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겨울 선인장』과 『바람이 분다』에서 주로 노년의 삶을 깊이 살펴온 권채운은 첫 장편 『반짝이는 것이 나를 이끌어간다』에서 유년과 청춘을 소환한다. 그럼으로써 부박한 삶 속에서 우리가 곧잘 망각하는 인간성이라는 보편적 진실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나 은은하고,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더하여 이번 장편에서 보여주는 세상을 향한 관조와 이해는 깊은 강물의 수면처럼 잔잔하면서도 그 수심처럼 웅숭깊다. 그 깊이만큼 반짝인다. 아마도 그는 반짝이는 것에 이끌려 다시 희망을 노래하려는 듯하다.
프롤로그에서 청춘의 한 날을 회상하는 ‘미자’의 마음길이 그것을 예고하고 있다.
무슨 대단한 사랑을 한 것도, 실연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냥 이참에 이 소망 없는 인생에서 하차하고 싶은 마음이 나를 기차에 태운 것은 아닐까. 나는 그들 보통 사람들이 내뿜는 활기에 떠밀려서 다음 역에 기차가 정차하자 기차에서 내렸다. 논산이었다. 역전식당에서 해장국물을 한 사발 들이켰다. 왠지 힘이 솟는 것 같았다. 나는 상행선 기차를 타고 돌아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씩씩하게 회사에 출근했다. 그날 이후의 내 삶은 덤이었다. 어째 덤으로 받은 것이 더 많은 인생을 살아온 것 같다.
눈을 돌리면 그 시선에 따라서 물별도 따라 움직였다. 바라보지 않으면 냇물도 그저 무심히 흘렀다. 반짝이는 것이 나를 살게 하는구나.(8~9쪽)
또한 그가 이전의 단편들에서 비극적 세태를 응시하고 풍자하는 방식을 취했다면, 이 작품에서는 격랑의 시대를 건너온 청춘들이 상처와 아픔을 어떻게 극복해왔는지를 핍진하게 보여준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았거나 혹은 잃어버린 ‘미자’의 가족, 산업화 시대를 살아낸 방직공장의 은수(삼순), 은미(삼숙), 은숙, 영자, 영옥, 인주, 미스 권, 미스 정, 미스 리…… 하지만 이들을 통해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시대의 아픔이나 역사적 현실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인물들 사이의 어긋나고 비껴가는 관계를 문제적으로 인식한다. 그들은 삶을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인 현실로 받아들이며, 그 현실이 아무리 척박하고 비극적이라고 해도 끊임없이 꿈꾼다. 그것이 바로 권채운 소설의 진수이자 미덕이다. 또한 권채운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소설을 쓰는 마음가짐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자신을 버렸기에 그녀 스스로도 어머니를 버리겠다고 다짐했음에도 ‘미자’가 어머니를 찾아 나서는 것은 자기 안의 불화를 잠재우고 다시 꿈꾸고자 내딛는 발걸음이다. 이어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그녀는 또 다른 꿈의 세계로 성큼 나아간다. 청춘의 고단한 삶 속으로 찾아든 책. 책 속의 신세계는 현실과 맞물려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요컨대, 이상적 삶의 열망에 들뜨다가 현실에 주저앉기도 하지만 다시 일어서며 달구어진 열망은 소설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권채운 특유의 진중한 사유가 빚어내는 해학, 묵직한 공명을 일으키는 입말, 거기에 자연에 대한 탁월한 묘사가 어우러진다.
권채운은 첫 소설집 『겨울 선인장』의 작가의 말에서 “세상에 혼자 내던져졌다는 생각이 들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오로지 소설만이 친구였다. 벼랑 끝까지 떠밀려 갔다가도 소설의 한 문장에 힘을 얻어 돌아설 수 있었다”라고 쓰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격랑의 시대를 살아온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삶의 보편성을 이야기하면서, 그 이면에는 글쓰기에 의한 삶의 통찰을 담고 있다. ‘미자’의 유년과 청춘, 중년과 노년에 이르기까지 주된 관심사를 두고 볼 때, 그녀가 글쓰기를 꿈꾸고 이루는 삶의 내력은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미자’의 삶에서 글쓰기는 그 자체로 무한한 빛을 발산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꿈도 꾸지 못했던 소설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당선 소식을 들은 그녀는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힌다.
행복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여러 가지 기쁜 일들은 내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나 혼자 힘으로 이루어낸 성취가 주는 뿌듯함이 내 몸속에 가득 들어찼다. 행복해서 잠 못 드는 밤은 감미로웠다. (……) 나는 내 팔자를 내 힘으로 바꾼 것이다.(140쪽)
시대의 아픔과 개인적인 상처들은 각기 다른 빛깔의 희망을 지으며 각 장마다 생생하게 변주된다. 설령 그가 냉소하는 순간에마저 마음을 붙들려 옴짝달싹 못하게 되는 까닭이다. 작품을 아우르는 그늘과 빛의 절묘한 조우, 그것을 지탱하는 고뇌와 의지는 삶의 진실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권채운 식의 꼿꼿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