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수필樹筆, 유토피아일까 헤테로토피아일까
숲에 든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숲의 목소리는 가만히 들어보면 내 속에서 나온다. 눈이 순해지고, 귀가 밝아지고,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은 숲에 안겼을 때다. 저 초록의 순정함과 피톤치드의 향기로움에 눈이 열리고, 코가 편안해진다. 질 좋은 산소를 만나 폐도 이완한다. 비좁은 아파트에 깃들어서도 식물을 놓지 못하는 나는 내 안의 정원을 넓혔다. 그 속에 나무가 자라고, 풀밭이 생기고, 더러 꽃도 피고, 바람이 불어 흔들리기도 한다. 숲은 나를 들뜨게 하는 녹색 바람이다. 멀미 나는 세상에서 나는 그냥 초록이고 싶다.
이십 년 넘게 수필로 세상 보기를 추구해왔다. 미력하나마 내가 글쓰기 작업에서 들여다보는 것은 흔들리는 세상사다. 대부분 졸작이지만 골라보니 스스로 수필樹筆이라 칭하고 싶은 수필隨筆이 마흔다섯 편이 되었다. 아르코 창작기금을 신청하면서 목본 에세이와 초본 에세이, 둘로 나누어 놓고 제목을 지었다. 〈나무처럼만 풀처럼만〉, 반복되는 조사 때문일까. 흔들리는 느낌이 짙어 사뭇 애잔하기도 하고, 진솔하지만 평범하기도 하였다.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에 휘둘려 환경파괴에 직면한 초록 생명들에게 흔들림은 어쩌면 작더라도 정서적 부담을 지우는 일이 될까.
출판을 앞두고 오랫동안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원고에서 제목이 걸어 나왔다. 〈나무의 응시, 풀의 주름〉, 내가 들여다본 줄만 알았는데 그들도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응시란 내가 아닌 내 안의 모든 것들이 보아내는 것, 주름이란 무수한 차이들을 내부로 끌어들여 접고 관계 맺고, 새로움을 외부로 펼쳐내는 다양성의 축제 같은 것, 라캉과 들뢰즈에 힘입어 내 초라한 사유가 지붕을 얹었다. 쓰고 싶어 가슴이 뛸 때 객관적 상관물을 찾노라면, 내 속의 숲은 거절하지 않고 적합한 나무나 풀을 내어준다. 그럴 때 초록 이미지는 내 삶을 비추는 청동거울이다. 안쓰러운 피해자이기도 하고, 말하지 않고도 인생사 험한 결을 파헤치고 어루만질 수 있게 길을 안내하는 친구며, 스승이 되기도 한다. 나는 끙끙대며 주체도 타자도 구별할 필요 없는 자연스러운 세상을 기다린다.
올여름은 지독히 더워 추석 지나고도 에어컨을 돌렸다. 우리나라가 아열대가 되리라 한다. 세계 곳곳에서 가뭄과 홍수로 재앙을 겪었다. 이식한 채소 모종이 말라 죽어 농부는 식재를 포기하고, 야채와 과일이 금값이라 하였다. 인류가 저지른 무모한 자연파괴, 무분별한 개발, 탐욕스러운 대량생산과 소비가 불러온 생태계의 위기를 어찌 감당해 낼지 불안하기 그지없다.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며,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있는 신도 아니지 않은가. 인간도 자연의 한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은 건 엄청난 패착이다. 오만했던 인간중심주의의 깃발을 내던지고, 생태적 합리성을 회복하고, 생태적 상상력으로 지구를 에코토피아로 만들어 가는 길에서 인간과 자연은 결코 둘일 수 없다.
베란다 숲이 나름 울울하다. 크고 작은 관엽식물과 풀꽃 화분들이 자리를 바꿔가며 더불어 산다. 빛을 찾아 가지를 비튼 나무의 방향을 돌려주며 그 마음을 읽는다. 벅찬 짐수레를 끌 듯 내 허리가 구부러질 때 나무 그늘에서 듣는 비밀의 언어는 다시 나를 수직으로 세운다. 날마다 창밖으로 먼 금정산을 읽고, 앞창과 뒤창을 열어 아파트 숲과 시민공원의 푸르름을 점검하며 내 안의 숲을 깨운다. 내가 새잎으로 다시 연해지고, 싱싱해진 숲이 되어 금정산 오솔길에 들어서면 숲이 나일까. 내가 숲일까.
내 숲으로 오세요/ 나무의 응시, 풀의 주름/ 나무의 아랫도리에 흥건한/ 풀이 영겁의 시간을 엮어요/ 녹음 우거진 내 숲으로 오세요
초록잎 무성한 숲의 언어에 차별은 없다. 나무와 풀, 산과 산림을 지향하는 나의 식물수필이 지향하는 것은 지상에 있는 헤테로토피아의 세계이지만, 나아가 내가 숨 쉬고 발 디딘 전체 삶터가 생명 가득한 초록 세상이 되기를 기원한다. 발간에 도움을 주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감사드린다. 에너지 넘치는 젊은 번역가, 조수진Sue-Jean JOE 교수님과 문학의 길을 함께 하는 스승님과 문우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분들 모두 내게는 청정한 생명의 숲이다.
■작품 속으로
뿌리혹
누구나의 가슴에도 빙하는 흐른다고 하였다. 가슴속 빙하는 지하수로 흐르다가 덮개가 단단하지 못한 부분을 찾아 용출한다. 차게 흐르던 내면의 온도가 외부의 온기를 느끼고 누그러지면 비로소 안도의 숨길을 찾는 것, 마음속 상처는 그런 것일까.
기묘한 뿌리혹들이다. 천리포 수목원에서 만난 분화구들을 어찌 설명할까. 연못가를 걷는 오릿길을 돌아 나오다가 낙우송 무리를 만났다. 수사처럼 엄숙하게 도열해 있는 나무둥치 아래에 생경한 것들이 눈길을 끌었다. 판타지 영화에서 보던 가상제국의 축소판인가. 땅에서 솟은 수많은 돌기가 수석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앉아서 세운 무릎처럼 여기저기 불쑥 솟은 기이한 것들, 뿌리도 아닌 것 같은데 땅에서 자라 올라온 종유석 형상이다. 푯말을 보니 식물의 뿌리 호흡을 돕기 위해 생겨난 기근이라 했다.
사춘기를 맞은 조카의 여드름처럼 터트려야 할 에너지가 툴툴대며 불쑥대는 것만 같다. 화구 폭발처럼 여드름이 솟고 나면 몸은 차분히 성장의 방향을 잡지 않을까. 성숙으로 가는 길은 우둘투둘한 산길이기도 말끔한 페이브먼트이기도 하지 않던가. 요모조모 살피며 관심을 기울이는 내가 부담스러운지 다들 돌아앉은 모양새다. 정체성을 의심받는 고통을 알아버린 것일까. 주변인의 설움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애잔함이 일어 이곳, 천리포수목원의 낙우송 앞에서 주저앉는다. 오면서 어느 시인의 부음을 들었던 까닭이다.
시인은 낯빛이 검었다. 말수가 적고 진중하여 뵐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새까만 후배인 내게도 예를 다하시는 모습과 나직한 목소리의 울림 때문에 그분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내 매무새를 점검하곤 하였다. 단풍들기도 전에 시들어가는 낙엽처럼 그림자 드리운 안색이 걱정되었다. '예민한 감성과 투명한 직관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그가 풍기는 묘한 페이소스는 무겁고 어두웠다. 자리를 함께한다면, 술 한 잔에도 그의 내면에 찬 얼음물이 분수처럼 솟구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우울의 이유를 아는 데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퍼런 멍 빛깔의 삶이란 그런 것일까. 그는 중학생 아들을 왕따 사고로 잃었다고 한다. 본인이 근무하는 중학교에서 일어났던 일이라 했다. 교사로서의 자존감도, 아버지로서의 자부심도 허공으로 낱낱이 흩어져버렸고, 남은 것은 짙은 회한뿐이란다. 지인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순간 머리가 아파졌다. 치이고 패인 껍데기로만 남게 된 남자라니. 숨소리까지 슬퍼 보이더라니. 근력을 소진한 사람처럼 가라앉아 있더라니. 주렁주렁 온몸에 관을 매달고 하루하루 고통을 씹으며 연명하는 중환자처럼 그는 가까스로 살아내고 있었던 것 같다. 얼마나 외치고 싶었을까. 얼마나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을까. 낙우송 기근을 가만히 쓰다듬어본다. 까까머리 중학생의 머리통같이 반들거리는 기근의 꼭대기에 때늦은 조사弔辭를 얹는다.
“이제 평안하시지요.”
왠지 경건해진다. 나를 내려다보는 낙우송에게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일까. 낙우송은 높이가 반백 미터까지 자라는 교목이다. 거기다 팔백 년에서 삼천 년을 산다고 알려진 장수나무다. 사람은 이 나무를 우러러보고, 나무는 시야를 넓혀 세상을 살핀다. 온갖 새와 미물을 품는 넉넉한 품을 가졌고, 침엽수이면서도 고운 단풍을 보여주는 미적 감각이 남다른 식물이다. 우뚝 솟아 대기를 마음껏 숨 쉬면서도 따로 호흡뿌리를 가져야 하는 것이 왠지 안쓰럽다. 살아남기 위해 대를 이어가며 환경에 적응하고자 몸부림친 과정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먼먼 진화 과정이 시인의 삶을 상관물로 삼아 영상을 돌린다.
시인이 호흡한 세상은 어떠했을까. 분노가 들썩일 때, 바깥으로 뛰쳐나오는 울분을 잡아맬 방법은 없었겠지. 몇 겹의 울타리로 단속해 봐도 무의식의 천장을 뚫고 분출하는 슬픔을 어찌할까. 그는 그것들에게 숨구멍을 내주었던 것 같다. 진물을 말리고 까들까들하게 아물 수 있도록 속을 조금씩 내보이기 시작하였다. 시작詩作은 그의 평생의 업이 되었다. 카메라에 검은 천을 씌우고 순간을 기록하던 사진사처럼 삶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그는 암흑 속에서도 셔터 끈을 계속 잡아당겼다. 예술로 승화된 치유의식을 치르느라 바쁜 그를 나는 멀리서 속으로만 응원하였다. 흉터조차 세상을 보는 눈이 되고, 살아가는 기운을 마시는 코가 되기까지 그의 족적이 눈물겹다. 그래서일까. 그의 부고가 안타까웠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내 방에 걸린 고흐의 그림 속에도 낙우송 같은 나무가 있다. 화가는 말년에 우울증을 앓았다. 병원의 침대에 누워 창을 내다보면 유럽 낙우송이라 할 만한 사이프러스가 보였다. 수직으로 높이 뻗어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그 나무를 보고 그는 삶과 죽음이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유럽인들이 죽음의 상징으로 여기는 나무에서 삶을 보아낸 그의 예지 덕분에 명작은 세상을 위무하는가. 소용돌이와 파도 모양의 강력한 붓 터치들이 에너지의 흐름으로 나타나고, 살고자 하는 염원이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정신병원에서 보낸 생의 마지막 삼 년 동안 그를 위로하고 자아를 투영하게 했던 고흐의 그림 속 낙우송은 볼 때마다 내게 텔레파시를 보낸다.
하늘까지 닿을 듯 키를 뽑아내는 나무는 재크의 콩나무이기도 하고, 선녀를 데려가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준 두레박이기도 하다. 어릴 적 나를 따돌리려고 그렇게 노력하던 친구가 있었다. 전학 온 곱슬머리 아이였는데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 아이의 사주를 받은 몇몇 아이들이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괴롭혔다. 낙서하고 헛소문을 내고 길게 땋은 내 머리꼬리를 잡아당기거나 주먹다짐을 하고 도망가기도 하였다. 벗어나기 힘든 굴레였고 상처였다. 자존심의 부채로 부어오른 눈을 가리고 엄마에게도 이르지 않았던 그 일이 세상으로 나선다. 시인의 아들과 내 속의 어린아이가 손을 잡고 낙우송 기근들 사이에 나란히 선다.
“도움을 청하지 그랬니? 용기 있게 나서지 그랬니? 잊자꾸나. 그리고 깃털처럼 가벼워지려무나.”
내 생각의 방에서 이제 시인도 그림 속 낙우송이 된다.
가을이 오면 낙우落羽를 볼 수 있겠지. 고급스러운 갈색 깃털들이 세상을 한 바퀴 날고, 드디어는 상처에 내려앉을 터이다. 깃털이불이 기근을 감싸고 겨울 모진 추위를 막아주며 새봄을 기약하는 동안에 땅은 술 익듯 향기로운 자양분을 빨아들이고, 하늘은 더 가까워질 낙우송의 우듬지를 내려다보리라. 상처가 숨을 쉰다. 숨구멍을 가진 상처는 아물고, 그제야 낙우송은 둥근 열매를 맺는다. 나무도 사람도 한결 성숙해지는 시간에 나는 시를 읽고 싶다. 낙우송이 된 시인의 흔적을 시집 속에서 불러내어 함께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