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감각, 참신한 상상력으로 그린 새로운 동시 세계!
개성 있고 당당한 아이들의 푸릇푸릇한 이야기!
동심이 가득한 세계로 어린이들을 초대해 온 청개구리 출판사의 동시집 시리즈 〈시 읽는 어린이〉 155번째 도서 『고래가 온다』가 출간되었다. 홍재현 시인의 두 번째 동시집이다. 홍재현 시인은 2020년 『시와소금』신인문학상 동시 부문으로 당선되어 기존 동시와는 결이 다른 발상과 표현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고래가 온다』에 담긴 동시들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의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사고와 시각에서 벗어나 참신하고 독창적인 상상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동안 동시에서 논의되고 요구되어 온 문학성과 아동성이라는 두 개의 조건을 거뜬히 충족시켜 주는 시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하게 된다. 한 권의 동시집에서 거의 전편이 높은 시적 성취를 보이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홍재현의 작품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전편이 새로운 감성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먼저 표제작부터 함께 읽어보자.
은하수
물결을 헤치며
고래가 온다
펑펑
터지는 폭탄들
뿌연 연기에 갇힌
지구를 삼키러
고래가 온다
“꾸울꺽”
고래 배 속에 갇힌 사람들이
그제야 피노키오처럼 울부짖으니
불타던 지구가
사람들의 눈물로 식는다
어디다 뱉어 줄까
입안에서 지구를 굴리며
고래가 헤엄쳐 간다
―「고래가 온다」전문
「고래가 온다」는 “은하수/물결을 헤치며/고래가 온다”에서 보는 것처럼, 그 시작부터 압도적인 규모의 상상력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 바로 고래다. 실제로 고래가 사는 곳은 ‘바다’지만 신성한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은하수’라는 배경이 큰 이질감 없이 읽힌다.
어쨌거나 고래가 은하수를 헤치며 오고 있다. “펑펑/터지는 폭탄들/뿌연 연기에 갇힌/지구를 삼키”려고 말이다. 아직도 국가와 민족 간의 갈등으로 전쟁이 발발하고 있는 지구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래는 머뭇거리거나 지체하지 않고 곧장 지구를 “꾸울꺽” 삼킨다. 자비 없는 신 같은 모습이다.
고래의 배 속에 갇힌 인간들의 눈물로 불타던 지구는 서서히 식어간다. 눈물의 이유에 단지 두려움만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후회와 반성의 눈물도 있을 것이다. 지구를 삼키러 ‘오던’ 고래가 이제는 지구를 다시 어디에 뱉어줄지 고민하며 ‘가는’ 것으로 시가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이제 지구는 새로이 태어날 것이다. 한마디로 이 시는 우리가 반복해온 전쟁과 폭력과 자연 파괴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홍재현 시인은 이처럼 기존과는 차별화된 상상력으로 명확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삶과 정서를 이야기할 때도 명확한 인식과 주제의식이 드러난다. 「올바른 지우개 사용법」「하수구 민들레」「반딧불이가 나에게」「방문의 고백」「그네가 있는 오후」「대신」「눈 같은 17번」「손톱 자국」「싫어의 무게」「아기 장수의 전설」 등을 보면, 요즘 아이들의 현실을 분명한 주제의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무엇이 아이들로 하여금 집에서 멀어지고 싶게 하는지, 무서운 마음을 내비치는지, 남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지, 허연 손톱자국이 생길 정도로 주먹은 왜 그리 꽉 쥐었는지, 요즘 아이들의 아픔이나 상처를 공감각적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깊은 울림을 준다.
물론 홍재현 시인이 어둡거나 진지한 주제만을 다룬다는 것은 아니다. 일요일 아침 기상시간, 엄마와 아이의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속마음을 보여주는 「일요일 아침 눈치싸움」, 콧물이 나올락 말락 하는 순간을 잘 견디다가 때와 장소를 잘 지켜 풀어내는 콧물을 ‘모범 오토바이’라고 표현한 「모범 오토바이」, 멧돼지로 오해받은 산양이 구출된 실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유머 있게 그려낸 「오해」, 고라니가 출몰하여 밭이 엉망이 된 것에 대해 나팔꽃이 사과하는 내용을 담은 「나팔꽃의 자백」 등은 익살스럽고 유머가 넘친다. 이러한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홍재현 시인이 가진 ‘유머’가 단순히 우스꽝스럽거나 가벼운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된다. 아래의 작품을 읽어보자.
선생님,
이번 시험 점수는요
60점이에요
제가 아니라 선생님이요
제가 공부한 거
10개 중에 6개밖에 못 맞추셨어요
다음 시험에는
제가 뭐 뭐 공부했나 다 맞춰 보세요
딱 10개만 외울 거니까
―「선생님, 시험 점수」전문
화자는 선생님에게 “이번 시험 점수는요/60점이에요”라고 말하고 있다. 누구라도 이번 시험에서 화자가 받은 점수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60점이라는 점수는 그리 높지 않다. 어린 화자가 자신을 열심히 가르쳐준 선생님에게 자신의 시험 점수가 낮아서 민망해하는 상황이라 짐작될 만큼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제가 아니라 선생님이요”라는 행에서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전환된다. 곧 자신의 점수가 아니라 선생님의 점수라는 것이다. 자신은 열심히 공부했는데 무엇을 공부했는지 선생님이 60점밖에 못 맞추었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당돌하면서도 재치 있지 않은가.
평가 주체와 객체를 뒤바꿈으로써 아이러니적 통쾌함을 불러일으키는 시라고 하겠다. 시험 성적으로만 어린이의 존재 가치를 점수 매기는 상황을 비꼬는 통쾌한 장면이며, 그 주체가 어린이 스스로라는 점에서 더욱 빛이 난다. 시험을 잘 못 봐서 주눅 든 어린이가 아니라 당돌해서 더 새롭고 신선한 인물로 다가온다.
이처럼 이 동시집에는 언어유희와 아이러니를 활용해 새로운 감각을 보이는 작품이 다수 실려 있다. 조용한 도서관에 등장하여 신나게 책을 즐기는 「용감한 녀석」, 흔히 말하는 ‘삐딱선을 탄다’는 말에 착안하여 끝까지 어린이다운 유머를 잃지 않는 「삐딱선」, 재활용을 꿈꾸지 않는 버려진 물통의 이야기인 「플라스틱 물통의 꿈」, 덩치만 컸지 벌레를 아직도 무서워한다고 비난을 받고는 자기는 몸만 큰 게 아니라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에 대한 마음도 함께 커졌다고 항변하는 「마음도 컸어」와 같은 작품은 새로운 인물을 만난 즐거움을 선사한다. ‘피식’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유머는 덤이다.
이 외에도 언제나 따뜻한 조부모의 사랑을 그려낸 「할아버지 검정 꼬리」「가위바위보보보」「곶감 할머니」「숨은그림찾기의 달인」「가을 연두」「송충이」「제비꽃 떨어지면」「꽃밥」등과, 「금요일을 오르다」 「구름 도장」「달팽이의 가을」처럼 글자 배치를 통해 시각적으로 그려낸 작품, 「레벨 업의 조건」「섬」「코코아 처방전」「정상의 범위」「보물찾기」에서처럼 어린이청소년의 성장을 응원하는 작품도 새롭고 따뜻한 작품이라 일독을 권한다.
홍재현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어린 시절 자신이 품었던 소망과 욕망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린 나이였어도 현실의 잣대로 이래저래 스스로 포기해 버린 욕망들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간지럽다고 말이다. 이 동시집을 펼칠 독자들은 부디 너무 일찍 세상의 잣대와 평가 속에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길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독자들에게 닿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