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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루됨

인류학자의 세상 읽기


  • ISBN-13
    979-11-6909-155-8 (03300)
  • 출판사 / 임프린트
    주식회사 글항아리 / 주식회사 글항아리
  • 정가
    22,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4-12-11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조문영
  • 번역
    -
  • 메인주제어
    사회학 및 인류학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인류학 #에세이 #조문영 #빈곤 #불평등 #중국 #돌봄 #청년 #기후위기 #사회학 및 인류학
  • 도서유형
    종이책, 무선제본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28 * 200 mm, 388 Page

책소개

세계의 고통을

제 삶으로 연결해낸

공모자-저항자들

 

“이 세계 다수는 사실상 연루자다”

 

나에게 인류학적 세계 읽기란 단단한 이해를 거쳐 책임 있는 비판을 길어내는 과정이었다. 이해가 모든 앎의 가능성을 확신하는 오류에 빠져서도 안 되었고, 비판이 손쉽게 조준할 과녁만 찾는 것도 피하고 싶었다. 이해가 홀연한 불가지론에 닻을 내리면서 불의에 눈감게 되는 사태도 저어됐고, 비판이 제 수사적 고향을 판단의 유일한 준거로 삼는 것도 우려됐다. 타자를 이해하는 과정이 우리가 당연시해온 믿음, 가치, 윤리, 삶의 방식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길 바랐고, 이러한 비판이 무수한 세계의 마주침을 이끌어 삶의 이해를 확장하길 원했다. 이 과정은 때로 자기수양에 가까워서 ‘더’라는 어중간한 단어를 붙들 수밖에 없다. 더 단단한 이해를 거쳐 더 책임 있는 비판을 시도하기. 그리하여 진리를 포획한 권위로부터 이해와 비판을 해방시키기. _「서문」

 

“조문영은 함부로 희망을 선언하지 않는다.

세계가 주조한 몇 겹의 욕망에 우리 모두

깊게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_김윤영, 『창작과비평』

 

 

“그는 말과 말, 글과 글, 몸과 몸이 부딪치는 

‘마주침의 현장’을 중시한다. (…) 

‘개입하면 바뀐다’는 신조로 연구한다. 

마주침과 개입은 연루連累/緣累와 이어진다. 

‘남이 저지른 범죄에 연관됨’이라는 

사전 뜻이 아니라 잇닿고連, 인연을 맺으며緣, 

묶어내는累 감각을 확인하는 일이다.”

_김종목, 『경향신문』

 

 

책 소개

 

제64회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저자

『빈곤 과정』 조문영 신작

 

 

어떤 세계들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와 부대끼며 공존한다. 그 부대낌이 불편해 있던 곳을 떠나와도, 그것들은 모습을 바꾸어 끊임없이 재출현한다. 출몰하는 세계는 외면 가능한 타자가 아닌 집단적 삶의 조건이자 현상이 된다. 인류학자에겐 현장이다. 현장에 있기 위해 그는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를 집요하게 추적해가다, 그 길에서 때로 자기를 마주치고 심문한다. ‘연루됨’은 하필 자기와 맞닿게 된 특정한 세계와 관계 맺는 방편으로서 그에게 체화된다. 복작한 삶의 현장 바깥을 겉돌며 관망하기보다 그 속에 섞여들어 있기. 세계의 모순과 고통을 방관하기보다 공모를 인정하고 연루됨을 자처하여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그곳에 있기’라는 인류학자의 체험(클리퍼드 기어츠)은 연루되기를 통해 그만의 고유한 경험이자 삶의 일부가 되고, ‘이곳에 돌아와 쓰기’를 가능케 한다. 

한국과 중국의 현장에서 물리적·실존적 빈곤을 연구해온 인류학자 조문영은 생활에서 사회적 고통의 얽힘을 발견하고 바로 그 얽힘의 자리에서 길어 올린 연루의 감각으로 “더 단단한 이해”와 “더 책임 있는 비판”을 시도한다. 『연루됨: 인류학자의 세상 읽기』는 그가 2013년부터 2023년까지 10년간 여러 매체에 발표한 글을 이러한 관점에서 골라 엮은 책이다. 

 

 

묘한 긴장감, 강렬한 흥미

―세계를 마주치는 순간

 

이 책의 ‘나’는 인류학자이자 교육자-학습자, 가족 구성원, 동료 시민, 지구생활자다. 팬데믹 시기 거리두기를 뚫고 화면 밖으로 나온 학생들부터 가장 가혹한 형태의 재난을 “뭐 이까짓 것”이라 칭하던 쪽방촌 주민, 기후정의행진에 나와 ‘최전선 당사자’로 발언하는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까지, 그에게 마주쳐 오는 풍경은 낯익고 예사롭기보다 낯설고 기이하다. “긴장감, 강렬한 흥미, 희망과 불안, 조급함……”, 가능성을 예감케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마주침, 거기서 든 생각들이 이 책의 재료다. ‘나’는 그 자신을 포함해 세계와 세계들이 만나는 접점에서 눈을 빛낸다. 그의 눈에는 보통 사람의 고만고만한 일상도 어쩐지 눈이 가는 인물의 눈을 뗄 수 없는 모습으로 비친다. 그는 그냥 지나칠 법한 풍경을 무언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장면처럼 응시한다. 인류학자가 세상을 만날 때다.

 

현장연구를 시작할 때마다 엄습했던 설렘과 두려움이 불쑥 되살아난다. 연구실, 건물 복도, 신촌 거리 같은 지극히 평범한 장소에서. 익숙했던 게 불현듯 낯설어지자 감각이 예민해졌다. … 묘한 긴장감이 익숙한 풍경을 뒤집고 관행을 들쑤시면서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22-23)

 

이러한 긴장 속에서 쓰인 예순네 편의 글에서 저자가 주로 등장시킨 세계는 빈민, 노동자, 청년, 노인, 여성, 장애인, 원주민, 이주민, 지방, 비인간 등 이른바 ‘주변화’되고 ‘비가시화’되어온 ‘취약한’ 존재들의 세계다. 그런데 한 편 한 편 그의 시선을 따라 “그들이 품고 온 세계”를 읽어나가다 보면, ‘세계’ 앞에 어떤 수식어를 붙일 것인가 하는 문제란 그리 간단한 얘기가 아님을 알아차리게 된다. 너를 알려고 시작한 질문은 깊어질수록 ‘나’를 불러들인다. 단편적이고 편협한 경험의 교훈과 선험의 프레임, 구조와 개인이라는 모호하고 이분법적인 관계 설정이 통하지 않는 지점까지 밀착해갔을 때에야 접속 가능한 세계―저자는 그것을 이해해보려고, 이해해보자고 한다. 전작 『빈곤 과정: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에서 빈곤이 어디에나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듯이, 이 책의 세계들도 어느 하나 전형이 아니며 손쉽게 정의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빈자의 일상에 깃든 관계의 풍요가, “막장이 된 청년 논의” 바깥에서 청년들이 벌이는 논의가, ‘중국 국가’와 동의어가 아닌 중국인의 다채로운 삶이, ‘페미’로 싸잡히지 않는 페미니스트들의 전망이 눈에 들어온다. 복수複數의 세계는 끊임없이 재인식되고 확장되며 서로 연결된다. 

 

 

‘수사적 고향’과 ‘거부의 정치’를 벗어나

홀연히 작별할 수 없는 세계와 재회하기

 

그러한 마주침이 가능해지기 전에, 그가 떠나온 세계가 있었다. 저자는 「서문」에서 “같은 고향에 좀체 머무르지 못”한 부친과의 관계를 짧게 회고한다. “‘우리가 남이가’ 세계의 암묵지가 내 상식을 거스르는 일이 잦아지자, 나는 조금씩 집을 떠날 채비를 했다. 내가 애써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공감하고 위로받는 수사적 고향을 찾아 더 멀리.”(10) 공존하기 어려운 세계를 상징하는 ‘아버지’는, 인류학을 만난 후 그의 앞에 거듭 나타난다.

 

그런데 인류학에 입문하면서 타자를 연구하겠다고 발품을 팔기 시작하니 이곳저곳에서 ‘아버지’가 나타났다. 나를 반기면서도 불편해하는 사람들, 내 믿음을 수상쩍어하는 시선들, 내 감정을 휘저은 사회적 고통을 별것 아닌 듯 만드는 제도와 미디어. 고심하다 늦게 시작한 학문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내 아버지를 떠나듯 ‘아버지들’의 세계와 홀연히 작별하지 못했다. 그/것이 저 자신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무엇이 그/것을 꿈꾸거나 좌절하게 만드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었다. 그렇게 타자의 수사적 고향에서 비비적거리다 보면, 때로 차이들 심연의 공통성이 보였고, 이전의 내가 내뱉었던 독단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10)

 

그 세계는 20년 가까이 노동운동에 몸담은 중국인 여성 왕더즈로 등장해 말한다. “우리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비판하기에 앞서 상황에 대한 이해부터 했으면 좋겠다.”(161) 중국 노동운동이 여성과 성소수자 문제를 충분히 다루고 있지 않다는 지적에 대한 대꾸였다. 왕더즈의 말이 불러일으키는 긴장은, 「서문」에서 자기 세계의 미완성未完性을 통감한 저자의 인식과 공명한다. “이해의 밀도를 높인 뒤에 내놓는 비판은 달라져야 했다. 비판은 연구자인 나만의 몫이 아니다. 그/것도 세계를 해석하고 비판한다.”(10) 그 상호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책은 독자의 ‘수사적 고향’을 묻는 질문으로 문을 연다.

 

당신의 ‘수사적 고향’은 어디인가? 당신은 누구와 이야기할 때 편안함을 느끼는가? 철학자 뱅상 데콩브에 따르면, 어떤 인물의 수사적 고향은 “그가 자기 활동과 행적에 부여하는 이유라든지 그가 표명하는 불만, 혹은 그가 표현하는 찬사를 대화 상대자들이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곳에서” 멈춘다. 수사적 고향과 영토적 고향이 같은 이들은 드물 테다. 고향이 그립고도 멀게 느껴진다면, 고향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수사적 고향이 사라지기 때문은 아닐까.(9)

 

저자는 이 수사적 고향이 “저마다 빗장을 두른 세계”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곳에선 “자신들만의 은어와 규칙으로 성벽을 쌓은 채 전개되는 세계들의 싸움”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오늘날 온·오프라인에서 배설되는 차별과 혐오 표현에 넌덜머리가 난 사람들의 선택은 정치인의 쉰내 나는 화합도, 활동가의 철 지난 연대도 아닌 말 그대로 ‘거부’가 된 것 같다. 주변에서 만난 학생들이 생각하는 ‘안전한 공간’이란 남녀노소가 질펀하게 뒤엉키는 푸릉 같은 마을이 아니라, 위협이 될 만한 요인들을 애초에 걷어낸 무균지대에 가깝다. 

한국만 유별난 건 아니다. 근래 인류학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거부refusal의 정치’를 목격 중이다. 반복되는 억압, 통제, 폭력, 낙인에 지친 원주민, 홈리스, 여성 등은 연결 대신 단절을 선택하고, 거부 행위를 함께 실천하는 ‘우리’ 안에서 소속감을 느낀다.(31)

 

계급적 취향지대를 관통하는 마음의 구속력 … 상대와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편안함에 대한 감각을 요구한다. 이질적인 상대와는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거나 호기심의 대상으로 잠깐 소환하면 그만이다.(44)

 

위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강박적으로 이질적인 것을 막아내 구축한 ‘무균지대’에선 그 너머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어떤 비판이 가능할까? 도전받지 않고 침범당하지 않는 ‘수사적 고향’에는 청년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한 세계를 “‘이대남/이대녀’ ‘여초/남초’ ‘2030’ 프레임에 기계적으로 연루시킬 위험”, “인구 14억 나라에서 ‘싸우는’ 사람[저항자]의 존재”를 생각하지 못하고 ‘중국이 중국했네’란 말로 (오히려) 우리 자신의 역량을 한계 짓고 말 여지가 상존한다. 

 

문화적 취향, 정치적 선호, 삶의 지향, 타자를 향한 시선이 알고리즘에 따라 분기하고 데이터로 묶여 상업화되는 세계는 관계의 고유성을 무시하고, 우리 감정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든다. 비판이 떠난 자리에 들어선 비난은 벨 듯한 언어로 상대를 제압하는 데만 열중하면서 평범한 시민들로 하여금 갈등과 혐오를 피해 자신의 수사적 고향을 찾아 칩거하게 만든다. 이들이 각자의 고향에서 요새를 만들고 ‘안전’을 기준으로 타인-침입자를 감별하는 사회는 우리를 일상적 긴장 상태에 가둔다.(15)

 

인류학은 “섣부른 비판보다 다른 세계에 대한 진지한 배움이 먼저”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불화의 구실이자 “영구제명의 근거”였던 그 세계의 분투 너머로 “각자의 다양성을 경유하는 공통된 무엇”이 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고. 고향을 떠나와 이해의 공백지대에 발을 딛고 고개를 들면, 무심한 눈으로는 읽어낼 수 없는 세계가 무한히 펼쳐진다. 저자는 그리로 걸음을 내디디며 다짐한다. “나는 고향을 애써 찾지 않겠다고, 그 고향으로 쉬이 돌아가지 않겠다고.”

 

 

책임 있는 비판, 

불편한 공존

 

총 11부 64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인류학자로서 저자가 관심을 가져온 주제들을 주로 다룬다. 1부 「감각하기」는 어떤 세계들의 출현, 2부 「대면하기」는 세계의 반목과 충돌, 3부 「관찰하기」는 인류학의 현지로서 세계, 4부 「연루되기」는 저자의 오랜 연구 주제인 빈곤, 5부 「삶-노동하기」는 먹고살기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사유와 실천, 6부 「정치하기」는 일상에 펼쳐진 정치의 풍경, 7부 「돌보기」는 나이 듦과 돌봄에 관한 성찰, 8부 「자리하기」는 쇠퇴·소멸 담론에 포섭되지 않는 지역의 가능성, 9부 「공부하기」는 학습자이자 교육자로서 만난 배움의 세계, 10부 「읽기」는 비판자이자 참여자로서 임하는 독서, 11부 「지구-생활하기」는 행성적 위기와 공존의 모색을 이야기한다. 

출간 직전 이 책의 예비 독자에게 보낸 편지에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연루連累’는 다른 시간, 다른 환경에서 다양한 주제와 형식으로 쓰인 글들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관점입니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비판 사이에서 길을 내어보자는 제안이기도 합니다. 비판이 날 선 비난으로, 이해가 맹목적인 포용으로 앙상해질 때, 연루는 세계의 얽힘을 비추면서 우리를 이해와 비판 사이의 긴장과 대면케 합니다. 범죄와 접착된 이 단어의 불온함이 불편한 독자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묶여 있으면서(累), 동시에 맞닿은(連) 존재임을 상기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저는 우리 대부분이 지고지순한 투사가 아니라 혼탁한 세계에서 바둥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싶습니다.

 

세계란 무엇인가를 묻고 섣부르게 그 가치를 판단 내리는 대신 무수한 세계에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를, 그 세계의 고통을 어디로 가게 할 것인가를 꾸준히 고민하는 태도는 어떻게 가능한가? ‘낯선’ 세계에 길고도 집요한 애착을 품어온 인류학이 이 질문에 실천적 참조점을 제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불완전한 세계들을 등지지 않는 삶의 지향, 행위를 속단하고 비난하기에 앞서 왜 그런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행위자의 반경 안에서 추적해감으로써 획득해낸 이해의 밀도, “범주, 단위, 사건, 장소를 생산과 얽힘을 중심으로 궁구하는 … 작업”(조문영, 「행위자-네트워크-이론과 비판인류학의 대화」, 『비교문화연구』 제27집 1호, 2021, pp. 422-423)에서 체득되는 연루의 감각이 아닐까? “현전하는 것—그래서 연결을 따라가려는 우리의 출발점 앞에 놓인 것—은 거대한 불평등과 역사의 무게, 끈적끈적한 정동과 관계의 다발들”(같은 글, p. 427)임을 인정하면서, 저자는 인류학을 통해 “안이한 묵시록에 머무르지 않고 살아갈 가능성”을 발견한다.

 

붕괴, 종말, 파국 같은 단어를 심심찮게 접하는 세상이 됐다. 하지만 우리 공동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위기감을 실제로 느끼는 ‘우리’란 누구인가? 나는, 당신은 이 ‘공동’의 일부인가?(375)

 

대립과 적대가 불안에서 뻗어 나온 방어기제를 넘어 존재 양식으로까지 뿌리를 뻗어내려는 시절에, 각자의 취약성을 감당하는 와중에 “내가 당신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감”에 휩쓸리지 않고 동료 시민이나 비인간 생명과 새롭게 관계 맺는다는 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그것은 쉬울 리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이 예시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미니버스 택시’ 풍경을 가져와 독자로 하여금 “몸과 몸이 맺는 관계”를 돌아보게끔 한다.

 

유리병 속 올리브처럼 서로 짜부라진 채 차에 올라 덥고, 땀나고, 불편하고, 때로 위험한 마주침을 피할 수 없는 승객들. 그렇다고 허허벌판에서 내릴 수도 없기에 새로 탑승한 자에게 한 뼘 공간이라도 내줘야만 하는 사람들. … 무사 귀환을 하려면 제 공간 일부를 포기해서라도 타인에게 곁을 내어줄 수밖에 없다. 이 감각을 사회성의 원천으로 두는 ‘공동의 세계’는 분명 따뜻한 공동체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세계들, 미래들 사이의 불평등과 모순, 긴장과 마찰을 직시하면서, 동시에 행성적 재난과 마주하여 인간과 지구가 버틸 수 있는 ‘공동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으려면 에어컨을 곁에 둔 학자보다 찜통 버스에 구겨져 있는 승객에게서 지혜를 얻는 게 더 유익할 수도 있다.(380-381)

 

“모두가 공유한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형태의 공동의 삶, 집단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면, ‘세계의 한계들을 이동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때의 세계는 새로운 세계가 되는 것이다’.”(378) 그렇게 세계의 지평을 재정향하려는 우리 곁에는 동료 승객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과제인 동시에 가능성이기도 하다.

 

목차

서문 수사적 고향 너머 

 

1부 감각하기

평면을 뚫고 나온 사람들┃세계는 복수複數다┃우리는 ‘푸릉’을 원할까?┃호기심이 줄어들 때┃낯뜨거운 공론장┃취향지대의 마음들

 

2부 대면하기

위협과 기괴함의 시소 타기┃젊은 세대의 반중反中┃코로나 사태의 기이한 친숙함┃내가 만난 중국인들

 

3부 관찰하기

대의를 잃어버린 세계에서┃‘프런티어’ 북한과 식민주의 유령┃‘잉여 여성’이라는 낙인

 

4부 연루되기

빈자와 부자, 기생충과 숙주 사이┃‘기생수’와 대면하기┃멈추지 않고 살아갈 준비┃집을 원합니다┃랜드마크가 된 참사 현장┃취약함을 함께 견뎌내는 가족┃동자동이라는 평상┃‘소유주 혁명’과 개발 공화국의 민낯┃당신이 살 권리┃권리들의 사회와 사회 바깥의 주검들┃한국 주민운동, 화려하지 않아 다행인 역사

 

5부 삶-노동하기

자본주의 만세┃창업 너머의 새로움?┃코로나보다 독한 생존 바이러스┃노동자 청년의 안부를 묻다┃1997년 베이징, 2019년 홍콩┃코로나 이후, 연결의 빛깔┃노동의 대화가 국경을 넘는 법┃비정규직과 기본소득┃공생의 숙명┃물고기 그냥 줘라

 

6부 정치하기

‘주군 놀이’의 시대┃시선의 정치┃베이징의 현수막, 서울의 광장┃그늘은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 없애는 것이다

 

7부 돌보기

당신의 잎사귀도 진다┃자리를 찾지 못한 슬픔┃어르신 말고 노인┃노인 돌봄과 지구 돌봄┃미나리는 원더풀

 

8부 자리하기

“오죽하면 군부대라도 바랄까요”┃평등한 대안의 상상┃‘희망의 나라’, 이토시마 기행 일기

 

9부 공부하기

그들이 품고 온 세계┃더 ‘잘’ 싸우기 위한 숨 고르기┃학습권을 요구하라, 더 과감하게┃잔디밭의 몽상┃나는 너다?┃‘뜨거운’ 사회에서 살아가기┃Y에게 감사하며┃나를 가르친 어느 중국인 유학생┃중국 수업을 마무리하며

 

10부 읽기

‘가난 사파리’가 ‘가난 수용소’가 될 때┃사회적 버림의 연루자들┃여성 홈리스는 책이 될 수 있을까┃동아시아 ‘송곳들’의 지구전┃탁월함의 역설┃송이버섯 냄새를 맡자. 그다음은?

 

11부 지구-생활하기

취약한 생명들의 일보전진┃지구를 살리는 기본소득┃공동의 미래는 가능한가

 

원글 출처

 

본문인용

나를 반기면서도 불편해하는 사람들, 내 믿음을 수상쩍어하는 시선들, 내 감정을 휘저은 사회적 고통을 별것 아닌 듯 만드는 제도와 미디어. 고심하다 늦게 시작한 학문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내 아버지를 떠나듯 ‘아버지들’의 세계와 홀연히 작별하지 못했다. 그/것이 저 자신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무엇이 그/것을 꿈꾸거나 좌절하게 만드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었다. 그렇게 타자의 수사적 고향에서 비비적거리다 보면, 때로 차이들 심연의 공통성이 보였고, 이전의 내가 내뱉었던 독단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 비판은 연구자인 나만의 몫이 아니다. 그/것도 세계를 해석하고 비판한다. _「서문」

 

현지조사를 하면서 만나온 평범한 중국인들은 중국을 ‘중국 국가’ ‘중국 정부’와 곧바로 등치시키는 위험한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준다. 내가 바라는 삶의 경관이 배타적 주권을 내세우면서 국가 간의 힘겨루기에 매몰되어 있는 세계가 아닌 인간이 서로에게, 다른 생명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공생을 약속하는 세계였음을 다시 상기시켜준다. 중국이든 한국이든 근대성의 폭력이 누적된 공간에서 버텨오는 동안 ‘좋은 삶’의 기준이 얼마나 협소해졌는가를, 그럼에도 삶의 취약성을 딛고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평범한 을이 얼마나 많은가를 환기해준다. 무엇보다 그들은 섣부른 경계와 비난이 관심과 비판을 압도해선 안 된다는 자명한 원칙을 일깨운다. _「내가 만난 중국인들」

 

사실 주군 찾기는 전근대 원주민 사회의 철 지난 관행이 아니다. 강력한 아버지 지도자를 섬기는 집단은 세계 곳곳에 있다. 권위주의국가는 물론 시민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민주주의국가에서도 주군 찾기는 계속된다. 추종자들은 포퓰리즘으로 비난받을수록 더 단결하고, 성과 속의 경계를 뭉개는 대신 선과 악의 구분은 강화한다. …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부 광신도를 제외하면) 주군의 영원성을 바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대신 주군 찾기는 주군 놀이에 가까워지고 있다. 정치인은 물론 학자, 의사, 종교인, 연예인, 인플루언서, 성공한 투자자, 일타 강사, 드라마 캐릭터, MBTI라는 우주론 등등. 추종하고 의지하는 주군의 목록은 계속 늘어나고 바뀐다. 나를 위로하고 불안과 억울함을 달래준다면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주군이 될 수 있다. 주군을 쉽게 갈아치우는 시대는 달리 말하면 주군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시대다. 누구라도 믿고 싶지만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시대다. _「‘주군 놀이’의 시대」

 

“열네 살에 처음 배를 타서 30년이 좀 안 되는 세월 사이에 장어 통발배를 시작으로 야키다마 통통배, 대구리 배, 원양 트롤리선, 잡화선, 냉장 운반선, 케미컬 탱크선, 폐기물 운반선 등 다양한 배를 탔음.” 심장병, 폐결핵, 노숙 생활 등등 이후의 궤적을 보면 그의 생애에서 무엇을 ‘재난’ ‘위기’로 따로 떼어낼 수 있는지 솔직히 지금도 모르겠다. 역으로, 미래를 탈식민화하자는 밸런타인과 하순의 주장은 어떤 현상을 위기로 감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애초에 누려온 ‘정상성’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나는 살면서 어떤 자본과 자원에 쉽게 가닿았기에, 쪽방 주민들보다 감염이나 기후변화에 덜 취약한 환경에 있으면서도 이를 위기로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을까? _「공동의 미래는 가능한가」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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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저자 : 조문영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빈곤이란 주제를 새롭게 등장시키는 작업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The Specter of “The People”, 『빈곤 과정』을 썼다. 엮은 책으로 『동자동, 당신이 살 권리』 『문턱의 청년들』 『민간중국』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분배정치의 시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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