 취해 어느새 뜻이 있었는지조차 잊은 듯하다. ‘그놈이 그놈’으로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좋은 인재들을 친(親)·비(非)로 나눠 사익을 앞세우는 사이, 국민을 위해 무엇을 설계하고 있는지, 정치가 안갯속에 숨고 말았다. _326~327쪽
책이 모든 걸 알려 줄 수는 없다. 책이 아니고도 지혜를 얻을 방법은 많고, 글을 못 배웠을지라도 떨어지는 나뭇잎만으로 큰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독서가 한 사람의 삶에서 꼭 필수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기 확신은 무지에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 오만함이 시원해 보이기도 한다. 책은 읽는 사람을 끊임없이 겸손하게 하고, 자기 생각을 의심하게 하고, 심지어 다른 책으로 옮겨 가도록 유혹하기 십상이어서 책을 많이 읽을수록 함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물론 논쟁에서 우위를 갖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그렇다고 책이 사라질 것 같진 않다. 움베르토 에코는 책이 수저나 망치나 바퀴, 또는 가위 같은 것, 즉 일단 한번 발명되고 나면 더 나은 것을 발명할 수 없는 그런 물건이라 말한다. 에코와 대담을 나눈 장클로드 카리에르도 영화와 라디오, 텔레비전조차 책에서 아무것도 빼앗지 못했다고 한다(움베르트 에코·장클로드 카리에르, 〈책은 죽지 않는다〉, 《책의 우주》).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쓰기와 읽기에 대한 필요성은 더 절실해졌고, 자기 생각을 표현할 일도 더 빈번해졌다. 자신의 효율성을 이미 증명한 책은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가 변할지언정 지금의 그것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_341~342쪽
독서는 행위 자체로 소통이고 즐거움이기에 책 읽는 대통령들은 버지니아 울프의 바람처럼 왕관이나 월계관 같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수습보다는 예방을 우선하고, 권위보다 자발성을 중요시하기에 그 성과조차 모르고 지나가거나 한참 지나서야 드러난다. 독서는 윤리의식을 키웠다. 자기를 점검하고 부정한 곳에 발도 들이지 않게 했다. 미래를 예측하는 시야도 밝아지게 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인기 없는 정책을 시도하고 미래에 성과와 공을 배려했지만, 그들을 기억하면 지금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어도 대한민국이 좋아진다.
저 위에서 한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듯 서로에 대한 판단이 거침없는 시대다. 기실 한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만나서 대화하고, 거기서 자신 스스로도 열어 봐야 한다. 과거의 사람이라면 결국 책으로 만나 대화해야 할 것이다. 책이 모든 걸 알려 줄 수는 없더라도 역지사지의 태도에 익숙하게 하고 우리를 합의점으로 데려다주기는 할 것이다. _3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