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에 삶이 휩쓸리지 않도록,
나의 돌봄에 닥친/닥칠 현실을 이해하고 의문을 맞이할 길잡이
사회적인 돌봄을 실현하는 다채로운 도전들의 지향과 현주소
돌봄에는 눈물과 분노, 상실과 그리움, 회한과 다짐 그리고 마땅한 언어를 찾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까지 종잡을 수 없이 교차한다. 그리고 개인과 가족부터 시민사회, 지역사회, 지자체, 국가, 지구적 세계가 복잡다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돌봄은 그만큼 가장 사적인 생애의 이야기인 동시에 가장 공적인 의제다.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보편적이면서, 가장 첨예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돌봄에 관한 이야기 또한 넘칠 만큼 많다. 고단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개인들의 서사가 있고, 세계를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논의, 그럴듯한 정책, 그에 따르는 비판까지 쏟아진다.
『돌봄과 인권: 돌봄으로 새로 쓴 인권의 문법』(2022)을 함께 쓴 김영옥, 류은숙 두 저자는 책을 낸 뒤, 여러 현장에서 만난 이들이 토로하는 갈증과 거리감을 마주한다. 그리고 돌봄의 경험 속에서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떤 경로를 겪는지, 어떤 도전에 직면하고 또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모색하기로 한다.
저자들은 지난 2년간 자녀 양육, 배우자 돌봄, 노부모 돌봄 등의 당사자부터 각지의 요양병원,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료사협), 발달장애인 단기거주시설 등을 꾸리는 이들까지 32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또 별도로 세미나팀, 활동가 캠프 등을 꾸려 연구의 깊이를 더하는 한편으로, 일본 오사카 사회복지법인 하트풀, 한신의료생협 등을 직접 방문 취재하기도 했다. 『돌봄의 상상력』은 그 결과물로서, 돌봄에 연루된 우리 삶의 다층적이고 내밀한 면모를 이야기에 녹여냈다.
“돌봄을 추상적인 윤리 강령으로, 정의로운 주의 주장으로 내세우는 건 돌봄 생태계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언제나 돌봄의 실질적인 요청을 급작스런 ‘닥침’이나 당혹스런 ‘호출’로만 만나게 된다면, 시민사회가 헛돌고 있다는 징표다. 시민의 시민 됨, 즉 시민적 덕성을 무엇보다 돌봄의 실천 경험, 돌봄의 역량, 돌봄 자산을 기준으로 이해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_‘서문’, 10쪽
만인만색의 돌봄, 그 한가운데 자리한 괴로움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어쩌다 고통과 고난이 되었는가
준희와 수연은 장애-비장애 쌍둥이 형제를 둔 부부다. 아이들이 태어난 뒤 둘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경기를 하며 새벽마다 깨는 아이, 각각 어린이집과 재활치료를 가는 아이들 일정, 당장 해야 할 업무 등을 두고 퍼즐 맞추듯 그날그날의 스케줄을 정한다. 맞벌이에서 외벌이가 된 빠듯한 살림도 불안하다. 장애의 끝은 어디일까, 비장애 형제자매의 성장 또한 그 장애의 영향을 받는다던데 하는 고민도 커진다. 더욱이 ‘자폐아가 있는 가정의 8할은 이혼한다’, ‘아빠들은 장애아 돌봄에서 다 달아난다’ 하는 세간의 말들도 마음을 후빈다.
평소 사회정치적 가치관이 배울 만하다 싶었는데 사고를 당하자 똥오줌 수발을 아내 말고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남편, 부모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닥치고서야 육십 평생 누군가를 돌봐본 적 없는 자신을 발견하는 ‘남자’ 등이 등장하는 또 다른 이야기들.
이 책은 이렇듯 누군가는 바로 지금 겪고 있는 돌봄의 상황 혹은 막연하게 ‘나에게 닥치면 어쩌지?’ 불안한 마음으로 상상하게 되는 돌봄의 상황을 구체적인 이야기에 담았다. 돌봐야 하는 대상도, 돌보는 대상도 각기 다른 이야기이지만, 돌봄에 맞닥뜨렸을 때 마음에 휘몰아치는 감정의 파고들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내 삶에도 돌봄이 닥쳤다’고 말하곤 한다. 흔히 어떤 일이 ‘닥친다’ 할 때는 그 앞에 시련, 위험, 역경 같은 말이 오지 않던가. 그런데 누군가를 돌보는 일에 닥친다는 말이 왜 이렇게 잘 들러붙을까. 그만큼 누군가를 돌본다는 일은 보편적인 일이면서도 자기 삶의 경로를 수정하고 계획을 다시 짜야 하는 큰일이다.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생로병사를,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상황을 구체적인 공포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정상일 리 없다.
이 책은 각각의 사연에 해법을 다는 대신, 아주 간단해 보이는 돌봄의 국면에도 얼마나 여러 겹의 역할이 필요하고, 다양한 질문들로 갈등하게 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돌봄의 그 진면목을 이해할 때 비로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돌봄이 당장 공적 의제로 다뤄진다고 해서 정의로운 제도로 부드럽게 안착하는 그런 낭만은 없다. 돌봄의 배치를 달리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 돌보고 돌봄 받는 몸들은 이런 배경 속에서 서로의 관계를 기획하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성공, 결렬, 어느 정도의 포기, 재시도, 재도약…. 매순간 이 기획을 어떻게 실현케 할 것인가, 협상이 필요하다.” _‘돌봄을 협상의 자리로’, 53-54쪽
돌봄을 중심으로
관계와 사회의 새로운 힘을 모색하는 사람들
“그냥 지쳤어요.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에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주인공 염미정의 대사다. 아프고 다치고 늙어 돌봄이 필요할 때조차 돈 걱정, 일 걱정부터 하는 것이 보통의 삶이다. 노동의 시계에 맞춰 삶이 돌아가고, 돌봄은 이른바 ‘생산활동’의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사회이기에 돌봄은 삶에 ‘닥치는’ 것이 된다.
이 책은 각자의 고단한 삶을 극복하고 이 질서를 대신할 다채로운 시도들을 보여준다. 의사, 활동가, 사회복지사 등이 주민들과 함께 지역사회 아이들을 돌보는 사회적 양육 프로젝트, 수십 년 전 병원 하나 없던 빈민촌에 뜻을 모아 만든 조합에서 출발해 이제 돌봄으로 영역을 넓히는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질환만이 아니라 환자의 삶 자체를 직접 찾아가 돌보는 방문진료, 돌봄과 의료가 별개가 아니기에 지역사회 통합돌봄을 기획하는 의사, HIV 감염인끼리 서로를 돌보는 퀴어 공동체까지.
아직 내용이 희미하거나 성과가 미미한 경우도 있다. 재정 부족, 사회의 냉담처럼 이들이 부딪히는 한계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가 정부의 정식 ‘사업’이 되고, 더 많은 지역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실현되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래서 프로젝트 하나하나의 내용도 흥미롭게 새겨 볼 만하다. 여기에 더해 이들의 지향점이야말로 우리에게 ‘돌봄이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되새기게 한다. 바로 서로 돌보고 같이 돌보는 관계를 만들려는 도전, 돌봄을 중심에 놓고 삶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라는 공통분모다.
저자들은 “돌봄의 경험은 실패와 좌절,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보람, 사랑과 증오 등 감당하기 어려운 정동들로 요동”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또한 단지 윤리거나, 단지 착한 시민의 이상이거나, 단지 온기 있는 공동체의 소망이 아니라 지역, 인구 분포, 연령, 세대, 산업 형태, 자연환경 등을 포개놓고 살피고 분석하면서 통합적인 디자인해야 하는 대상”이 돌봄이라고도 말한다. 그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 모두다. 이 책이 구체적인 돌봄의 서사, 상상력을 자극하는 돌봄의 프로젝트들을 두루 보여주는 이유다.